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2일(화요일)흐린 후 맑음 오늘 아침 6시 10분에 출발하여 저녁 6시까지 64km를 걸어 현재 위치(이그나스에서 12km서쪽)에 이르렀다. 제이스 웍(Jay’s Walk)을 이용한데다가 길이 좋아서 빠르긴 한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 힘이 든다. 바람이 불 때를 예상해서 걷는 방법을 연구해야 될 것 같다. 지금 현재로선 허리를 최대한 굽혀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그나스 지역을 지날 무렵에는 토론토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한데 안부만 묻고는 끊었다. 아마 회사에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오후 내내 이제까지 잊고 있었던 회사의 일이 걱정되어 갑자기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그 모든 일들(본인은 프라스틱 사출 및 제품 조립공장을 운영중)을 여자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울 텐데... 아내는 별 말 없이 전화를 끊었지만 아내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의 본능이 얼마나 예리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느끼고 출발하기 전 그토록 반대한 것이 아니 었을까? 그러나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일. 빨리 대륙 횡단을 마치고 돌아가는 수 밖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속은 타는데 걸은 거리는 마음처럼 늘지 않았다. 오늘 저녁 국영 CBC-TV에서 북한 식량문제에 대한 전국 뉴스를 방송할때 우리의 대륙횡단 모금 뉴스가 함께 방송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장승민씨의 기분이 모처럼 만에 살아났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뉴스를 들으면 다시금 큰 용기를 얻곤 한다. 8월13일(수요일)맑음 오늘도 아침 6시에 출발, 저녁 6시까지 65km를 걸었다. 시간 변경선(1시간을 늦춘다)이 다가옴에 따라 아침 6시인데도 어둠이 가시질 않았다. 하루 종일 회사의 일을 생각하며 걸었다. 발걸음이 무겁고 힘이 들었다. 점심 전 록키를 구경하고 토론토로 돌아오던 젊은 부부와 한국에서 방문 차 오셨다는 그의 부모님을 만났다. 그의 부모님을 보자 토론토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80이 다된 노령에도 토론토 시내 행진구간 15km를 나와 같이 완주하신 어머니, 대륙횡단을 떠난 나의 소식을 기다리며 며칠을 앓아 누우셨다 일어나신 후 저녁이면 내가 떠난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우신다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흐르는 눈물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꼭 모든 것을 극복하고 횡단을 마친 후 당당히 부모님 앞에 나타나리라고 몇 번이나 다짐해 본다. 오늘도 오후에는 예상대로 심하게 바람이 불었다. 디노빅(Dinovic)이라는 작은 마을 주유소 옆에 캠퍼를 세웠다. 8월14일(목요일) 맑은 후 흐림 디노빅을 지나자 길 옆에 서 있는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고 이제까지 보이던 “무스주의”사인이 “사슴주의”사인으로 바뀌었다. 길은 곧아졌으나 하루종일 위아래로 구불거렸다. 흡사 초기에 걸었던 뉴브런스윅의 지형을 연상케 했다. 주위의 풍경도 침엽수 울창하던 숲에서 목축 농가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앞에 가던 Mr.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슴 일가가 금방 숲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사슴들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한참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 저녁 국영 TV에서 우리에 관한 뉴스를 방송한 탓인지 지나가는 차량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오전에 록키산에 가는 한국인 유학생 일행과 뱅쿠버에 다녀오는 참이라는 교민 일행을 만났다. 버밀리온 베이(Vermilion Bay)에서 하루를 묵다. 8월15일(금요일)흐린 후 비 시간 변경선을 지나는 바람에 이곳 표준시간이 1시간 늦어졌다. 어제와 같은 시간인데도 해는 벌써 높이 올라 와 있었다. 아침부터 몸의 컨디션이 좋질 않더니 하루종일 풀리지 않는다. 길 또한 노견이 없고 공사구간이 많아 전에 걸었던 69번 하이웨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전 휴식 시간에는 Mr. 장과 비디오 카메라의 VHS-C 테입과 8mm 테입에 관하여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내가 그에게 좀 심한 말을 했다.“개 똥 같은 소리 말라”고한 그 말이 그를 화나게 했고 급기야 보따리를 싸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이 것이 1차 보따리 사건이다. 그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한 나의 언동에 사과하고 말리느라 아까운 40여분을 허비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 내가 양보해야 하는 건데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날이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실수를 하게된다. 내일 먼 길을 가야 하므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틀만 더 가면 드디어 온타리오 주를 벗어난다. 지겹도록 멀고 험한 길이었다. 주 경계 도시 케노라(Kenora) 40km전에서 숙영했다. 8월16일(토요일) 맑음 온타리오주와 마니토바(Manitoba)주 경계에 있는 휴양도시 케노라를 지날 무렵이었다. 먼저 도시로 들어간 Mr.장과 도시 입구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길을 잃었는지 나타나질 않았다. 혼자 도시를 통과해 거의 다 지나올 무렵이 되서야 나를 찿아 쫓아온 그와 만날 수 있었다. 도시를 지날 때 캠퍼가 에스코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가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 때문에 Mr. 장과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온타리오주 마지막 도시인 이곳에서는 우리의 캠페인을 꼭 알리고 싶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안고 떠나고 말았다. .. 도시를 벗어나 다시 고속도로 진입로로 향하던 중 밴 한 대가 나타나서 길옆에 서더니 10여명의 젊은 인디언들이 나에게 몰려왔다. 나는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긴장하였다. 몰려온 그들은 나를 둘러싸더니 그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들은 마니토바에서 열릴 예정인 인디안 단합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몬트리얼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중인데 나는 경찰의 제재를 받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자 자기들은 마니토바 경찰의 허락을 받고자 이곳에서 며칠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이 학생들인 그들은 앞으로 일주일이내에 허락이 나지 않으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실망해 했다. 이 곳에도 인종통행금지 통행 금지가 있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들과 허깅(Hugging)하고 작별하였다. 8월17일(일요일) 맑음 오늘 오후면 온타리오주를 벗어나게 된다는 생각에 나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그러나 주 경계에 도착하기 전 20여km 구간은 도로 공사로 파헤쳐져 있어 지나가는 차량이 일으키는 흙먼지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눈만 내놓은 채 길을 걸었다. 휴식시간엔 창문을 닫았는데도 차 안이 온통 흙먼지로 덮여 음식조차 먹을 수 없었다. 주 경계를 벗어나는 나에게 환송식은 못해줄 망정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경 우리는 주 경계표시로 세워놓은 마니토바 지도 모양의 대형 조형물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내가 길가에서 꺾어온 할미꽃 열매를 공중에 불어 날리며 자축을 하였다. 실로 55일동안 2500km를 걸어 온타리오 주 하나를 벗어났으니 말이다. 마니토바주에 들어서자 도로는 이제 까지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잘 포장되어 있었다. 특히 넓은 노견( 농사지역에는 트랙터의 통행을 위해 넓은 노견이있음)이 있어 걷기에 안성 맞춤이었다. 길가의 사람들도 훨씬 친절한 느낌이 든다. 심지어 고속속도로 순찰차도 손을 흔들어 우리를 격려하였다. 이제까지 온타리오주에선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었다. 주 경계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마니토바주 홍보 센터가 있어 주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그 곳에 들렀다. 책자 수집 후 나오던 길의 안내판 밑에 한 뭉치의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다. 누가 안내소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어디를 보아도 쓰레기 한 조각 없는 그곳에 버렸을까 생각하면서 쓰레기를 주우려고 다가갔다. 그 순간 나는 얼굴이 뜨거움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투명봉지 속에 한글로 “김치라면”이라고 선명하게 쓰여진 열 개 정도의 컵 라면 사발 들어 있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어찌 할 바를 모르다 누가 볼세라 얼른 집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캐내디언들은 한글을 읽지 못하니 그 쓰레기의 주인이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알 리는 없었겠지만 우리의 선진국 슬로건은 여기에서 무참히 짓밟힌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8월18일(월요일) 침엽수림 사이로 길은 10여km씩 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직선 길에서는 앞을 보고 걸을 수가 없다. 앞을 보고 걸으면 아무리 가도 거리가 좁혀지질 않는 느낌이들고 이내 그 거리에 압도되어 질려 버리기 때문에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 그 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만을 바라보고 걷는 것이다. 한참을 가다가 앞을 보면 어느 땐 10km 앞으로 이동한 캠퍼의 비상등이 보여 반가움이 더하곤 했지만 그 불빛을 보는 순간부터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먼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 무료한 시간을 보내자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주로 반복되는 지나간 추억이 많은 부분을 메꾸어 주었다. 같은 추억을 대륙 횡단하는 동안 수백 번씩 생각했으리라. 어떤 때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과거부터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다. 하루에 평균 12시간 정도를 걸어야 하니까 아예 긴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걷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유년시절,초등학교 6년, 중 고등 6년, 대학 4년, 군대 3년, 등등 차례로 회상을 한다. 그러다가는 문득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며 혼자 애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힘들지?” 큰애 이브가 묻는다. “아니 괞찮아 그런데 너희들 방학인데 아빠가 없어 아무 데도 못 데리고 가니 어쩌니?” “내년에 가면 되지 뭐, 아빠 빨리 끝내고 돌아와!” “그래 최선을 다 할께.” 그러는 동안 작은놈 알렉스가 끼어든다. “나 아빠보고 싶어요.” “그래 아빠도 네가 보고싶단다. 아이 러브 유 이브 알렉스” 하다가는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기왕 생각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 하자. 지루한 건 나 뿐만이 아니고 운전하는 장승민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하루 7-80Km 걸어도 차로는 한시간 정도의 거리니 만치 장승민씨는 나머지 십여 시간을 무더운 캠퍼 속에서 혼자 보내야 하는데 아마 그 고통도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그를 위해 도착하면 해 줄 생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 보았다. “이름이 총찬이인 세 군인이 있는데 성이 장씨 권씨 소씨야. 누가 제일 계급이 높겠나?“ ”권총찬이...“ “제일 쫄병은?” “장총찬이...” “누가 제일 키가 크겠나?” “소총찬이...” “그걸 어떻게 알아? 대보아야 알지!” “아따 그걸 농담이라고 하십니까 대장님?” 하 하 하.. Mr.장이 대답하다 말고 무안을 주는 통에 웃고 말았다. 장승민씨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두 가지다. 기분이 좋으면 “대장님,” 언짢을 때는 원 집사님. 그래서 그가 나를 부를 때의 호칭을 보면 그의 기분상태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장총각이라고 불렀다. 그는 아직 반쪽이기 때문이다. 그는 캠퍼 뒤에다 농담 삼아 “색시감 구함”이라고 써 놓았는데 어느 도시에선가는 그것이 TV에 방송되기도 했다. 요즘에는 한 번에 주파하는 거리를 10km로 고정하였다. 보통 그 거리를 한시간 반 정도에 걷는데 별 무리가 없었고 주파시간 또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1-2분의 오차밖에 나질 않았다. 왕복도로 사이에 설치된 휴게소에 캠퍼를 세우고 하루를 묵기로 했다. 휴게소에 있는 아이스크림 판매소 주인은 나를 보자 수고한다며 우리가 내야할 두 개의 아이스크림 값을 성금으로 대신하겠다고 해서 그 대금을 모금함에 넣었다. 곧 이어 여러 명의 사람들이 다가오더니 우리가 마니토바주에 도착한 것을 축하해주고 적지 않는 성금을 하여 주었다. 이곳에는 온타리오주와는 달리 대낮에도 사람을 공격하는 왕 모기가 있었다. 모기를 피해 차 안으로 들어와 휴게소 주위의 야생 동물들의 재롱을 구경하며 밤을 맞이했다. 8월19일(화요일)흐림 가끔 비 이제껏 보이던 산과 나무들이 없어지고 사방이 끝없는 들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엊그제만 해도 산과 나무들 천지였는데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완전히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길은 더욱 반듯했고 차도 옆에는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차선보다도 더 넓은 포장된 공간이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공간은 농부들의 농사용 트랙터를 위하여 만들어진 길이었다. 어쨌든 너무나 걷기가 좋았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파리만한 모기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괴로웠다. 여름철의 곤충들은 전혀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다. 하기야 그들도 여름 한철 종족의 번식을 위해 본능에 충실해야 될 테니 ... 위니펙에 본부를 둔 캐나다 곡물은행의 트리쉬 조단(Trish Jordan)로부터 모레 있을 위니펙행사에 관해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내가 대륙 횡단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일정과 캠페인에 관해 지역 언론에 알려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횡단 도로에서 200여m 떨어진 농가의 풀밭에 캠퍼를 세웠다. 위니펙까지 앞으로 24km. 저녁에는 바람이 몹시 불며 비가 왔다 8월20일(수요일) 맑음 아침부터 걷기 시작했으나 지도를 잘못 본 탓으로 10여 km를 더 걸어야 하는 실수로 한시간 반이 더 지나서야 위니펙 교민들이 나와 있는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임봉재 위니펙 한인회장과 임원들, 이영선목사, 중앙교회 목사등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들은 우리를 현지 한인회에서 마련한 수퍼 8 모텔로 안내했다. 중동계인 모텔 주인은 한인회와 친하다며 숙박비를 무료로 해주었다. 위니펙에 오자 수피어리어호수의 영향으로 서늘하던 온타리오주의 날씨와 달리 다시 대륙성 기후 특유의 무더움으로 변하였다. 훨씬 북쪽임에도 불구하고 수은주가 삼십 여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수요일이라 우리는 중앙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이제까지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며 모금하였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다. 예배 후 둘러서서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북한의 불쌍한 동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어질 수 있도록 소원하였다. 자정쯤에 우리는 모텔에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8월21일(목요일)맑음 북한에 식량을 보내자는 피켓을 든 위니펙 시민,교민들과 나는 2시간 반쯤 행진하여 주 의사당이 있는 시내로 들어갔다. 아침 출근 시간에 도심으로 향하는 두 차선 중 하나를 차지하고 행진하는 우리들에게 줄지어선 차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오히려 격려의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규칙상으로는 도심에서 차선을 차지하고 행진하려면 경찰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고 사고에 대비한 보험까지 들어야 한다. 그 문제를 요청하기 위해 경찰에 찿아 간 교민에게 경찰은 “ 당신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모금 행사를 한다며 이돈 저돈 내면 무었으로 돕겠냐? 우리가 모른 척 할테니 조심해서 행진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실제 우리가 도심의 큰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 대 여섯 명의 교통경찰은 우리를 위해 신호 조작을 하면서도 손을 흔들어 고맙다는 표시를 하는 우리에게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한 경찰 간부에게 다가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의 행진을 본 이상 허가가 없으면 단속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꼭 대륙 횡단에 성공하길 빕니다.” 나는 할말을 잃고 그들의 융통성과 합리성에 감탄하고 말았다. 법대로 단속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오히려 이런 불법이 사람의 마음에 준법 정신을 키워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 반을 행진하여 우리는 캐나다 곡물 은행 본부에 도착하였다. 직원이 열 서, 너명정도뿐인 크지 않은 사무실이었다. 그동안 나와 수없이 통화했었던 낯익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일행을 위해 점심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캐나다 곡물 은행은 캐나다 안의 13개의 교회교단에서 공동으로 설립한 순수 민간 기구로 세계의 기아에 대한 원조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다. 그들은 수 년 전부터 캐나다산 밀을 북한에 보내 현지에서 도정한 후 자강도 지역에 집중 분배해온 터였다. 그들은 단순히 식량을 북한에 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곡물 선적 후 4-5명의 목사님들을 북한에 파견해 밀가루가 실수요자에게 가도록 분배과정을 철처히 감시하곤 해왔다. 그들은 전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찍은 비디오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다. 많은 내용이 이미 우리가 방송을 통하여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 참담함은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세계 많은 나라에 구호물자를 보내지만 전혀 언론에 보도를 하지않고 겉으로 나타내질 않는다. 즉 숨어서 그림자처럼 돕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금 그들을 통해 대륙 횡단 모금 운동을 하게 된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사무실을 떠나기 전 그들을 통하여 방북 비자 신청을 하였다. 뱅쿠버에 도착하면 한국으로 건너가 남북 종단을 하고 싶다는 소망에서였다. 비록 해외에 살고 있지만 조국을 위하여 남북화합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보람된 일이 어디 있을까? 과연 이런 내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 오후 주 의사당 앞에서 기념식 및 북한 돕기 캠페인이 있었다. 많은 교민과 주민들이 참가했고 언론취재도 있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참가한 교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 세워 시내를 행진하였다. 행진 후 우리는 곡물 은행 관계자의 안내로 이천 오 백 에이커에 달하는 한 밀밭으로 안내되었다. 이 밀밭은 여러 농부들이 각각 땅과 씨앗, 비료등을 추렴하여 농사 짓는 것으로 그동안 농부들의 헌신으로 자라난 그 밀들은 추수 후 북한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남을 돕고자 하는 농부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이런 밀밭이 록키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수만 에이커(1 에이커는 1200평)가 있다고 했다. 지난날 나는 가끔 폐허가 되어 있는 교회를 보며 이들의 마음속에 신앙심이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들을 축복하시는지 의아해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대륙 횡단을 하면서 한가지 이유를 발견하였다. 신앙심은 없어도 그것의 열매인 남을 돕는 것 즉 나누는 것 하나 만큼은 모두들 철저히 지켜 간다는 것이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복을 받으려면 먼저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저녁에는 다시 한인회에서 마련한 북한 돕기 예배 및 모금 행사가 있었다. 나는 기타 치며 복음 찬송을 부르고 간증을 하였다. 그 곳에서 2000여 불의 성금이 모여져 곡물은행에 기증하였다. 참으로 큰 성과였다. 교회 주차장에 캠퍼를 세우고 일박을 했다. 8월22일(금요일)맑음 새벽 5시경 나는 교통 체증을 피해 일찍 시내를 빠져 나올 생각으로 교회주차장을 출발하였다. 이영선 목사님은 벌써 오셔서 우리가 깨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는 얼마 전 곡물 전달을 위해 토론토 큰 빛 교회 임현수 목사님(박재훈 목사님 후임 - 임현수 목사님은 수 년 전 자유화 이후 경제난으로 허덕이는 러시아를 돕기 위해 가다가 유럽에서 한 TV 프로그램을 통해 서독의 한 교회가 베를린에 세운 교회에서 시작한 통일 기도회가 독일의 통일을 이루는 밑 걸음이 되었다는 것을 본 후 남북한 역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북한에 많은 식량을 보내고 있는 훌륭한 목사님이시다.)과 함께 북한에 다녀온 터였다. 그는 나와 새벽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영적인 충전에 좋은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다. 얼마 후 목사님과 헤어져 도시를 빠져 나오자 길은 본격적으로 대 평원을 가르며 서쪽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수확철이라 밀 밭의 황금색 물결이 온 천지를 덮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 보는 나의 마음은 슬프기 이를 데 없었다. 이곳은 이렇게 풍족한데 지구 반대편 저쪽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가고 있다니.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곳 사람들은 굶주린 북한을 돕고자 저렇게 곱게 밀을 키우고 있는데 정작 그들과 한 피를 나눈 우리남한은 먹을 것이 넘쳐 나도 동족에게 인색하며 무관심하단 말인가? 남한의 풍요는 북한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진정 나누지 않으면 그들에게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재고할 것을 역설 하였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당신은 6.25를 모르니 하는 말이다. 그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인 줄 아는가? 그들을 배부르게 하면 힘내서 남한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단 말이오. 아프리카고 어디고 다른 나라 사람은 몰라도 북한만은 안돼요. 그러나 이 모든 구차한 변명은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 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 일주일만 굶어 보시오. 사흘 굶으면 양반도 없다고 하지 않았소?” 굶주림은 사람의 이성을 잃게하고 모든 행동을 정당화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걸 모르시오?. 내가 죽어가고 있는데 법이, 윤리가, 양심이 이성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물론 우리는 북한에 식량을 주기는 하되 그냥 주어서는 안 된다. 절대 군용으로 쓰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곡물은행에서 하듯이 일반인에게 배급이 되도록 해야 한다. 쌀등 보관이 용이한 식품보다는 밀가루같이 쉽게 요리 할 수 있는 것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식량에 우리의 동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담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북한을 도와야 할 사람은 우리 남한 사람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도와야 한다. 만약 끝까지 그들을 외면한다면 그들의 비이성적인 도발로 인해 남한이 어려운 상황에 처할게 될지도 모른다. 남북 종단을 위해 가을에 한국에 가면 꼭 이 이야기를 모두에게 하리라.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뒤에 차가 한 대 다가와 섰다. 중앙교회 목사님께서 점심 준비를 하여 쫓아온 것이었다. 나는 앞에 서 있던 캠퍼에 도착하여 맛있게 식사를 나누었다. 그들의 정성에 무엇으로 보답하랴. 오후 내내 추수하는 농부들을 향하여 누가 밀을 좀 성금으로 내놓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손을 흔들며 걸었다. 하지만 농부들이라 경제사정이 별로 안 좋은지 길거리에서의 성금은 기대 이하였다. 오늘도 양쪽 도로 중간에 설치된 휴게소에 캠퍼를 세우고 하루를 지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