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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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가곡은 「그대에게」 였다. 이 가곡의 원시(原詩)는 내가 첫 시집에 수록한 시 ‘그대에게’를 거의 있는 그대로 가사에 적용한 가곡이다.
시(詩) ‘그대에게’는 1998년 늦가을에 혼자서 어머니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나의 옛고향 H읍으로, 군산으로 여행을 다녀와서 적어놓은 일기를 토대로 쓴 것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나의 가을여행기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 (前略) 1970. 6. 5. 우리가 서울에 왔지만 1972년부터 1974년 사이만큼 우리 가족이 비참했던 시절이 없었다. 그 시절의 일기를 보면 나는 뒤늦게서야 철이 들어 어떻게든 배우고 싶어 몸부림을 쳤고, 형은 비어가는 쌀독을 채우느라 인정사정도 없었으며, 어머니는 타향을 떠돌며 갖은 풍상을 다 겪으셔야만 했다. 나 역시 몸무게 57Kg으로 10원짜리 후생국수를 사먹으며 영등포 한림학원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어머니가 노점상을 하셨다는 그곳은 기억할 수도 찾을 수도 없었다. 언젠가 형을 따라 군산역에 내리면 군산역 앞에 즐비하던 커다란 찐빵을 팔던 포장마차도 없었고, 군산은 그저 군산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찾아야만 할 그 무엇도 없으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남들은 IMF외환위기시대라고 저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남들 다 열심히 일하는 대낮에 가방 하나 둘러메고 군산역 앞에 서 있는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마치 배낭여행을 떠나온 이방인처럼 나는 한참을 서 있었고, 어디든지 가야만 할 것 같아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는 연안여객선터미널로 가자고 했다. 군산에서 가까운 섬이라도 들어가면 밤에는 해변에 서서 별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여객선터미널에는 그 시각에 떠나는 배가 전혀 없었다. 배들은 대부분 하루 1회 운항하는데 그것도 아침 08:00경이면 대부분 출항한다는 것이었다.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다음날 가까운 섬에 가보기로 하고, 근처에 있는 어시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갈치, 새우, 꽃게, 조기, 아귀, 병어 등 많은 생선이 있었다. 비릿한 생선냄새와 녹슨 어선들, 억센 사투리로 고기를 파는 아낙네들이 있었고, 바다와 갈매기와 부두가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 바다를 좋아했던가, 나는 가끔 내가 전생(前生)에 뱃사람이나 어부, 또는 바닷가에 살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정도로 바다를 좋아했다. 바다에 가면 사실 별 게 없었다. 그저 먼 수평선과 갈매기, 출렁이는 파도, 어시장, 어선들, 이런 것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바다이든 어김없이 쓰레기가 있었고, 바가지요금과 때로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보고 돌아올 때면 내가 무엇 하러 바다에 왔던가, 다시는 바다에 가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며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다시금 여름이 되면 송림이 우거진 해변과 그 해변에 쏟아질 별들이 그리웠고, 짭짤한 바다냄새와 비릿한 생선내음이 그리웠으며, 갓 잡아 올린 생선이 살아 숨 쉬는 어시장의 풍경, 저녁바다에 떠 있는 오징어배의 불빛들이 그리웠다. 그러면 나는 다시 아내를 설득하여 바다로 떠났고, 수영도 못하면서 바닷가에 앉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바다가 좋았다.
바다는 우선 넓어서 좋다. 경계가 없어서 좋다. 그 곁에 서면 어쨌든 넉넉하다. 그 밑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다. 그 속에서 숨 쉬는 물고기들, 해초들과 수많은 바다 생물들의 신비를...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들은 내게는 늘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내 자신은 수영도 못하고, 물을 겁내며,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고기를 잡는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일인 줄을 알면서도 나는 그들의 모습이며 삶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곤 했었다.
또한 가장 슬프고 가엾은 것도 그런 어부들의 삶이었다. 어쩌다 태풍에 조난당하여 실종된 어부들의 이야기라도 들을라치면 나는 정말 내 일 인양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나의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곳은 마치 내 고향과도 같았고, 내 꿈의 무대와도 같았다. 막연하나마 나는 바다를 보며 살고 싶었고, 언젠가는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또한 바다는 내게 그녀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다. 그녀를 만나 인천으로 가서 바다를 보던 시절, 그때가 나는 무작정 좋았다. 그녀는 내게 있어 누구인가, 천사다. 내 모든 것을 새롭게 일깨워주고 변화시켜준 영원한 천사이다. 그녀는 내가 군(軍)에 있는 동안 8번이나 나를 찾아 강원도로 왔고, 우리는 바닷가에서 같이 파도를 보았고 수평선을 보았다. 군(軍) 생활 3년 동안 늘 가까이 있던 바다, 그 바다만큼이나 그리워하던 그녀. 그녀가 이제 내 아내가 되어 언제나 내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보면 바다가 그립고, 바다를 보면 그녀가 그리웠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연애하던 시절 찍어둔 사진을 보면 온통 바다뿐이다. 바다로, 해변으로, 어시장으로, 갯벌로, 우리는 그렇게 돌아다녔다. 그녀가 곁에 있는 한 나는 늘 즐거웠다. 늘 행복했다. 비록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넉넉한 시간이 없었어도, 우리는 늘 함께 있음에 행복하였다.
그런 바다는 잃어버린 어머니의 품과도 같다. 모든 것을 넉넉히 감싸주는 바다.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이 넓고 깊던 그 바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늘 바다를 어머니의 은혜와도 같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아마 정작 어머니는 바다에 자주 가보지 못하셨고, 배를 타실 기회는 더구나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다에서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의 가슴을 느낀다. 그 넓고 깊은 바다 어딘가에 어머니가 숨 쉬고 계심을 나는 믿기에... 비릿한 생선냄새 가득한 어시장 그 바닥 한가운데 앉아 생선을 파는 아낙네의 거친 숨결, 험한 그 손길과 움푹 패인 그 주름 속에 어머니가 계심을 나는 본다.
어시장을 둘러본 다음 나는 시내에서 ‘장사익’이라는 가수의 카세트테이프를 사들고 금강하구둑으로 갔다. 금강하구둑은 서해로 연결된 금강을 거대한 수문으로 막은 지점에 유원지를 꾸며놓은 곳인데 강변 풍광이 좋았다. 말하자면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강변에는 전망 좋은 음식점들이 많았다. 그중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서 창문으로 보니 군산항의 원경(遠境)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가 지고 어둑해진 항구 주변에는 하나 둘씩 불빛이 반짝이고, 먼 하늘너머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장사익의 한 맺힌 듯한 목소리가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를 때, 청승맞게도 어깻죽지에서 가슴을 관통하며 전율이 왔다. 단지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로 이어지는 유행가 첫 가사에도 눈시울이 젖는 나는 도대체 몇 살인가, 언제까지 이런 유치한 몰골로 저녁바다를 응시해야 하는가.
아내가, 아이들이 그리웠다. 아내는 알까, 아직도 나는 아버지보다는 아들이고 싶은 것을. 아이들은 알까, 아빠가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사실을. 아내와 아이들은 모르리라. 오늘 내가 떠나 있었으되 결코 떠나 있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어릴 때부터 해질녘이 좋았다. 저녁안개가 깔리는 들녘에서 새들이 집을 찾아가는 그때, 멀리서 불빛들이 하나둘 반짝이고, 어디선가 성당의 종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그때, 고단한 가장들은 손에 생선을 사들고 집으로 향하고, 어머니들은 소리쳐 아이들을 부르고, 아이들은 풀을 뜯긴 송아지나 염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때, 멀리서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오고, 들에 나간 아낙네들은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돌아오는 그때. 처마가 낮고 들창이 작아도 언제나 따뜻한 것은 내 집이 아닐까, 아무리 초라해도 저녁이면 찾아드는 내 집, 부모님과 형제들이 오순도순 저녁상을 기다리는 내 집, 그래서일까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그림 같은 그때가 나는 가장 좋았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들에 나가신 어머니, 장에 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며 상수리나무가 서 있던 그 언덕에 앉아 신작로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섰던 그 시절이... 그것이 어디 나만의 추억이겠는가, 모든 시골 아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시장에 간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언덕에 오르면, 해는 차츰 지고 날은 어둡고 그러다가 낯익은 발자국소리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면 “어구 내 새끼, 여기서 애비를 기다렸느냐.” 하시며 품에 안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꽁치며 홍어의 비릿한 냄새, 담배냄새와 술 냄새로 찌든 무겁고 둔한 오버코트의 까칠한 감촉, 그러나 말할 수 없이 따뜻했던 그 품 속, 순간 눈물이 핑하고 돌면서 괜스레 투정을 부리던 기억들.
작년 결혼기념일,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H읍에 갔었다. 그때도 왠지 모르게 고향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고향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아내의 말처럼 고향과 어린 시절의 추억은 그저 가슴속 추억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는 것을.
우리가 살았던 집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낡은 집 한 채, 말라버린 우물, 그곳에는 어머니가 수건을 동이고 풀을 매시던 보리밭도, 무너지는 둑을 지키느라 속 태우던 논도 없었다. 대추나무도, 텃밭도, 상수리나무도 아무런 흔적이 없었고, 뽕나무배기 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디가 아버지의 산소가 있던 자리인지조차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플라타너스나무만이 몇 그루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향을 나는 무엇을 보기 위해 갔었던가. 거기서 내가 보고 온 것은 사실 별 게 없었다. 어린 시절 내 눈에는 그렇게 넓어 보였던 들녘이 그곳엔 없었다. 해질녘 새들이 날던 그 아름다운 들녘은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해가 질 무렵 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한없이 평화로운 그 들녘은 언제나 내 가슴속에 고향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안겨주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특히 기차를 타고 가면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다. 기차를 타고 해질녘 창밖을 보라. 거기 언제나처럼 고향이 있고 어머니가 계시고 그리고 평화가 있다. 해가 지고 초저녁별이 하나둘 떠오르면 마침내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킨다. 세상의 모든 더러움도, 슬픔도, 걱정까지도. 그리고 차창에는 내 모습만이 비치는 것이다.
결국 인생살이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니겠는가.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 되면 안식을 찾아 집에 들듯이, 우리 인생도 차츰 기우는 해처럼 나이가 들고, 결국은 늙어서 안식을 찾게 되는 것.
그렇다면 내 인생은 어느 정도 추수를 마쳤는가, 언제쯤 해가 지는 들길을 걸어 집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일까, 남은 해가 길지 않음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결국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곳에서 저녁 겸 맥주를 마시고, 강변에 있는 여관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목소리는 마치 딴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오호라. 질기고 두터우며 온기가 스민 내 귀한 인연이여, 너는 그 끝을 잡고 놓지 말아다오. 언제까지나...
아내와 그녀는 다르다. 그녀는 내게 있어 영원한 연인 같은 존재이다. 아내는 어떤가, 그 이름은 그녀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아내는 아이들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현실과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아내는 내가 죽어도 내 무덤에 찾아왔다가 아이들과 함께 곧 돌아가 일상의 삶 속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르다. 그녀는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죽으며, 그녀는 내 가슴속에서 나와 함께 산다. 그녀는 내 꿈과 추억 속에서도 살고 있다. 나는 그녀를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녀는 내 숨결이며 호흡과 같다. 그녀는 내게 온 그날부터 나와 함께 살았고 나와 한 몸이 되었다. 그녀가 나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녀는 내 가슴에 지핀 모닥불이며, 저녁하늘을 수놓는 별이고,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그녀는 아내가 아니다. 항상 출렁이는 바다이다. 수평선이다. 갯벌이며, 그 안을 파고드는 바다내음이다. 내게 있어 그녀는 단지 꽃의 의미만은 아니다. 여자의 이미지만은 아니다. 그녀는 내 목숨을 보듬고 살고 있고, 그래서 나는 어딜 가든 그녀를 느끼는 것이다.
그대 아직도 나를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바람인 것을... 아는가(後略). 1998. 11.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