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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夏文化의 中心地, 東西二京을 가다(13) - 西安
□ 제5일(10/26 월)
09:30 호텔 출발 -(1시간)- 華淸宮 = 진시황 지하궁전 모형 - 13:30 점심 - 병마용 - 진시황릉 - (저녁, 삼겹살) - 唐쇼, 13왕조 |
다섯째 날 ① 華淸宮
<사진 : 화청궁 입구, 왼쪽 뒤편의 산이 驪山이고, 저 산 너머에 진시황릉이 있다. >
어젯밤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호텔에 도착한 탓에 오늘 아침 출발은 다소 늦춰졌다.
일정은 단출하나 무거운 역사의 나들이가 되는 날이다.
여전히 추적거리는 빗속을 대략 1시간가량 달려 臨潼區(임동구)에 있는 당나라 때의 離宮인 華淸宮에 도착했다. 華淸宮은 오늘날 주로 ‘華淸池’로 부르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溫泉 지역으로 驪山(여산)에서 발원된 온천수가 이곳 연못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이 군주의 온천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3천여 년 전인 周나라 幽王때부터라고 한다. 천자가 가끔 행차하여 이곳에서 온천욕을 하면서 그 이름을 ‘星辰湯(성진탕)’이라 했고, 秦始皇 때에는 ‘驪山湯’이라 했다.
隋文帝 때는 이곳에 松柏 1千 그루를 심었고, 唐太宗에 이르러서는 이곳을 별궁으로 조성하면서 대대적으로 殿閣을 세우고 ‘湯泉宮’이라고 했다가, 高宗 때 ‘溫泉宮’으로 개명했고, 玄宗 때(天寶6년, 747년) 華淸宮이 되었다.
화청궁은 驪山 자락에 있기에 驪山宮 혹은 驪宮이라고도 하고, 여산 아래 화려한 전각들이 마치 비단으로 수놓은 것과 같다 하여 繡岭宮(수령궁)이라고도 한다.
(좌측 사진) 당현종 당시의 화청궁 모형도. 산을 둘러싼 화려한 전각들로 인해 繡岭宮이라고도 했다. (우측사진) 芙蓉園과 長生殿
<옆 사진은 당현종의 초상>
그러니까 華淸宮은 唐玄宗이 第14王子 壽王의 妃인 楊玉環을 자신의 후궁으로 삼으면서 그녀를 위한 궁궐로 개축한 셈이다.
楊玉環은 당현종보다 35살이나 어린 며느리인데, 당현종은 그가 총애하던 武惠妃가 죽고(737년)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이 며느리를 보고 첫눈에 반해 빼앗아 바로 후궁으로 삼기가 민망했던지 처음에는 太眞이란 이름의 女道士로 삼고 가까이에 두었다가 6년만인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로 책봉하여 후궁으로 삼은 것이다.
<옆 사진은 온천욕을 하고 나오는 양귀비 조각상>
資質豐艶(자질풍염)에 맞춰 세운 상이기는 하지만 르네상스 양식을 본떠 만든 조각상이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傾國之色이라하더라도 명색이 일국의 貴妃를 이렇게 벗겨놓고 만인의 구경거리를 만들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든다.
뒤의 건물에는 황제와 태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온천탕과 발원지가 있고, 조각상의 오른쪽 앞으로는 양귀비의 전용목욕탕인 海棠湯(해당탕) 이 있으며, 조각상 뒤에 인파가 몰린 곳은 온천물이 솟아나 손을 씻게 만든 곳이다.
하얀 김이 올라오면서 쌀쌀한 날에 관광객들의 손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화청궁을 唐玄宗과 楊貴妃의 사랑이 담긴 곳이라고 흔히 소개된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權力의 傲慢과 倦怠가 빚어낸 추악한 愛情行脚에 불과하다. 당현종의 재위기간은 712년에서 756년까지 45년간인데 양옥환을 貴妃로 책봉한 때는 권력의 후반기인 745년이다.
당현종은 등극 초기에 어지러운 정세를 안정시키고 안정적인 통치를 이룩했으나 오랜 통치에 염증을 느꼈던지 도교에 빠지고 양귀비를 만나면서 정치를 등한히 했다.
이로 인해 양귀비 친인척의 권력개입과 부정부패는 당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마침내 安祿山의 난(755년)을 일으키게 했다. 이 와중에 38살의 양귀비는 목매 죽어야 했고 현종은 다음해 아들인 肅宗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6년 후에 죽게 된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애정놀음은 10년이다. 이들의 애정놀음이 대단한 사랑인 듯 회자되는 까닭은 白居易가 쓴 ‘長恨歌’의 天上再會의 애매모호한 내용 때문인 듯하다. 백거이가 ‘장한가’를 쓴 때는 年富力强한 34살로, 지금의 섬서성 周至 지역의 縣尉 벼슬을 할 때이니, ‘장한가’의 꿈길 같은 사랑 묘사를 그다지 나무랄 일은 아닐 듯하다.
훗날 ‘장한가’를 분류하기를 感傷詩라고 하지 않았던가. 권력을 가진 남성들치고 그런 夢想을 한번쯤 가져보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는가! 毛澤東 또한 무슨 생각을 하며 썼는지는 몰라도 그가 직접 손으로 베껴 쓴 ‘長恨歌’가 화청궁의 벽에 걸려 전시되고 있다.
중국의 4대 미녀중의 하나로 꼽히는 양귀비의 여러 모습. 세간에서는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 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는데,
양귀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정평이다.
李白이 양귀비를 모란으로 비유해 모든 그림마다 큰 모란을 머리장식으로 달고 있는데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모란을 꼽지는 않는다.
붉고 풍성한 꽃모습이 부귀영화를 상징할 뿐이다.
여러 문헌에 묘사된 양귀비의 모습을 키와 몸무게로 환산한 결과, 키 164㎝-몸무게 82.8㎏, 혹은 155㎝-72㎏의 설이 있다.
위의 네 그림 가운데 어느 것이 당시 양귀비의 모습에 가장 가까울지…아니면 아래 도자기상이 가까울지…
상상은 자유다.
진시황릉 박물관내의 기념품 가게에 전시된 양귀비 도자기상
화청궁 앞 광장에 세워진 靑銅像. :
중국정부가 아마도 당현종이 지은 霓裳羽衣舞(예상우의무)를 상상하여 세워둔 듯하다 .
왼쪽은 당현종, 가운데는 양귀비가 춤추는 모습이다.
양귀비의 姿質豐艷과는 맞지 않는 현대무희의 날씬한 몸매이다.
『舊唐書』를 읽어보면, 양옥환을 처음 궁으로 들여 도사로 삼았을 때 “太眞의 姿質은 豐艷(풍염, 살지고 아름다움)했고, 歌舞를 잘했으며, 音律에 통했고, 지략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고, 매번 아름다운 얼굴로 임금을 받들어 맞이했다.”고 했으니, 누가 이런 여인을 싫어하겠는가?
일반 백성들도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고 했는데, 大唐帝國의 皇帝가 되어서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楊太眞의 세 자매들은 모두 奉國夫人이 되고, 6촌 오빠는 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고 乘勝長驅를 한다.
그랬기에 궁안 사람들은 현종이 그녀를 매우 총애하는 줄 알고 ‘道士’가 아닌 ‘娘子’라고 부르며 禮를 皇后와 동일하게 했다니, 귀비가 된 뒤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權不十年’이요 ‘花無十日紅’이라고, 安祿山의 난은 필연적 결과이다.
그래서일까? 唐玄宗의 玄孫인 李約(?~806년)이 어느 날 ‘화청궁을 지나면서(過華清宮)’라는 제하로 이런 시를 읊었다.
君王游樂萬機輕 군왕의 유락에 천하의 정무가 가벼워지고
一曲霓裳四海兵 예상곡 하나에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었구나.
玉輦升天人已盡 옥련은 하늘로 올랐고 사람은 이미 없어졌건만
故宮猶有樹長生 고궁엔 오히려 나무들만 오래도록 사는구나.
당 현종은 시와 음악과 글씨를 잘 썼다. 그래서 양귀비를 위해 ‘霓裳羽衣(예상우의)’라는 곡을 만들었고, 무희들에게 춤을 추게 하면서 즐거워했지만 현손은 할아버지의 재주가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데 쓰인 것을 탄식했다. 李約보다 좀 늦은 시기의 杜牧이란 시인도 ‘過華清宮’이란 제하로 이렇게 읊고 있다.
長安回望繡成堆 장안을 돌아 바라보니 수놓은 듯한 언덕에
山頂千門次第開 산정의 많은 문이 차례대로 열리며
一騎紅塵妃子笑 말 한 필이 붉은 먼지 일으키며 들어오니 귀비가 웃는데
無人知是荔枝來 사람들은 이것이 여지를 가져오는 것인 줄 알지 못하네.
<왼쪽 사진이 荔枝(여지)이다, 학명은 Litchi Chinensis Sonn으로 흔히 ‘리치’라고 부르는 과일이다.
당현종은 양귀비에게 저 싱싱한 과일을 먹게 하기 위해 急馬를 띄웠다.
우리는 냉동으로 수입해 뷔페식당 등에서 가끔 먹을 수 있는데 굵은 밤 크기에 밤색껍질의 과일이다.>
여산 아래 화청궁의 사치스런 모습을 표현하면서 양귀비가 四川과 廣東 지역에서 나는 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당현종은 막 딴 과일의 싱싱함을 맛보게 하기 위해 역마를 보내 최대한 빨리 가져오도록 명했다.
파발은 나라의 급한 용무를 위해 쓰이는 것인데 한 여인을 위해 ‘신선과일배달용’으로 쓰이고 있음을 시인은 풍자한 것이다.
歐陽脩는 『新唐書』에서 당나라가 則天武后와 韋皇后와 安樂公主 등 여자들의 정치개입으로 정치가 불안정해졌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贊하였다.
“오호라, 여자들이 사람들에게 미친 화의 심함이여! 고조로부터 중종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거듭 여자들의 화에 걸려 唐의 천자의 자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으니 중종은 그 몸을 면치 못했고, 위씨는 끝내 이씨 집안을 멸하였도다.
현종이 친히 그 난을 평정하여 가히 귀감이 되었으나 또 여자 때문에 무너졌도다. 두루 그 정사에 힘쓰고 정성스럽게 하여 개원(唐玄宗의 두 번째 연호, 713년 ~ 741년)의 즈음에는 태평을 이뤘으니 얼마나 그 성대했던가!
그런데 사치한 마음이 한번 움직임에 천하의 욕심을 다하고도 그 즐거움을 부족하게 여기고 그 심히 사랑하는 바에 빠져서 그 경계해야 할 바를 잊고, 몸을 숨기고 나라를 잃는데 이르러서도 뉘우치지 않았도다
(嗚呼라 女子之禍于人者甚矣로다 自高祖至于中宗히 數十年間再罹女禍하여 唐祚旣絶而復屬하니 中宗不免其身하고 韋氏遂以滅族이로다 玄宗親平其亂하여 可以鑑矣로대 而又敗以女子로다 方其勵精政事하여 開元之際에 几致太平하니 何其盛也아 及侈心一動에 窮天下之欲不足爲其樂하고 而溺其所甚愛하여 忘其所可戒하고 至于竄身失國而不悔로다).”
<사진 왼쪽 위는 玄宗의 전용탕인 蓮花湯.
아래는 唐太宗 李世民이 썼다는 星辰湯.
오른쪽 위는 궁녀들이 쓰던 尙食湯으로 아래 부분의 홈은 발꿈치와 발가락을 문질러 씻는 용도라고 한다,
아래는 1호 出水口의 주변 모습.
지금 탕의 모습은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실제는 옥돌로 꾸며지고 주변에 휘장이 둘러진 휴식공간과 함께 궁녀들이 시중들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면 그 화려함이 어떨지 짐작된다.>
이어서 구양수는 말하기를 “그 처음과 끝의 다름을 살펴보건대 성품과 습관의 서로와의 거리의 멂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가히 삼가지 않으랴! 가히 삼가지 않으랴!(考其始終之異컨대 其性習之相遠也至于如此하니 可不愼哉아 可不愼哉아)”고 하면서 공자가 말씀하신 “性相近也 習相遠也”를 인용해 결론지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은 서로 비슷한데,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 서로와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자세를 가르치는 유학은 끊임없이 戒愼恐懼하여 否塞(비색)한 세상에 빠지지 않도록 강조한다. 잘못을 여자의 문제로 둘러대는 것은 곧 남성지도자의 잘못을 흐릿하게 하는 변론에 불과할 뿐이다.
<사진 왼쪽 위는 양귀비의 전용 온천탕인 海棠湯. 해당화 문양으로 욕조 모양이 되어있다. 왼쪽 아래는 양귀비가 목욕하고 난 뒤에 머리를 말렸다는 정자. 오른쪽 위는 온천의 원류인 2호 出水口, 아래는 1호 出水口. 온천의 수온은 43℃.>
<五間廳 앞에서>
청조 말기에 건립된 온천탕의 부대시설이다.
서안사변 즈음에 장개석은 향산사의 별장과 이곳을 왕복하면서 모택동의 공산당 세력에 대한 토벌을 진두지휘한 곳이다.
다섯 칸 집으로, 집무실과 손님 접견실과 비서실, 회의실 등을 갖추고 있다.
<중국 공산당정부가 간체자를 공식통용문자로 쓰기 시작하면서 표지석등도 모두 간체자로 바꾸고 있다.
왼쪽은 2006년 2월에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2014년 9월에 찍은사진이다.>
우리는 당현종과 양귀비를 생각하며 화청궁 내의 온천을 둘러보고, 서안사변과 관련된 五間廳으로 갔다. 이곳 또한 양귀비를 위한 온천탕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五間廳은 현재의 중국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인 만큼 서안사변과 관련된 설명 자료가 오간청으로 가는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앞서 향산사의 별장에서는 소개했지만 장개석은 1936년 생일잔치를 목적으로 10월 말에 향산사의 별장에 오는 것처럼 꾸몄으나 실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모택동의 홍군을 토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한층 노골화하면서 홍군은 물론 장개석에게 비판적인 동북군과 서북군 모두는 항일투쟁을 먼저 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攘外必先安內(양외필선안내, 밖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안을 안정시켜야 한다)’만을 고집했다.
동북군 총사령관 張學良이 哭諫까지 했으나 장개석은 오히려 나무랐다. 그러자 서북군 총사령관 楊虎城(華山의 楊公塔을 세운 인물)은 兵諫을 제의한다. 곧 장개석에게 먼저 항일투쟁을 하자고 무력으로 압박하기로 하고, 양호성은 장개석의 주변 세력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장학량은 臨潼의 화청궁에 머물고 있는 장개석을 체포하기로 했다.
12월 12일 새벽에 五間廳으로 동북군이 들이닥치자 장개석은 자다 말고 도망쳤으나 결국 뒷산인 驪山에서 사로잡혔고, 12월 17일 周恩來를 대표로 하는 협상단이 장개석과 만나 항일투쟁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제2차 國共合作이 이뤄졌고 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리고 장개석은 장학량의 호위 아래 남경으로 갔으나 장학량을 체포해 지휘권을 박탈하고 감금했으며, 2차 대전 후 국민당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옮겨 1990년까지 계속 가택연금을 하다가 생일인 6월 1일에야 풀어줬다. 그후 3년 뒤에 장학량은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01년에 노환으로 죽었다.
양호성은 장개석 체포와 관련해 군을 떠났다가 1937년 7월에 蘆溝橋사건을 발단으로 중일전쟁이 터지자 항일전에 참여하려고 귀국했으나 장개석에게 붙잡혀 감금생활을 하다가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 9월에 重慶에서 살해당했다.
오간청을 둘러보고 나오다 보니 돈 내고 발을 담글 수 있는 족욕탕이 야외카페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으나 시간이 촉박한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 밤에 이곳에서 ‘장한가쇼’를 관람하기로 했으나 날씨 관계로 취소되었다. >
조금 더 걸어 나오니 게시판에 화청궁을 찾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과 여러 나라 지도자들의 방문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그중 김일성 사진이 눈에 띄었다.
밤에 이곳 화청지에서 여산을 배경으로 한 ‘장한가쇼’가 예정되었으나 비 때문에 공연여부가 불투명하단다. 오후부터 날이 갠다고 했으나 결국에는 취소하는 걸로 결론이 났고, 대신 극장에서 ‘唐쇼 13왕조’ 공연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