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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행복, 특권과 의무 (신 33:29)
신명기 33장은 죽음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이
는 창세기 49장에 나타난 ‘야곱의 축복’의 내용과 방식이 비슷한데, 대체로 예언적
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33장의 앞부분에서 잇사갈과 시므온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축복하며, 29절에 가서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동시에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 해당되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
은 모세의 모든 축복을 요약한 ‘요약적 축복(summary blessing)’이라고 말할 수 있
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전체에 해당되는 축복의 말씀은 오늘날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육적 이스라엘은
신약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교회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bless’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축복’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하나님을 향할 때는
‘송축’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모세는 먼저 하나님을 송축한 후에, 비로소 이스라
엘 백성을 축복합니다. 26-27절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말씀입니다. “여수
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
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여수룬’은 ‘나의 의로
운 백성(my righteous people)’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를 때
애칭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공식적이고 법적인 관계
를 말씀하실 때는 ‘이스라엘’, 혹은 ‘야곱’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지만, 부모가
자녀를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라고 부르듯이 이스라엘을 애칭으로 부르실 때는
‘여수룬’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자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
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과 모성적인 자비를 송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
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
의 성도 된 내 자녀들이여! 너희들은 행복자로다.” 하나님은 독특하고 유일하십니
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독특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
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29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은 독특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행복자라고 칭함 받을만한 독특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1. 두 종류의 행복
모든 사람에게 행복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20세기의 유명
한 무신론자인 버틀란드 러셀은 58세에 저술한 「행복의 정복」이라는 유명한 책을 통
해 인간이 사는 세상을 본질적으로 불행한 세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타인과의 경쟁,
피로, 권태, 죄의식, 피해망상, 타인에 대한 횡포, 어두운 인생관 등이 인생을 불행하
게 만드는 원인이며, 따라서 인간의 현실이 늘 불행하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고 행복
해지려고 노력하면 행복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러셀의 논리였습니다. 또한 러셀은
동물의 행복과 인간의 행복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동물은 건강하
고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을 누릴 수 있지만, 인간은 이런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행복
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정신적인 열정과 지성적인 만족을 가지고 타인과 외부세
계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살아갈 때 행복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습
니다. 역사상 최고의 지성 중 하나라고 손꼽는 러셀도 행복에 대해서는 이정도의 논리
밖에 펼 수 없는 제한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행복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
엄 있고 확신에 찬 선언입니까? 모세는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행복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는 행
복자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이미 행복자가 된 사람, 이것이 러셀의
행복과 하나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두 가지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첫 번째로 거짓된 행복입니다. 이는 행복하지만 불안할 수밖에 없는 거짓된 행복으로
러셀이 말한 불신자들의 행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질적, 정신적, 지성적인 만족이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짓된 행복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위를 받으니 행복합니다.” “좋은 직장을 얻어서 행복합니
다.” “좋은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합니다.” “심오한 철학을 깨달으니 행복합니
다.” 이런 행복들은 일시적인 만족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노력해서 쟁
취한 이 행복은 불안한 행복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보장해주는 존재가 없습니다. 행복하지만 축복받지 못한
행복(happy but unblessed)입니다.
어떤 시골 총각과 처녀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서로 꽃반지도 끼고, 새끼손가락도 걸
면서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고, 영원토록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살자고 약속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녀가 총각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했습니다. 총각이 대머
리이기 때문에 창피하다는 이유였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지만 이 총각은 사귀던
처녀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대머리 총각이 싫어서 떠났던 처녀가 재벌집 아들과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
습니다. 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그래도 자기의 첫사랑이었던 여인이었기 때문에 축복
하고 싶어서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에 참석한 이 대머리 총각은 기가
막힌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첫사랑 여인의 신랑 되는 재벌집 아들이 대머리였
던 것입니다. 자신과 사귈 때는 대머리가 싫었던 여인이 돈 때문에 재벌집 대머리 아
들은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의 조건은 수시로 바뀝니다. 그러므
로 인간적인 행복은 불완전하고 지속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하는 행복은 이런 종류의 인간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
장하시고 축복하시는 행복(blessed happiness)입니다. 그 행복은 참 행복(true
happiness), 영적인 행복(spiritual happiness), 하늘로부터 온 행복(heavenly
happiness)입니다. 이 행복은 인간이 노력해서 획득되는 행복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격도 없고, 공로도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거저주시는 행복입니다. 행
복의 근원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원하며, 외부적인 상황의 지배도 받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날씨만 어두워져도, 비만 와도 영향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환경과 관계가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선포하던 시기는 외부적으
로 평안하거나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난을 겪은 후였고,
가장 의지하던 지도자 모세도 죽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
나안 땅도 편안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했고, 가나안 7족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뒤에는 고난이요, 앞에는 전쟁입니
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모세는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낙심되더라도 안심하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행복자이기 때문입니다.
2. 왜 행복자인가?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모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행복자라고 선포
하고 있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의 구원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
고 선포합니다. 이 구원은 인간의 공적과 노력과 자유의지에 의한 구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인한 구원(saved by the Lord)입니다. 구원의 시작도, 과정도, 완성
도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의한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
한 구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생활을 할 때, 애굽 왕 바로의 압제로부
터 구원받은 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장자를 죽이는 죽음의 천사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합니까? 홍해에 가로막혀 몰살당할 위기에서 홍해
가 갈라져 맨 땅처럼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이 인간의 공적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목말
라 죽을 위기에 닥쳤을 때, 반석에서 생수가 나와 해갈할 수 있었던 것이 인간의 노력
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굶어 죽을 위기에서 하늘의 만나를 40년 동안 먹은 것이 인간
이 쟁취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까?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여호와의 구
원이었습니다.
성도들이 받은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적, 자유의지의
결단으로 획득한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를 깊이 사랑하셨습니
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미리 아심’, 혹은 ‘예지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저 하늘에 별이 뜨기도 전에, 아지랑이가 이 땅에서
피어나기도 전에, 창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를 이미 구원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나 죄와 사망 가운데서 방황하던 우리를 불러주셨
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공로가 하나도
없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키시고 덧입히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
하셨고 영원한 세계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구원입니
다.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영원한 형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애굽의 재
물과 음식을 부러워하고, 가나안 땅의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합당
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할 수도 없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
는 참된 행복자요, 영원한 행복자인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에 행복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방패가 되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
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하는 백성이었습니
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입니다. 언제
어디서 불화살과 칼이 우리를 위협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
신 하나님께서 어떠한 공격도 막아내시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
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영광의 칼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하나님은 방어적인 무기가 되실 뿐만이 아니라 공격적인 무기도 되어 주십니다. 하나
님은 우리의 ‘탁월한 검’(Sword of your excellency)이며 ‘영광스러운 검’(Your
glorious sword)입니다. 영광의 검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귀는 끊
임없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좌절시킵니다. 마귀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너는 불행한 자
다. 너는 행복하지 못해. 네 인생은 비참해. 네 인생은 불행해”라고 속삭입니다. 오
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도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공격했기 때문입니
다. 대한민국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자살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마귀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인생의 참된 가치와 행복을 알
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마귀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가 육신의 정욕과 안
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셨듯이 우
리도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에는 영광의 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님께서도 성령의 검, 즉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쳤습니다. 이 세상은 온통 마귀
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화와 책을 통해 드러난 사상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유수한 신학대학의 교수들조차도 마귀의 사상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의
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모든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혹시라도 낙심하
거나 좌절된 분이 계십니까?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불평과 절망
이 사라지고, 행복과 기쁨이 다시 찾아옵니다.
넷째로 인생의 승리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29절)라고 기록되
었습니다. 이는 최종적인 승리의 확신입니다. 원수는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
다. 눈에 보이는 원수든,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원수는 결
국 우리 앞에 굴복하고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이 우리를 쓰러뜨렸다고 축
배를 들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치료하셔서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성숙시키
십니다. 실패가 우리를 넘어뜨렸다고 좋아할지라도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마귀가 사람을 속여 승리했다고 잔치를 벌일지라도 하나님은 마귀
가 거짓말쟁이임을 드러낼 것입니다. 사망이 우리를 죽여 육신을 관 속에 집어넣고 자
축의 잔을 들지라도 그것이 결코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은 육신을 다시
살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하시고 영원토록 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
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보장받은 궁극적인 승리자입니다.
3. 행복자의 의무
그렇다면 행복자가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행복자는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행복은 애굽의 금은보화와 높은 권세, 또 맛있는 음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
다. 가나안 땅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은 광야에서 애굽의 고기와 마늘과 파를 그리워하다가 불평, 불만에 빠져 하나님의 징
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바알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다가 오히
려 불행을 맞이하고, 결국 나라를 잃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였습니다.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유명했던 ‘행복’이라는 노래 중에 ‘행복은 멀리 파도를
넘는다’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은 찾으려 하면 파도를 넘어야 합니
다. 권력을 쥐어야 행복할까요? 권력이 행복인지 알고 싶으시다면 노무현 대통령께 가
서 물어보십시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행복인지 알고 싶으시다면 3년 전에 투신자살
한 정몽헌 회장님께 물어보십시오. 참된 행복은 애굽에서 오는 것도, 가나안 땅에서
오는 것도, 광야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
님께서 행복하게 해주신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행복은 사람이 추구할
필요도 없이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너는 행복
자’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건강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아는 간단한 방법은 내가 어디에서
행복을 추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것에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면 그 영혼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영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라면 참된 행복자, 영원한 행복자인줄로 믿으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행복자인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을 격려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방패
와 영광의 칼이 되어 주시며, 궁극적인 성공을 주실텐데 왜 불행합니까? 하나님은 우
리가 ‘넉넉히 이기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좌절이나 근심은 결코 성도
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인 다윗도 때로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영혼을 격려
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11). 여러분의 마음에 근심과 좌절이 있다면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영혼을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아! 네가 낙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불행할 이유가 없
다. 너는 행복자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고, 네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라.”
셋째로 우리는 행복자이기 때문에 불행하거나 거짓된 행복에 속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
된 행복의 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얻은 행복이 참 행복이요, 영원한 행복임
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요, 선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만 와도 우울하다고 말하며 영혼의 행복을 잃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천지가 개벽을 한다고 할지라도 잃어버릴 수 없는 행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생애 동안 획득
한 행복을 가지고 살다가 영원을 지옥에서 불행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아니면
현세에도 행복하고 영원한 세계에서도 행복한 것이 바람직합니까? 우리는 현세에서도
행복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도 행복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복을 알지 못하여 불행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행복을 전파하는 여러분들
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우리는 내세에서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행복자이기 때문
에, 이 행복을 잘 알고 누려야 합니다. 행복한 성도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
다. 또한 행복한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
경을 많이 읽는다고 할지라도 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영혼은 불행합니다. 그
런 사람이 이루는 가정은 불행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도 불행할 것입니다. 우리
는 빼앗길 수 없는 행복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행복자로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매일의 삶 속에서 행복의 향기를 발하는 성
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피영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