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하게 율법을 준행한 왕
23: 24-27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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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대로 접어든 B.C.640년경부터 왕국 분열 후 유다 역사상 가장 부흥했던 시기인 B.C.609년까지를 주 활동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의 대외 정세는 남유다를 계속하여 위협하던 앗수르의 무리한 대외정복 정책으로 국력을 많이 낭비하게 되었고 급기야 B.C.612년에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 성 함락으로 멸망합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을 온전히 준행했습니다.
이스라엘 열왕들 중에 요시야 만큼 온전하게 율법을 준행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앞서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하게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왕상18:5).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 평가 내용을 분석해 보면
①히스기야가 어느 왕보다도 하나님을 의뢰한 것이 유대 왕중에 제일
②요시야는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함에 있어서 열왕들보다 더 완전했다라는 의미로 구분됩니다.
요시야 왕은 남 유다 왕통 계열로 보자면 20대 왕 중에 16대 왕이니 그의 이전에 15대 왕이 있었고(통일 왕국 3대가 또 있음) 후에도 4대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 이전 왕 중에서도 또 그 이후 왕 중에서도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이 요시야 보다 나은 왕은 나지 못하였으니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는 말이 결단코 과장된 말이 아니고 허세를 부리는 주장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요시야 왕의 율법 준행을 통일 왕국 때의 다윗을 포함해서 말하고 있는지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워도 본문의 내용상으로 통일 왕국 때의 3(사울, 다윗, 솔로몬)명의 왕을 다 포함해서 말한 것으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포함해서 요시야 왕이 왜 가장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이 되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 그들이 지켜야 될 규례를 신명기 12: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요시야 왕은 가증한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다윗왕은 대외 정복으로 변방을 공략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영토확장을 하면서도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와 더불어 성전 제사제도를 위한 준비인 성가대 및 제사제도를 만드는데 공을 세웠으나, 그 당시 우상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상제거와 같은 일은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하나님 중심인 다윗을 백성이 따랐기 때문이 아닌지요.
그러나 요시야왕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 책을 읽어 자신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했습니다(왕하22:8-19). 또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했습니다(왕하23:1-3). 남방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 온 이스라엘의 우상을 제거하고 정결케 했습니다(대하34:3). 요시야 왕은 대대적인 회개 운동 후에 우상 숭배의 제단과 그 형상, 또 이를 주관하는 자들까지도 제거할 만큼 결단력 있고 실천적인 왕입니다(왕하23:4-15).
요시야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바로 알아 찾았습니다. 왕의 첫 사업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청결케 하였으니 그 산당과 아셀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제거하매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고 또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제사장의 뼈들을 단위에서 불살랐습니다.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시야는 공적(公的)인 예배의 완전한 개혁을 성취한 후 사적(私的)으로 개인들의 가정(신접한 자와 박수, 드라빔)에서 행해지던 모든 미신과 우상 숭배를 폐지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국민 의식구조를 하나님만 의지해야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심어주려고 한 일입니다. 그것도 기준을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두고 행하려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19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왕 여로보암은 북쪽에 단과 남쪽의 벧엘에 금송아지(수소) 우상을 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 놀라운 성전과 언약궤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용물로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가 모두 우상을 섬기었기에 모두 율법을 범한 악한 왕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대나라도 20명의 왕중 선한 왕 8명과, (3대 아사, 4대 여호사밧, 8대 요아스, 9대 아마샤, 10대 아사랴, 11대 요담, 13대 히스기야, 16대 요시야) 종교 개혁을 단행한 왕이 4명이 있습니다. 3대 아사, 4대 여호사밧, 13대 히스기야, 16대 요시야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산당을 온전히 제거하여 온전하게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왕입니다. 이 산당이 남왕국의 백성들을 종교적인 타락을 가져오는 온상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산당 제거(왕하23:5,8,9,13)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요시야 왕처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모두 정결하게 씻어 내고 마음의 종교 개혁을 가져오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요시야 왕은 성전을 정결케하고 성전 제사를 드렸습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왕하18:5에서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어 히스기야 왕을 오직 남왕국 유대나라의 모든 왕과 비교하고 있지만, 그러나 요시야 왕은 왕하23:25에서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고 기록하여, 온 남북왕국의 왕과 통일왕국의 왕까지 포함하여서 요시야 왕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준행한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면 다윗은 가나안에 정착되어 왕정 시대인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여 율법에서 말한 신12:5-6의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라는 말을 다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려고 노력은 했습니다만 요시야 만큼 철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비록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에 마련한 새 장막에 옮겨 놓기는 했지만(대상 15장) 희생 제사 만큼은 여전히 모세의 장막이 있던 기브온 산당(대상16:39-43)에서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번제단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상 16:37-42에 보면은 다윗 시대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막이 두 곳에 설치됩니다. 그래서 다윗 시대에는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도 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기브온 산당에서는 사독이 대제사장으로 봉직했고 예루살렘 장막에서는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으로 봉직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에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직에서 파직된 이후로는 사독이 대제사장직을 단독으로 봉직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이전까지는 기브온 산당에서 대제사장 사독의 주재 하에 아침 저녁에 번제가 드려졌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장막에는 제단을 비롯한 제사 기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B.C.11세기 중엽쯤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각축전이 일어났던 아벡 전투(삼상4:1-11)에서 이스라엘이 패함으로 법궤를 빼앗기면서 중앙 성소가 있던 실로가 멸망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기 전까지 기브온 산당에 성막과 번제단(대상21:29)이 있으므로 번제가 불가피하게 기브온 산당에서 드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조석으로 번제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것입니다(출29:38,39; 민28:3,4).
또 찬양대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가 예루살렘과 기브온 두 곳에 있게 된 까닭에 부득이 둘로 나뉘어 아삽과 그가 이끄는 찬양대는 예루살렘에서, 헤만과 여두둔이 이끄는 찬양대는 기브온에서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어러분!
우리는 요시야 왕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일점 일획 이라도 변개됨 없이 순종하여 지키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다윗은 율법을 범하여 간음과 살인죄가 있으나 요시야는 율법을 범한 것이 없습니다.
그밖에 삼하11장과 12장에 보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도록 만든 간접 정범이며 또 대상 21장에서 사탄의 충동을 받아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범죄와 율법 미시행으로 열왕기서 기자는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이 요시야 보다 나은 왕은 나지 못하였으니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시야의 경건에 대한 평가는 여호사밧(대하 17 :3) 및 히스기야에 대한 평가와 동등합니다(18 : 3). 때문에 후대 사가 (史家)들은 여호사밧,(왕하18:3에는 아사로 되어있다.) 히스기야, 요시야 이세 사람을 가리켜 유다의 3대 성군(聖君)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시야가 모든 인간 삶의 유일한 정도(正道)인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생각하며 판단했습니다(신 5 : 32;28 : 14).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이 점에 있어서도 서로 일치합니다(18 : 6).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의 선한 행위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요시야 왕의 완벽한 순종 행위와는 달리 유다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므낫세 때의 구습(舊習)을 쫓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하였습니다.
또 요시야 왕은 옥에 티처럼 싸우지 아니해도 될 애굽왕 바로느고와 싸우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잘 하다가도 이와 같이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여하간 요시야 왕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요시야 왕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인정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