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부하실 총액은 285만원입니다만 그 중에서 암 수술 의료비의 95%는 의료보험공단에서 지급하니까 환자 본인은 78만원 내시면 됩니다.”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 강동경희대병원 퇴원수속 창구에서 들은 말이다.
암 환자로 등록되면 정해진 항목의 의료비 5%만 환자가 부담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암환자가 됐다는 사실에 기분 우울해진 참에도 그 말을 들으니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듯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3개월 분 약값도 5%인 3,700원만 냈다. 참 고맙기도 하고 우리나라 정말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다는 미국도 못 하는 제도를 우리가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돌이켜 보니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월급에서 의료보험 분담금 빠져나간다고 불평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이제 감기는 물론 암처럼 크고 작은 병 치료가 모두 의료보험으로 해결되니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낸 보험료 분담금 총액과 병이 나서 지급받은 의료보험혜택을 상계해 보면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앞으로는 보험의 덕을 더 많이 볼 것이 분명하다.
인생 80까지 산다고 볼 때 셋 중 한 사람이 암에 걸린다고 하니 암이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주범인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신문 방송을 보면 암 보험 광고가 제일 많은 것 같다. 암 보험뿐만 아니라 치매보험, 치과보험, 자동차보험, 운전자보험, 여행보험, 교육보험, 화재보험, 실업보험, 생명보험이 있고 심지어 죽고 나서 자식에게 보험금을 남겨 줄 목적 하나로 만든 사망보험도 있다. 바야흐로 보험 전성시대다.
현재를 절약하여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보험이라고 한다면 어쨌거나 사회는 믿음과 약속을 조금씩 더해 가며 발전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먹을 것조차 변변치 않던 시절에는 보험 대신 상부상조 하는 수단으로 계(契)가 있었다. 마을공동체의 경조사 등 어려운 일을 대비해 만든 대동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수리계도 있었고 여행갈 목적으로 친목계를 만들기도 하고 금반지를 마련하기 위해 계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상부상조의 믿음이 제도로 발전하여 이제는 의료보험이나 산업재해보험 같은 사회보장 보험이 생겼다. 경제가 발전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너나없이 미래 행복에 거는 기대가 높아지자 민간보험회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작은 믿음들이 모여 큰 약속을 만들고 그 약속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도 이만큼 발전해 왔지만 그 와중에 돈이 있는 곳엔 으레 믿음의 틈새를 파고들어 남을 등쳐먹는 사기꾼이 활개를 치고 있다. 남을 속이고 등치는 수법도 눈부시게 발전해 이제 여간 해서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아무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보험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남에게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달 동안 일을 해주고 나서 나중에 월급을 받고, 남(은행)에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고스란히 맡겨서 몫 돈 만드는 것을 적금이라 하고, 나라와 반반씩 적립했다가 나이 들어 다달이 평생을 두고 타먹는 것을 연금이라 한다.
길바닥 한 복판에 중앙선 하나 그어 놓고 마주 본 채로 시속 100km의 속도로 내달리는가 하면 심지어 핵폭탄 위협에 맞서고자 남의 나라 핵우산을 이용해야 하는 형편인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 믿음과 약속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쯤 되면 선거철을 앞두고 유력 후보자가 여는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여 면피보험을 챙기는 것 정도는 애교로 봐줘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묵묵히 하늘만 믿고 농사지으며 살던 옛날이 배는 곯았어도 오히려 솔직한 세상이었던 것 같다. 남을 탓할 일이 많지 않았던 세월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보험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웠으니 보험이란 말을 입에 담으면 아마도 사치스런 말장난이라 여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우리 부모들은 보험 대신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내 자식에게 만큼은 이 가난을, 이 험난한 삶을 대물림 하지 않으려고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자식 공부시키는 것을 보험으로 삼았다. 자신의 행복 같은 것은 깨끗이 접어둔 채 자식만 쳐다보고 묵묵히 살아 왔던 세월이 불과 4,5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 부모의 피땀으로 자란 자식들이 이제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 노부모 수발도 보험으로 하고 있다. 치매보험, 암 보험, 사망보험 등등 노부모 수발 목적으로 생긴 보험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병 때문이 아니더라도 늙으면 가족들과 헤어져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도 요즘 유행 중 하나다. 형편은 예전보다 나아졌는데 늙어갈수록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슬픈 세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임종도 90%가 병원에서 한단다. 다른 말로 하면 90%가 객사다. 과거에는 90%가 자신이 살던 집에서, 자녀들 앞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이제 저승 가는 일도 의사 앞에서 사무적으로 해야 한다. 보험이 있으니 병원비 걱정을 덜 수 있고 병원에서는 매출을 늘릴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법으로도 함부로 산소 호흡기를 뗄 수 없게 하고 있으니 구차하게 연명하는 목숨 하나 둘이 아니란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세상사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가 비교적 쉬웠는데 오히려 21C 문명시대라는 요즘 선악과 진위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핵심가치가 굵고 선명했는데 디지털 시대에는 다양한 가치가 대추나무에 연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어 세상 살아가며 옥석을 가리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것도 그런 것 같고, 저것도 그런 것 같은 가치의 혼돈 속에 살고 있다. 밝은 만큼 어두운 문명의 그늘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웰빙이야 어쩜 스스로 하기 나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죽는 것이야 말로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웰빙보다 웰다잉이 걱정이다. 요즘 세상에 떠도는 얘기가 있다. 재산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저승길 가는 일이 걱정인데, 재산 많은 사람보다 연금 든든한 부모가 자식에게 대우 받는다고 한다. 부모 재산은 어차피 상속될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오늘 가든 내일 가든 자식들로서는 급할 게 없지만 연금은 숨이 넘어가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에 연금 많이 타는 부모를 둔 자식은 부모가 기침만 해도 병원에 모시고 간다고 한다. 연금 든든한 부모는 존엄이 있다.
눈만 뜨면 돈돈 하고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세상이니 계산 빠른 자식들 보고 뭐라 할 수만도 없을 것 같은데, 일찍이 연금까지 일시불로 한 입에 털어먹은 나는 갈 길이 참 아득하다.
1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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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올림
갑상선암 수술 체험기로 제목 바꿨습니다.
저도이래저래중증환자등록으로병원비등혜택많이받고있습니다~^^
며칠전엔일주일치약값300원이길래
신랑이랑많이웃었답니다~~ㅎ
괜찮은 나라 아닙니까?
노인들 전철, 버스 무료지요.
평균년봉 7천만원씩이나 되는 직장에서 한달씩 파업을 해도 복직시켜주고 월급주고, 파출소에 화염병 던져도 발포하지 않고...
패거리 싸움판에 편먹기만 안 하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