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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9:24-43) 마음의 방수 옷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마음의 방수 옷>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의 방수 옷'
마음에도 방수 옷을 입힐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방수 옷이 무슨 말인가 함께 생각하며 오늘 아침에 다시 한 번 신앙을 점검해 보고 하나님과 만나실 수 있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밴쿠버에서 아주 나와서 사역을 하게 된 것이 거의 이제 2년 정도 돼 갑니다. 2년이 채 안 됐습니다마는 선교회를 시작한 것은 1년 반쯤 돼 가나요. 제가 9월에 나왔으니 아직 2년이 되려면 3-4개월 더 있어야 합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서 밴쿠버를 생각할 때마다 제일 아쉬운 것이 하나 있는데 차타고 15분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는 산 속에 인공으로 만든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번전레이크'라는 그 호수가 제일 아쉬워요.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줄기 너머에 코키트람산이 또 있어요.
그 산에서부터 터널을 뚫어서 물을 끌어들여서 만든 아주 아름다운 인공호수가 산 속에 있습니다. 그 호수 주변을 따라서 오르고 내리는데 꽤 가파르기도 하고 거칠기도한데 한 2시간 정도면 산행을 할 수 있는 길이 나 있습니다. 저는 그 길을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개인적으로 또 평생 중학생 때부터 앓고 있었던, 무거운 디스크는 아니었지만 늘 통증을 안고 있었는데 산책을 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깨끗이 사라져버렸는지 몰라요. 문제는 밴쿠버가 비가 많이 옵니다. 여름을 제외하면 봄, 가을, 겨울에 비가 많이 옵니다. 겨울도 우리처럼 춥지 않기 때문에 산책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준비한 게 방수 옷이었어요. 방수 점퍼를 걸치고 앞 챙이 길게 나와 있는 베이스볼 캡을 쓰고 왜냐하면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비에 맞으면 아주 불편하게 됩니다. 방수 점퍼를 입고 그리고 등산화도 방수 등산화를 딱 신고 두 시간 걸으면, 비가 오지 않을 때보다 더 쾌감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비가 그렇게 오는데도 젖지 않아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혼자 걸으면서 호수를 끼고 도는데, 호수 쪽에서는 이렇게 물안개가 올라오고 참 절경 속에 비를 맞지 않으면서 안경에도 비가 한 방울도 튀지 않고, 속에는 아주 쾌적한 느낌을 느껴가면서 그 번전레이크를 돌 때 그 쾌감은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하여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그래요.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 마음이 방수처리가 될 수 있다면 어차피 만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비가와요. 비가 와서 내 몸에도 비가 때려요. 그러나 내 옷이 그 빗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때 너무너무 쾌적한 느낌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돈을 벌며 삽니다. 그러나 내 마음 안으로 돈이 스며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자식을 기르고 가족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도 그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마는, 그러한 가족들이 내 마음 안으로 스며들어오지 않고 방수처리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물건, 모든 물질,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얼마나 이 세상 걸어가는 게 너무 경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상태가 어떤 상태냐? 추워요. 사랑받고 싶어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도 있지만 추워요. 그래서 코트를 입었어요. 비가 와요. 코트가 다 젖고 속에 입은 옷까지 다 젖었어요. 이제 빗물이 살에까지 닿아서 춥습니다. 그렇게 무겁게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빨아들여서, 자식 하나 기르면 그 자식이 스며들어서 내 마음에 코트를 입고 있는데, 그것이 물에 완전히 젖은 것과 같은 그런 상태가 돼서 질척질척 무겁기 그지없습니다. 좀 뽀송뽀송한 상태로 퐁퐁 뛰며 가볍게 살지 못하고. 돈을 벌면 돈이 스며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어쩌다 돈을 좀 주시면 그게 내 마음에 스며들어 와서 너무너무 무겁게 걸치고 다니는 것이에요.
오늘 참,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음을 방수처리해서 너무너무 가벼운 마음상태로 멋지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먼저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의 아들이었어요. 다리를 절고 있는 장애인이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해서 사울집안의 남은 사람 므비보셋을 찾고 왕의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 허락을 하며, 또 사울 왕에게 있었던 토지를 다 찾아서 므비보셋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가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므비보셋의 종이었던 시바가 피난가는 다윗 왕을 쫓아옵니다.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와서 다윗을 공궤를 합니다. 그때 다윗이 '네 주인 므비보셋은 어디 있느냐? 내가 그렇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왜 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시바가 ‘왕을 배반했다. 사울 집안의 왕권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반역하게 했다. 쌤통이다.’라고 하고는 따라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다윗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네가 다 가져라.’라고 왕이 윤허를 내립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므비보셋이 다리가 불구니까 시바에게 왕을 쫓아가기 위해서 말이 필요해서 말 위에 안장을 얹으라고 했는데, 장애가 있으니 혼자 할 수 없어서, 시바가 주인 므비보셋을 따돌리고 다윗에게 가서 거짓말을 하고 모함을 한 것입니다. 실상 므비보셋은 피난가지 못하고 남아 있으면서, 발도 씻지 않고 옷매무새도 치장을 하지 않고 왕의 피난 가 있었던 그 고난을 함께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시바가 거짓말을 했다는 그 실상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시바가 거짓말을 했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다 줘버렸는데. 이것도 좀 이상해요. 그랬으면 다 무효화 시키면 되잖아요. 시바에게 재산을 허락한 것을 다 무효화시키고 ‘너 이놈, 왜 너의 주인을 이렇게 모함했느냐?’라고 따지고 묻고 야단을 치면 되는데 그냥 재산을 반으로 나눠 갖게 합니다.
이것은 시므이의 비난이라든지 압살롬의 모반이라든지 모든 것들을 수동태로 받아들이던 다윗이 시바가 나타난 것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공궤를 받습니다. 공궤를 받는데 시바가 거짓말을 하지요. 그 거짓말 한 것에 대해서 다윗이 분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져 가고 있는데 시바가 나타난 것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종의 말만 듣고 행한 자기의 잘못을 시바가 나타나서 자기를 공궤한 것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면서도, 마치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면서 유다가 팔 것을 알면서도 옆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되, 자기가 그 거짓말에 속은 자기 잘못분에 대해서만, 절반에 대해서만 돌이키며 므비보셋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므비보셋의 말이 재미있어요. 참 감격스러워요. 므비보셋이 30절에 “진심으로 왕이시여! 내 재산을 다 시바에게로 돌리셔도 됩니다. 왕께서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이제는 됐습니다. 그에게 재산을 다 돌려주세요.”라고 하는데 이게 쉬운 말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방수처리 되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받은 은혜가 황송하다가도 1년 365일 왕의 밥상에서 밥을 먹고 재산을 누리다보면 그게 당연한 것인 줄로 알지 않겠습니까? 마음으로 스며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내 재산, 아니 거짓말로 모함한 종놈이 내 재산을 절반으로 떼어먹는데 아깝지 않을 사람이 없지요. 그러나 므비보셋이 그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내게 그토록 은혜를 베풀었던 왕이 무사히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면, 내 재산 아무것도 없어도 내 마음이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Nice Guy! 아닙니까? 진짜.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갖게 된 줄 아십니까? 28절에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이 그대로 신앙입니다. 다윗 왕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되면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마음이 자기에게 허락된 재산과 왕의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위치와 신분에 대해서 방수가 되고, 그것이 스며 들어와서 무겁게 질척거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사울 왕의 자손으로 마땅히 사울 왕이 원수로 취급했던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인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 사람이 그 죽음을 마음에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왕의 밥상에서 밥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신분, 왕의 밥상에서 먹고 있는 혜택, 그리고 왕이 허락한 재산들이 마음에 스며들어오지를 않고 방수처리가 되었던 것이지요. 죽음을 마음에 두면서 ‘나는 죽어 마땅했다. 왕의 원수의 자손이었으니 죽어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왕의 밥상에 앉혀 주셨으니’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에 스며들지가 않았던 것이에요. 므비보셋은 결코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사울 왕의 자손이 뭐예요? 다윗에게 원수였던 사울 왕, 하나님에게 원수였던 이 세상마귀, 이 세상을 지배해고 있는 마귀에게 우리가 복속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목이 끊어져 죽어야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면서 살려주신 것이에요. 그리고 자식으로 삼아주시고 왕의 밥상에 앉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죽음을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의 죽음이 곧 내 죽음임을 생각하는 마음마다 이 세상 모든 재산과 주어진 신분과 위치 주어진 사람 모든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방수처리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방수처리가 되지 않으니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지금 이 옷을 입고 나갔는데 막 소나기가 쏟아져 다 젖었어요. 거기에 쾌적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그렇게 젖어 들어가니 있을 수가 없지요. 이 세상에 젖어 들어가서는 쾌적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을 봅니다. 31절에 "바르실래"가 나옵니다. 80세가 된 거부입니다. 다윗이 피난 갈 때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와서 다윗을 돕습니다. 다시 다윗이 환궁을 하는데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을 건네주려고 합니다. 다윗이 너무 고마워서 ‘나와 함께 가자. 당신의 노후,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가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라고 다윗이 말합니다. 부모님을 봉양하듯이 그렇게 공궤할 테니 같이 가지고 하는데 안 갑니다. 여러분! 나는 그런 사람 굉장히 많이 보았어요. 돈이 많아졌습니다. 그 다음에 국회의원 생각합니다. 그게 가문의 명예라고. 지금 80세 된 바르실래가 왕이 공궤하겠다고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합니다. 왕과 악수만 해도 손을 씻지 않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도 대통령하고 악수하면 정말 이 손을 다시 볼 것 같아요. 사람은 다 그런 마음이 들지요. 마지막 인생의 황혼기에 정말 온 나라 안에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왔어요. 이게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야 80세가 다 되었으니 그런 욕심을 내겠느냐고 생각하는데, 사람이라는 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80이 아니라 90이 돼도 이런 기회가 있으면 있을수록 더 집착을 하는 게 사람입니다. 80된 할아버지가 예쁜 아가씨보면 마음이 동할까요? 동하지 않을까요? 에이, 무슨 주책없는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바르실래를 보면서도 배우는 겁니다. 왕이 마지막까지 다 공궤를 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굉장한 영광이지요. 그런데 거절합니다. 이 사람이 거절할 때 이 거절하는 내용이 결국 므비보셋과 똑같아요. 죽음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보세요. 34절에 “바르실래가 왕께 이르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라고 죽음을 봅니다. 그 다음에 35절에 “내 나이가 이제 80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오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한다'는 것은 '사리를 분별한다.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무슨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선악 판단이 죽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무용론을 펼칩니다. 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 용도가 없습니다.
이게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의식 아닙니까? 주께 누만 될 뿐입니다.
므비보셋이 '내가 무슨 공의가 남아 있어서, 공로와 의가 있어서 왕께 부르짖겠나이까?'라고 하는데 이 마음이 십자가에 달린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공로와 의가 있어서 아직도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라고 부르짖겠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누가 되면 될 뿐이지,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대느냐는 겁니다. 바르실래의 마음이 바로 왕께 누가 될 뿐이라고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죽음을 아는 겁니다. 내 죽음을 기억하는 겁니다. 내 죽음을 기억하면 청와대에서 와서 뭘 하라고 해도 웬만하면 가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복잡하고 청와대 들어가면 사람들의 사리판단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정치를 잘 모릅니다마는 지금 대통령만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다 그렇고 또 지금 대통령은 더군다나 그저 강남에 있는 아주 훌륭한 교회의 장로님이라고 하시니 아무래도 기대감도 더 있지요. 기대감도 더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정치를 잘 하실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마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오늘 묵상을 잘 해보세요. 무슨 공의가 있어 내가 왕께 부르짖을 수 있나이까? 왕이 돌아오셨으니 내 재산이 다 없어져도 됩니다. 이게 '하나님만 계시면 내가 무엇이 부족하겠나이까?' 하는 말과 또 '내 나이가 80세라 좋고 흉한 것을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사오며 왕께 오직 누를 끼칠 뿐입니다.'라는 말이 십자가에 달린 우리의 마음상태입니다. 이런 마음이 될 때에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물이 스펀지로 들어오듯이, 물이 내 옷으로 스며 들어와서 속옷까지 적셔서 피부에 까지 와 닿듯이, 그렇게 젖어 들어오지 않고 스며들어오지 않도록 방수처리를 해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오직 세상에 대해서 방수처리 된 마음, 주님의 보혈을 발라야 방수가 되지요. 방수처리 된 마음 안으로만 하나님은 들어오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괄호로 묶여서 살아가는 임마누엘의 삶이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 나의 죽음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한시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 방수가 될 것이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내 마음으로 스며들어오지 않게 될 것이고, 그때 내 마음은 자유함을 얻고 가벼워지고 베드로가 말한 유쾌함이 유지되며, 그 유쾌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당신의 뜻을 세상에서 펼쳐 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시면서 내 마음이 온전한 방수처리가 되실 수 있는 아침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죽음을 삼키고 주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할 때에 내 마음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 모든 사건에 대해 방수처리가 될 수 있어서 하늘의 유쾌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하셨사오니 이 말씀이 나의 현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방수처리 됨으로 오직 하나님만 교제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므비보셋과 바르실래와 같은 낮아지고 죽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미 죽었거니와 이제 덤으로 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영광을!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BUNZEN LAKE 근처 PORT MOODY에서 20년째 살고 있지만 그곳이 인공호수였는지 오늘 알았네요. ^^
태목사님 언제 밴쿠버 들리실 일 있으시면 번젠레이크 제가 모시고 갈께요.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