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25】 6
5) 보리(菩提)의 상(相)을 떠남
菩薩善觀諸行法하야 了達其性不自在하니
旣知諸法性如是일새 不妄取業及果報로다
보살이 모든 행법(行法)을 잘 관찰하여
그 성품 자재하지 못함을 통달하니
모든 법의 성품이 이런 줄 알고
허망하게 업(業)과 과보(果報) 취하지 않네.
▶강설 ; 행법(行法)이란 일체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파악하여 깨달아 아는 일이다. 공관(空觀)과 중도관(中道觀)이 행법의 큰 주류를 이룬다. 일체 자성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함을 행법으로 통달한다. 모든 법의 성품이 이와 같은 줄을 알아 업과 업의 과보를 허망하게 취하지 않는다. 일체 업과 과보가 중도적 공성이기 때문에 허망하게 취하지 않는다.
無有色法無色法하며 亦無有想無無想이라
有法無法皆悉無하니 了知一切無所得이로다
색법(色法)도 무색법도 없는 것이요
생각 있고 생각 없는 것도 다 없으며
있는 법도 없는 법도 모두 없나니
온갖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줄 알도다.
▶강설 ; 한 게송에 없다는 뜻을 가진 글자[無]가 여덟 자나 된다. 반야심경도 오로지 없다는 뜻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질인 법이나 물질이 아닌 법이나 생각이 있음과 없음도 모두 없으며, 있는 법도 없는 법도 또한 없다. 그래서 끝내는 온갖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줄을 알 뿐이다. 있는 듯이 여겨지는 것이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들의 일체 고통은 이와 같은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어리석음 때문에 탐욕을 부리고 분노를 터트린다.
一切諸法因緣生이라 體性非有亦非無니
而於因緣及所起에 畢竟於中無取着이로다
일체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라
자체 성품 있지 않고 없지도 않아
인연과 인연으로 생긴 것들에
필경에는 그 가운데 집착 없도다.
▶강설 ; 불교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가르침이다. 일체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기고 인연으로 소멸한다. 한 그루의 큰 소나무도 인연으로 생긴 것이고, 한 채의 큰 법당도 인연으로 생긴 것이고, 사람도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다시 또 인연으로 없어진다. 명예와 재산과 일체 부귀공명도 모두 인연으로 생겼다가 인연으로 소멸한다. 그 자체의 성품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인연이라는 존재원리나 인연으로 생긴 것이나 필경에는 그 무엇도 집착할 것이 없다. 모든 사람이 이 인연이라는 존재원리 하나만 철저히 파악하여 생활에 옮긴다면 제2의 화살에 의한 고통은 받지 않는다.
一切衆生語言處가 於中畢竟無所得이라
了知名相皆分別하야 明解諸法悉無我로다
일체 중생들의 말하는 곳이
그 가운데 필경에는 얻을 바 없어
이름과 모양이 분별임을 알고
모든 법이 무아(無我)임을 분명히 아네.
▶강설 ; 위의 게송과 연관된 뜻이다.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는 모든 것은 필경에 얻을 것이 없다. 이름도 모양도 모두가 분별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모든 법이 무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연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무아다. 즉 고정된 실체가 없다. 여러 포기의 짚이 모여서 짚단이 되고 지수화풍 사대가 모여서 사람의 육신이 된다. 짚이나 사대나 하나하나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짚단도 없고 사람의 육신도 없다. 1백 명이 모여 법회를 이루었으나 법문이 끝나고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법회란 없는 것과 같다. 글자 210자가 모여서 법성게가 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흩어지고 나면 법성게란 없다. 금강경도 법화경도 화엄경도 8만대장경도 모두 이와 같다.
如衆生性本寂滅하야 如是了知一切法하니
三世所攝無有餘라 刹及諸業皆平等이로다
중생들의 성품이 본래 적멸해서
이와 같이 일체법을 모두 잘 알며
삼세에 남김없이 다 포섭되어
세계와 모든 업이 모두 평등하도다.
▶강설 ; 중생의 성품과 일체 존재의 성품은 본래 텅 비어 적멸한 것이다. “제법은 본래로 적멸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이치로 일체법을 알아서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법을 이 원리에 포섭한다. 그러므로 세계도 인간이 짓는 모든 업도 적멸하여 평등하다. 연기와 공성과 무아의 이치가 적멸과 같은 맥락이다.
以如是智而廻向에 隨其悟解福業生이나
此諸福相亦如解하니 豈復於中有可得가
이와 같이 지혜로써 회향을 하면
이해를 따라서 복이 생기고
모든 복덕 모양들도 이해와 같으니
어찌 다시 그 가운데 얻을 것이 있으랴.
▶강설 ; 일체 존재의 연기와 공성과 무아와 적멸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지혜로써 회향하면 이와 같은 이해를 따라 큰 복이 생긴다. 그 큰 복도 역시 연기와 공성과 무아와 적멸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체법이 연기며 공성이며 무아며 적멸이거늘 어찌 다시 그 가운데 얻을 것이 있으랴.
如是廻向心無垢하야 永不稱量諸法性하며
了達其性皆非性하야 不住世間亦不出이로다
이와 같이 회향하는 마음에 때가 없어져서
영원히 법의 성품 헤아리지 아니하나니
성품이 성품 아닌 줄을 모두 다 알고
세간에 머물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도다.
▶강설 ; 일체법이 연기며 공성이며 무아며 적멸임을 아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회향이다. 일체존재에 대해서 이와 같이 회향하면 마음에 번뇌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영원히 모든 법에 대해서 칭량하지 않게 된다. 공성이며 무아며 적멸인지라 논할 것이 있겠는가. 성품이 성품 아닌 줄을 모두 다 알면 세간에 머물지도 않고 세간을 벗어나지도 않게 되어 툭 터진 해탈감을 누리리라.
6) 중생의 상을 떠남
一切所行衆善業을 悉以廻向諸群生호대
莫不了達其眞性하야 所有分別皆除遣이로다
갖가지 닦아 행한 여러 선(善)한 업을
모두 다 중생에게 회향하여서
참 성품을 통달하지 못함이 없고
여러 가지 분별도 없애버리도다.
▶강설 ; 보살의 삶이란 무엇을 하든 선한 업을 짓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선한 업을 모두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는 일이다. 그런데 선한 업이나 중생까지도 참 성품은 텅 비어 공하다는 것을 통달하여 안다. 그래서 아무런 분별이 없다. 이것이 중생의 상을 떠난 회향이다.
所有一切虛妄見을 悉皆棄捨無有餘하며
離諸熱惱恒淸凉하야 住於解脫無碍地로다
갖고 있던 일체의 허망한 소견을
모두 다 내버리어 남김이 없고
번뇌의 열기를 다 떠나니 항상 청량하여
해탈의 걸림이 없는 곳에 머물게 되도다.
▶강설 ; 일체 허망한 소견이란 주관도 객관도, 너도 나도, 마음도 물질도 모두가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견을 남김없이 다 버리면 일체 번뇌의 열기도 다 식어버린다. 실체가 존재한다는 소견만 없으면 번뇌의 열기도 없을 것이며 항상 청량하기 이를 데 없으리라. 그것이 곧 해탈이며 걸림 없는 자유로운 삶이다.
7) 덕을 이룸이 상을 떠남
菩薩不壞一切法하며 亦不滅壞諸法性하고
解了諸法猶如𧬰하야 悉於一切無所着이로다
보살은 일체법을 파괴하지 않으며
또한 모든 법의 성품을 괴멸하지도 아니하고
모든 법이 마치 메아리와 같은 줄 알아
일체 법에 모두 다 집착함이 없도다.
▶강설 ; 일체법은 현상이고 모든 법의 성품은 현상의 텅 빈 본질이다. 견해가 중도적 관점에 바로 선 보살은 이 두 면을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일체법이라는 모든 드러난 형상을 부정하지도 아니하며, 또한 현상들의 본성인 텅 빈 공성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현상이나 본질이나 모두를 메아리와 같은 줄 알아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了知三世諸衆生이 悉從因緣和合起하며
亦知心樂及習氣하야 未曾滅壞一切法이로다
삼세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들
모두 다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긴 줄 알고
마음에 좋아함과 습기(習氣)도 알아
일체법을 일찍이 소멸하지 않도다.
▶강설 ; 앞에서 일체법과 일체법의 본성을 부정하지 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과거·현재·미래의 일체중생들은 모두가 인(因)과 연(緣)과 과(果)와 보(報), 즉 인연과보로 화합하여 생긴 것이라서 실체가 없음을 안다. 따라서 중생들이 좋아하고 익힌 습기들도 또한 실체가 없음을 안다. 이와 같이 알면 일체법을 파괴하여 소멸할 까닭이 없다.
了達業性非是業호대 而亦不違諸法相하며
又亦不壞業果報하야 說諸法性從緣起로다
업의 성품은 업이 아닌 줄 분명히 알되
또한 모든 법의 모양도 어기지 않으며
또한 업과 과보를 깨뜨리지 아니하여
모든 법의 성품이 인연으로 생긴 것을 설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