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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 1 바라는 것들의 실상 - 히 11: 4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제 11 장 : 믿음의 본질
1. 믿음의 정의 ( 11: 1 – 3 )
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②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③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본 장은 '믿음의 장'으로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믿음'(2회), '믿음으로'(20회), '믿음을 좇는' 혹은 '믿음을 따라'(2회)라는 단어나 구절이 24회나 나온다.
히 11: 1 바라는 것들의 실상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믿음은 믿는 마음이요 신앙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믿음을 통해 현재 우리 속에 있고,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실상이요'(휘포스타시스)는 '아래에'라는 뜻인 '휘포'와 '서게 하다', 또는 '확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래에 확립하다', 혹은 '...아래에 서다'를 뜻하는 것으로 '기초'(Morris), '실체'(KJV), '확증'(NIV), '객관적 실체'(Lane)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객관적 실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이다(Lane). 바꾸어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객관적 실체를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의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게 하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확신하게 한다(Grasser).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믿음'과 '바람'(hope)을 거의 동일시하였다. 이는 믿음의 미래 지향적인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Thompson).
2]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들'(프라그마톤...우블레포메논)에서 '것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톤'은 '되어진 것', '사실', '행위', '사건', '업무'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인간사(human events)를 의미한다.
저자는 '프라그마톤'을 사용하여 믿음을 인간사의 영역에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Lane).
이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플라톤의 철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의 것들이 아니라 아직 보여지지 않은 사건들, 즉 종말론적 미래에 나타날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한다(Williamson).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와 같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고 진지하게 나아가게 한다(Lane).
'증거'(엘렝코스)는 법률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으로서(Morris) '객관적인 증거' 혹은 '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히 11: 2 증거를 얻었느니라.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보지 못하나 그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사실로 증거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같은 인물들을 가리킨다.
1] 선진들이
'선진들'(호이 프레스뷔테로이)는 '조상들'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1: 1)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앙위인들을 지칭한다(Morris).
2]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로써'(엔 타우테)는 여성 지시 대명사로서 1절에서 언급한 '믿음'(파스티스)과 연결된다.
구약 시대의 신앙 위인들은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증거를 얻었다.
히 11: 3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사람들 중에서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알려주신 진리이며, 그것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다섯 권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근본이 되는 진리이며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리이다.
1]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믿음으로'(피스테이)는 본 절에서 31절에 이르기까지 헬라어 본문의 첫 단어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옛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고 행동한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4-31 절까지는 '피스테이'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해 사용된 반면 본 절에서는 저자와 수신자들을 포함한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해 사용되었다.
본 절에서의 강조점은 헬라어 원문의 첫 문장인 '믿음으로... 우리가 아나니'(피스테이 노우멘)로 진리에 대한 인식이 믿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시사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본 절은 창 1: 1에 나타나는 세상 창조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토 블레포메논)은 헬라적 유대주의(hellenistic judaism)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가시적인 우주를 가리킨다(외경 지혜서 13: 7).
'나타난 것'(에크 파이노메논)은 헬라어 오랜 철학적 전통에서 기인한 표현이다(Williamson, Philo).
저자는 유대주의 전통과 헬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내용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당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플라톤과 필로의 우주론을 비판한 것이다.
즉 태초 혼돈 상태에 있었던 가시적인 물질들을 창조자가 이데아나 원형을 사용하여 질서를 부여함으로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우주론을 배격한다.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헬라적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창세기 1장을 이해하려는 시각을 막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형태를 갖추지 못한 물질들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 지혜서 11: 17, Lane).
'보이는 것' 즉 물질세계는 '나타난 것' 즉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Ehrhardt).
즉 저자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Widders, Williamson, Bruce).
4]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상 행하신 많은 일들과 말씀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통해 믿게 되었다.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지 않고 그 세계는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런 비슷한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몸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이 전부라거나 물질이 영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해야 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전지전능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2. 믿음의 선진 ( 11: 4 – 7 )
④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⑥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⑦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 11: 4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저자는2 절에서 언급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실례를 본 절에서 시작하여 31 절까지 나열하고 있다.
1]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본 절은 창 4: 3-5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사건을 배경으로 말하고 있다.
* 창 4: 3-5 –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세기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悅納)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히브리서 저자는 그 이유를 밝힌다.
70인 역에 따르면 가인의 제물이 거절당한 이유가 제사 절차상의 결함 즉 가인은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나누는 법대로 나누어 놓지 않았고 아벨은 제사법대로 바르게 제물을 잘라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다(Aptowitzer, LXX 창 4: 7).
필로에 의하면 아벨의 제물은 생명체였던 반면에 가인의 것은 생명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세푸스는 가인의 행동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제물의 차이가 아니었다. 즉 아벨이 드린 제사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였다(Morris).
아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면 가인은 믿음이 없이 의무적으로 드렸다.
따라서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것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 믿음 때문이었다.
2]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증거 하심이라)
이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한 사실을 가리킨다(창 4: 4).
즉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 하심으로 증거하셨다.
3] 그가(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오히려) 말하느니라.
본문은 창 4: 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을 암시한다. 창세기에서는 '핏소리'로 되어있는 반면 헬라어 본문에는 '디헤스'(그것을 통하여)로 되어있다.
'헤스'는 '믿음'을 뜻할 수도 있고 '제사'를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대로 아벨이 드린 제사가 그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이든 제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벨은 죽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Lenski).
본문은 믿음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4 장에 보면,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은 정성과 피의 제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그의 정성을 증거한다. 또 그가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린 것은 그의 속죄 신앙을 보인다.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아벨에게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벨은 아마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사건을 듣고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가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을 본 사건이었다. 그는 가죽옷을 통해 장차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가리어질 것을 암시하셨다.
아벨은 이 사건을 통해 짐승 제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짐승 제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속죄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고 본다. 아벨은 지금도 이 믿음을 증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