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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kbi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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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kbi-미술이야기 스크랩 인상주의의 탄생: 모네의 <인상, 일출>
녹비 추천 0 조회 93 11.02.22 09: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상주의의 탄생: 모네의 <인상, 일출>

 

 

 

 

 

 

모네의 <인상, 일출>, 1872, 유화, 48-63cm.

분명하지 않은 빛의 효과를 포착하려는 모네의 노력이 짧은 붓질로 나타난 이 작품이 1874년 제1회 인상주의전을 통해 소개된 후 인상주의의 전형적인 화풍으로 알려졌습니다. 모두 165점이 소개되었고, 모네가 출품한 유화는 다섯 점에 불과해 이것이 걸출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르아브르 집 창에서 바라본 풍경을 그린 이 그림에 대해 모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탈로그에 실릴 제목을 물어왔다. 이 그림을 르아브르의 풍경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인상이라고 했다.” <인상, 일출>은 이렇게 생겨난 제목입니다. 시각적 인상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인 묘사방법을 버린 건 그 시대에 혁명적인 화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른 아침 안개 속에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은 모네의 눈에 매우 강렬하고 환상적이었을 겁니다. 이른 아침이지만, 노를 저어 물결을 출렁이며 배가 지나갑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에서 ?에 대한 효과를 더욱 익힌 모네는 이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빛의 운동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네의 <일출, 바다풍경 Soleil Levant, Marine>, 1873, 유화, 49-60cm.

 

 

 

아르장퇴유에서 보낸 3년은 모네가 경제적·미학적으로 성공한 즐거운 시기였습니다. 1873년에는 자신이 즐겨 찾는 노르망디로 가서 에트레타, 생타드레스, 르아브르 등지의 풍경들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인상, 일출>은 제작연도가 1872년으로 적혀 있지만, 이 시기에 그린 것입니다. 그는 1869년과 1870년의 살롱에 낙선한 후로는 더 이상 출품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피사로와 시슬레도 마찬가지로 살롱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르누아르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지만, 성과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1867년에 모네와 바지유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이 그룹전을 구상했다가 경제적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이제 그 안이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는 화가들은 그룹전에 찬성했지만 살롱을 고집하는 마네가 반대했다고 합니다. 피사로, 드가, 르누아르가 그룹전에 큰 관심을 나타냈으며, 이들 모임에서 모네가 리더 역할을 한 것 같았습니다. 모임에는 카이유보트, 부댕, 세잔도 있었습니다. 모네를 중심으로 모인 모임의 회원은 서른 명이었습니다. 더러 예술가들 중에는 그룹전이 또 다른 형태의 낙선전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 사람도 있었지만, 파리의 미술시장에 작품을 좀 더 팔아보려는 속셈에서 동의했습니다.

 

1873년 살롱이 열린 후 5월 어느 날 모네는 화가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임을 언론에 공언했습니다. 모네가 중재자가 되어 협회 설립정관을 몇 차례에 걸쳐 뜯어고친 후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회가 탄생했습니다. 이들은 ‘무명협동협회 Societe Anonyme Cooperative’라고 명칭을 정하고 그룹전을 열기로 했습니다. 제1회 인상주의전으로 미술사에 남게 된 이 전시는 1874년 카퓌신 불바드 35번지, 사진작가 펠렉스 루트나숑 나다르Felix Tournachon Nadar(1820-1910)의 2층 화실에서 개최했습니다. 오직 살롱을 통해서만 발표하기를 원한 마네는 베르테에게도 그룹전에 참여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드가의 권유를 받아들여 협회에 가입했습니다.

 

모네가 “온정이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펠렉스 루트나숑 나다르는 기자, 소설가, 만화를 주로 그린 화가로, 또 기구 조종사와 사진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인쇄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나다르는 1858년에 기구를 타고 프티-비세트르 상공을 비행하며 최초의 공중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습니다. 3년 후에는 파리의 지하묘지에 들어가 전기를 사용한 최초의 지하촬영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인상사진을 잘 찍기로 소문났으며, 그가 찍은 인상사진들 가운데 샤를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클레망소, 쥘 베른느 등의 사진이 있습니다. 나다르는 여가가 생기면 그림을 그렸고, 화랑과 뮤지엄에 출품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배척당했습니다. 작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한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무명협동협회 전시장으로 기꺼이 제공했습니다. 그가 자신도 화가라고 주장하자 에드가 드가는 “웃기지 마세요. 가짜 예술가, 가짜 화가, 가짜 사진작가님!” 하며 놀렸습니다.

 

 

 

 

베르테 모리소의 <로리엥의 항구 The Harbour at Lorient>, 1869, 유화, 44-73cm.

 

 

 

카탈로그에는 65점의 작품이 실렸으며 출품 작가는 부댕, 펠렉스 브라크몽, 세잔,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이유보트 등이었습니다. 모네는 유화 5점과 파스텔 7점을 출품했는데, 파스텔을 7점이나 전시한 건 유화에 비해 가격이 싸서 팔기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1868년에 그린 <오찬>과 <인상, 일출>, <카퓌신 불바드>, 카미유와 장을 그린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도 이때 소개되었습니다.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 Poppy Field at Argenteuil>, 1873, 유화

 

 

 

 

모네의 <카퓌신 불바드 Boulevard des Capucines>, 1873, 유화

 

 

 

<카퓌신 불바드>는 모네가 1873년 나다르의 2층 화실에서 창을 통해 내려다본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당시 파리는 현대화가 가속화되고 있었고, 거리에는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카퓌신 불바드도 막 포장을 마쳤고, 사람들이 새로 포장한 도로에 나와 자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모네는 빛에 의해 가물거리는 대기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찍은 사진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굵은 점으로 나타났습니다. 색을 영상 자체처럼 빛에 의해 반사되고, 부서지며, 굴절되는 것으로 사용했으며, 공간색을 희석시키지 않고 형태와 공간을 환기시키는 다양한 색질을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결과 색들은 고도한 광선의 투사각처럼 나타났습니다. 그림은 부분적으로 추상의 이미지를 나타냈으며, 이러한 화법은 말년에 그릴 수련을 통해 거의 완전추상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추상이란 사물을 덜 묘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사물에 대한 불분명한 모네의 묘사는 논리적으로 추상으로 향하는 걸 의미했습니다.

 

전시는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인데,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연장하기도 했습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으며, 카탈로그는 50센티메에 팔았습니다. 첫날부터 비교적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는데 그들은 그림 앞에 서서 킬킬거리며 웃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시장을 둘러 본 후 화가들이 권총에 물감 튜브를 장전해 캔버스를 향해 발포한 후 뻔뻔스럽게도 서명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모네가 “새로운 회화”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으므로 평론가들이 이 전시회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반항적인 전시회를 즉각적이고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협회의 리더 모네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았습니다. 4월 25일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 The Exhibbtion of the Impressionists’였습니다.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인상주의라는 말이 그들의 전람회를 통해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르루아에 의해서 인상주의라는 말은 곧 영국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을 두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경멸조로 적었습니다.

 

르루아는 전시회 첫날 요셉 뱅상과 함께 전시장에 왔는데 뱅상은 98번이 붙은 그림 앞에 서서는 “그가 여기 있었군! 여기에!”라고 소리쳤는데, 모네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는 평소 모네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카탈로그에는 <인상, 일출>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모네가 르아브르에서 안개로 흐려진 대기를 뚫고 떠오르는 태양, 어둠 속의 강에 비친 햇빛과 물의 운동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르누아르의 <댄서 Dancer>, 1874, 유화ㅑ, 142.5-94.5cm.

 

 

 

뱅상은 르누아르의 <댄서>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이 화가는 색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더욱 낫게 그리지 못하다니! 댄서의 다리는 솜처럼 생겼다.

르루아의 경멸조의 사설 외에도 에밀 카르동도 『라 프레스』(1874. 4. 29)에 비판의 글을 실었습니다. 『오피니옹 나쇼날』(1874. 4. 22)에 논평을 게재한 아르망 셀베스트르는 다소 관대한 태도를 취하면서 모네와 피사로, 시슬레가 보여준 “대상을 보는 시선”에 관심을 나타냈지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시선이 모색하고자 하는 점은 단지 인상의 효과뿐이다. 결국 제대로 된 표현은 선 묘사에 숙련된 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에드가 드가는 열 점을 출품했습니다. 폴 망츠는 이를 의아해하며, “우리는 드가 선생이 왜 스스로를 인상주의 화가들 속에 포함시키려고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분은 뚜렷한 개성을 가진 분이며 자칭 혁신주의자라고 부르는 그룹에서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라고 했습니다. 드가가 전시회에 참여한 이유는 단 하나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명협동협회 사람들은 어떤 이념을 함께 신봉한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가 개성이 있는 회화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통목적은 파리화단에 이름을 알리고 작품을 팔아서 돈을 벌려는 것이었습니다.

 

화가들은 그림 값을 비교적 낮게 책정했지만, 언론의 경멸과 비난으로 경제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인상, 일출>은 훗날 파리의 마르모탕 뮤지엄에 소장되었는데, 전문도둑이 침입하여 훔쳐갔습니다. 언론은 도둑이 일본인에게 수백만 달러를 받고 그 그림을 팔았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모네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무명협동협회는 12월에 해산되었다가 2년 뒤 1876년에 다시 부활되어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1886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개최했습니다. 여덟 차례의 전시회에 모두 참여한 건 카미유 피사로 한 사람뿐입니다. 전시회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드가가 주최한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조르주 쇠라의 점묘주의 그림이 각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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