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걷기 (수필)
중안 / 조상진
언제부터인가 ‘어싱’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있어서 무슨 뜻인가 구글을 검색해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영어 단어인 earth(어스)에 ing(잉)를 붙혀서 만들어진 신조어가 된다. 그리고 맨발로 맨땅을 걷게 되면 대우주인 지구의 자기장이 소우주인 인간의 몸속으로 직접 전해져서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알쏭달쏭한 설명도 있다.
마침,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하는 후배와 점심을 같이 먹고 있는 도중에, 맨발로 길을 걸을 수 있겠냐며 나에게 동행을 제안한다. 그의 내심은 나를 교회로 전도하려는 속셈이 보이기는 하지만 평소에 운동을 마다하지 않는 나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쾌히 승낙한 후, “아! 어싱이라는 말이 있다면서?” 라고 묻자 “아니 그것을 아직 모르세요?” 라고 의외라는 듯 반문을 한다. 그리고 후배 자신은 현재 혈당과 혈압이 높은 상황이라서 어싱을 계속하고 있고 특히 황톳길에서는 더욱 효과가 좋다는 말을 덧붙이며 곧바로 현장으로 가자는 것이다.
호기심을 안고 후배가 운전하는 차량에 동승하여 도착한 곳은 신도시가 조성되어 고층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는 용곡산공원 이다. 신도시답게 잘 가꾸어진 진입로를 따라 목적지 입구에 도달하니 앉아서 손발을 씻을 수 있는 수도시설도 설치된 것으로 보아 만만하지는 않다.
황톳길의 시작점 입구에는 벗어놓은 신발들이 제멋대로 놓여 있는데 맨발 주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배의 안내에 따라 신발과 양말을 한쪽에 벗어놓고 맨발로 산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맨발을 맨땅에 내딛자마자 발바닥에서 불이 난다. 왜냐면 나뭇가지와 모래들을 우선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속삭이듯 “선비군자가 꼭 이렇게 해야 하나....” 라고 자화자탄 하면서 앞을 보니 50미터 지점부터의 산길에서 빨간 황톳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입구에서의 따끔거리는 아픔을 참고 드디어 황톳길에 들어서니 발바닥의 느낌이 전혀 새롭게 전해 온다.
우선, 황색의 땅 색깔이 호감을 주고 어릴 적 학교길 그리고 고구마밭과 동내 뒷산의 개미집에서 흙장난하던 황토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는 그저 타고난 지역에서 어렵던 시절의 추억이었을 뿐, 황토 자체에 대한 건강학적 가치는 까맣게 모르던 시절이 아니던가, 이제는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고 또 많이 좋아졌다. 이러한 호강을 누리려는 시도 자체가 천국의 삶이라고 말한들 틀렸다고 누가 단정할 것인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옮길 때마다 황토의 촉촉한 지면에서 느껴지는 촉감은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하고, 지구에서 내 뿜는 자기장이 발바닥에서부터 몸속 깊숙이 스며드는 기분이 새롭다.
조금 더 걸어가니 황토 뭉치를 모으고 물을 부었는지 황색으로 변하여 고인 물이 귀엽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곳에서 잠깐 발을 담그고 지나간다. 맨땅을 걸으면서 지루한 생각도 들기도 하고 나도 지나칠 수 없어서 발을 담가 보았다. 어린아이 물장난하듯 발바닥을 이리저리 저어보고 묽어진 황토에도 발가락을 깊숙이 넣었더니 또 다른 기분이 든다. 지구 자기장이 수분과 함께 진하게 나의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다시 걷던 길을 재촉하는데 매미 한 마리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는 여름이 아쉬운 것인지 아니면 아직 짝을 찾지 못해서 인지는 모르지만 그 매미 소리가 들리는 느티나무 아래에 다가서니 노래를 그친다. 나는 매미를 향하여 말을 건넨다. “매미야 신나게 노래를 부르니 기분 좋지?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자, 너는 이 여름 지나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떨어지고 또 겨울이 오면 얼음이 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매미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후배가 앞서가면서 한마디 던진다. “선배님 피곤하세요?” 가는 길의 독촉에 상관없이 매미는 이렇게 답변한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세요?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요?” 라고.
하기는 물어보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7년간 땅속에서 애벌레로 살다가 여름의 한철 성충으로 세상에 나와서 짝짓기를 마친 직후, 일생을 마감하는 매미에게 무슨 단풍이 있고 겨울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인간들의 세계를 자연에 비유하여 우화를 만들어 낸 장자(莊子)는 “여름 벌레는 겨울 얼음을 믿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하충의빙(夏蟲疑氷)이라 가르쳤다.
처음 출발지에서는 황톳길만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같은 산길을 양쪽으로 갈라서 경계선을 만들고 잘게 부순 자갈길도 만들어져 있다. 신발을 신고 걸을 사람을 배려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중 작은 모래가 중간 동아줄 경계를 넘어 황토 위로 침범해서 그런지 간간이 발바닥이 따끔거리기도 한다. 시청에서 상당히 공을 들여 잘 만들어진 산길이지만 이 세상에 ‘완벽’이란 불가하다는 진리를 또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약 2.5킬로미터 거리는 산 숲의 여건을 잘 활용하여 오르고 내림의 완만한 경사도 역시 잘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숲이 우거진 부분은 태양 볕을 가리게 되어 촉촉한 지면으로 상당 시간을 지속시켜 주지만 햇볕이 잘 드는 부분은 태양의 열기와 함께 지면이 단단하고 모래까지 침범하여 옥의 티가 된다. 자연의 현상과 숲의 조건까지 모두의 충족을 바라는 나의 마음 역시 지나친 욕심이리라.
약 40분의 맨발 걷기가 마무리되는 지점에 도달하자, 길옆 한쪽 공간에 마치 낮은 공동우물을 연상케 하는 황토장이 눈길을 끌어 당긴다. “선배님 저기에서 좀 쉬었다 갑시다” 후배의 인도대로 따라가 보니 먼저 온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레에 주저앉아 발을 모두 안으로 모으고 있다. 나도 그곳에 합류하고 싶어서 인사말을 던져 보았다.
“아! 큰 둥지 같네요, 옛날 공동우물 같기도 하고요” 그러나 아무런 대꾸나 반응이 없다. “아차 내가 말실수를 했는가?...” 걱정을 하면서 후배의 표정을 보니 역시 무반응이다. 하여간 다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누가 들어오든 나가든 자신들의 발 관리에만 열중이다. 대천 해수욕장의 머드 축제가 온몸을 진흙으로 바르면서 즐기는데 비교하여 여기에서는 발 부위만 황토 진흙 속에 더 깊숙이 담그고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내 몸만 건강하면 되는데 누가 들어오든 나가든 무슨 상관이냐 라는 모습들이었다.
황색 수량이 찰랑찰랑하고 더 많은 황토 진흙 속에 양발을 푹 담그는 순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온다. 걸을 때 남아 있던 발바닥의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지구의 보이지 않는 자기장이, 발등을 덮는 습도와 함께 종아리와 허벅지를 통과하며 쏘옥 온몸으로 스며든다.
충분한 시간을 투자한 후, 가벼운 심신으로 처음 시작점에 도착하니 먼저 온 사람들로 세족장이 가득하다. 4개의 수도꼭지에 앉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발에 묻은 황토 찌꺼기 씻어내리는 소리도 지구의 자기장을 전해 받은 듯이 덩달아 신바람이 났다.
나도 마찬가지로 후배 덕분에 말로만 들었던 어싱을 직접 체험하였고 넓고 깊은 세상의 이치를 또 한 번 경험했던 소중한 시간이었음에 천지 우주 만물에 감사를 보내면서 귀가하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一微塵中 含十方 (일미진중 함시방) 이라는 액자를 다시금 바라본다.
* 一微塵中 含十方 : 하나의 작은 티끌에도 온 우주의 섭리가 담겨있다 (화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