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유역 회복 후 상실(554)
백제의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왕위계승을 둘러 싼 내분을 틈타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의 옛 백제 땅(한강 하류) 수복(收復) → 백제(한강 하류), 신라(한강 상류,551) → 진흥왕의 배신(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553년 한강 하류마저 장악) → 나(신라) ․ 제(백제) 동맹 결렬(553) → 성왕의 신라 공격(대가야와 연합하여) → 관산성(옥천. 삼년산성) 전투에서 성왕 전사(554) → 중흥을 위한 성왕의 노력 좌절 → 백제의 쇠퇴(여 ․ 제 동맹 결성)
■ 나 ․ 제 동맹(433 ~ 553)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여 신라와 백제가 맺은 공수(共守, 공격과 수비) 동맹. 백제의 비류왕과 신라의 눌지왕이 433년 체결한 이래, 왕실간의 결혼동맹으로 발전하였으나 진흥왕의 배신(한강 하류 장악)으로 553년 깨어졌다.
■ 관산성 전투
ㆍ구해왕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 김무력(백제의 성왕 군대를 격파한 장군) → 김서현
→ 김유신
ㆍ 554년(진흥왕 15)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성왕(聖王)이 패사(敗死. 싸움에
져서 죽음)한 싸움이다.
433년(눌지왕 17)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공수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551년(진흥왕 12)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한강상류지역을, 백제는 남․북한성(南北漢城)을 포함하는 한강하류방면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553년(성왕 31) 진흥왕은 백제가 회복한 남․북한성 등지를 탈취하여 자국의 주현(州縣)으로 삼아 신주(新州)라 칭하였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관산성의 군주(郡主) 각간(角干) 우덕(于德)은 전세가 불리하자 신주(新州:경기 광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의 원조를 얻고, 삼년산군(三年山郡:보은)의 비장(裨將)인 고간(高干)․도도(刀都)가 구천(狗川:옥천 부근)에서 백제군을 격퇴하니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좌평(佐平) 4명과 군사 2만 9600여 명의 전사자를 냈고, 120년간이나 계속된 나제동맹은 깨졌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는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과 함께 서해를 거쳐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문호를 확보하였다는 점에 중요성이 있다.
■ 양수리(兩水理. 두 물머리) : 팔당댐. =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