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흙으로 빚은 8000여 점 병사들… 수염 모양까지 다르죠
입력 : 2022.01.05 03:30 조선일보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진시황릉 주변부 땅굴에서 흙으로 빚은 병사 8000여 점이 발견됐어요. 이곳을 병마용갱으로 불러요. /위키피디아
최근 중국에서 지질학 분야에 사용되는 우주방사선 탐지기를 이용해 진시황릉을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어요. 이 탐지기는 통과한 물질의 성질에 따라 입자 수가 달라지는 '뮤온(muon)' 특성을 이용해요. 뮤온은 내부가 텅 빈 공간을 통과할 때 그렇지 않은 곳에 비해 더 많은 입자가 검출되는데, 이런 원리로 무덤 안에 숨겨진 빈 공간을 찾아내겠다는 거예요.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진시황릉은 198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어요. 우연히 병마(兵馬)용갱(坑·구덩이)이 발견된 뒤로 많은 발굴 조사가 이뤄졌지만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의 주변부에 불과해요. 진시황릉은 212만㎡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거든요. 축구장 300개를 합친 규모죠. 황제가 묻혀 있다고 추정되는 봉분(封墳·둥글게 쌓은 무덤)은 아직 손을 대지 않고 있어요. 중국 정부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발굴하다가 문화재를 훼손할 수 있다면서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어요.
우물 파던 농부가 우연히 발견
1974년 극심한 가뭄이 중국을 휩쓸고 있던 시기 여산 기슭 서양촌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들은 땅굴 하나를 발견했어요. 이 땅굴에는 토용(土俑·무덤에 넣는 흙 인물상)들이 매장되어 있었죠. 처음에는 토용이 묻힌 땅굴, 즉 용갱이 어느 시대의 유적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해요.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나 떨어진 데다 진시황릉에 딸린 것이라고 보기엔 범위가 너무 넓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발굴이 이어지면서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는지 밝혀졌어요.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진 청동극(창)이 발견된 것입니다. 여불위는 진(秦)나라의 상인이자 정치가로 진시황의 후견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에요. 용갱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만들어진 진시황릉 능원(陵園)에 속해 있었던 거죠. 용갱에서 출토된 토용에는 병사와 말이 많았어요. 그래서 용갱은 '병마용갱'이라고 불리게 됐죠.
병마용갱은 20세기 고고학 사상 최대 규모 발굴 사업이었어요. 진시황릉 안팎에서 발굴된 부장(副葬)갱(무덤에 붙어 있는 구덩이)은 200여 개에 이르러요. 그중에서도 1·2·3호 갱은 특히 규모가 컸어요. 부장품(장사 지낼 때 시체와 함께 묻는 물건)도 많이 출토됐죠. 가장 남쪽에 있는 1호 갱은 동서로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동서와 남북 길이가 각각 230m와 62m였어요. 2호 갱은 1호 갱의 동북부에 있는데, 동서와 남북 가장 긴 길이가 각각 124m와 98m였죠. 3호 갱은 1호 갱의 북쪽, 2호 갱의 서쪽에 있었어요. 동서와 남북의 길이는 각각 18m와 21m로 규모는 조금 작았어요. 4000㎡ 규모의 4호 갱도 발견됐지만, 텅 비어 있었어요.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황제가 사망하며 중단됐을 것이라 추측돼요.
20세기 최대 규모 발굴 사업
그렇다면 용갱 안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발굴된 유물은 무사용 8000여 점, 나무 전차 100여 량, 흙으로 빚은 전투마 100여 필, 청동 병기와 거마기 9000여 점에 이르러요. 1호 갱에는 전차와 보병이 있었어요. 2호 갱에는 전차·기병·보병의 혼합 부대가 있었고, 3호 갱에는 지휘 부대가 있었습니다. 모두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전투 대형으로요. 이들은 모두 실물 크기로 만들어졌는데 높이가 180~190㎝라고 합니다. 진시황이 지휘하던 병사들을 한 사람씩 그대로 본떠 만든 것으로 추정돼요. 병종과 신분에 따라 갑옷의 형태가 다르고 허리띠·머리 모양·신발·끈·매듭 등도 모두 다르게 정교하게 조각됐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병마용은 모두 뚜렷한 개성을 가진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콧수염과 턱수염마저도 달랐죠.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랍니다. 병마용은 당시 전투에 사용되던 진짜 칼·창·석궁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금속들이 2000년간 원래 상태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해요. 특히 청동검은 출토 당시에도 전혀 녹슬지 않고, 표면이 거울과 같아 사람을 비출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해요. 청동검을 비롯한 청동 병기는 부식에 잘 견딜 수 있게 표면에 니켈과 크롬으로 합금 처리를 했대요. 이는 세계 최초 스테인리스 합금 기술이기도 하죠. 칼날은 얼마나 예리한지 종이 19장을 벨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해요.
이렇다 보니 사람들 관심은 진시황릉 중심부로 옮겨졌습니다. 진시황릉 봉분은 2층으로 만들어져 있었어요. 봉토 평면이 네모꼴로 돼 있고, 높이는 76m였어요. 밑바닥 부분은 동서의 길이가 345m, 남북의 길이가 350m로 그 둘레가 무려 1410m에 달하는 대규모 능이었죠. 그 주위에는 성벽이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었어요. 묘역 외성곽 길이만 12㎞에 달해 무덤이라기보다 하나의 지하 도시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어요.
기록처럼 수은 흐르는 바다 있을까?
진시황릉의 봉분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중 유명한 게 사마천의 '사기(史記)'예요. 그는 진시황릉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어요.
"사람들은 세 개의 샘을 파고 이것을 구리로 막아 현궁(玄宮·임금의 관을 묻는 부분)으로 삼았다. 현궁에는 침입자가 들어오면 화살이 발사되는 기계장치가 숨어 있었다. 양쯔강과 황허강을 모방한 수로뿐 아니라 큰 바다도 만들어졌고 그곳은 수은이 계속 순환하고 있다. 천장에는 별자리에 나오는 별들이, 바닥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엔 이 기록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 수은 측정 결과, 진시황릉 봉토 중심부 수은 함량 수치가 다른 지역보다 100배가량 높았어요. 주변부로 가면서는 농도가 약해졌죠. 결국 사마천의 기록이 사실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중국 고고학자들은 발굴에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턱대고 파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귀중한 역사 유산이 훼손될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무덤을 파지 않고도 여러 기술로 내부를 살펴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2000여 년 전 중국을 통일한 진 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진시황릉. 앞으로의 연구 성과가 더욱 기대됩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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