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산에서 내려와 가까운 김제남 신도비를 찾았다
신도비 옆 노거수 그늘은 적당한 바람과 함께 더위를 식히기에 그만한게 없었다
김제남 선생은 선조 18년(1585)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활동을 시작하였고,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에는 이조좌랑에까지 올랐다.
둘째 딸이 선조의 둘째 비인 인목왕후로 채택되자 연흥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광해군 5년(1613)에는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누명을 쓴 채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 오백령 할아버지께서 당시 예조참판으로 이 김제남의 상복을 인목왕후에게 입혀야되는 처지에 있으며 한음 이덕형과 함께 그 슬픈 운명을 침통해하신 역사가 있다. 결국 인목왕후 폐모 정청에 참여하지 않으신 죄로 6여년을 대죄하며 한많은 나날을 지내셔야 했다 그 형인 오억령 선조도 이때 강하게 반대하다 결국 돌아가시고 집안이 멸문지화 입는다
김제남은 인조반정 후에야 명예가 회복되어 그를 위한 사당을 지었고,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 위쪽으로 사당과 손자들의 묘가 있었다
김제남은 1613년 李爾瞻(이이첨) 등에 의해 仁穆王后(인목왕후)의 소생인 永昌大君(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서소문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았으며, 1616년 廢母論(폐모론)이 일어나면서 다시 剖棺斬屍(부관참시)되었다.
이 때 아들 셋도 같이 화를 입었으나 부인과 손자 천석, 군석은 살아남는다
의민사 옆에는 손자 천석의 묘가 있었다 천석은 어머니 초계 정씨의 기지와 외조부 정묵의 도움으로 치악산 영원사에서 10년 동안 남의 눈을 피해 있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묘지 오른쪽엔 김천석의 신도비인지 묘갈인지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지었다
천석의 묘지에는 지금의 묘지에도 이름모를 분홍 풀꽃들이 화사하게 수를 놓고 있었다
손자 묘를 지나 오솔길을 오르면 김제남의 묘역이 있는데 처가 신도비 노거수 아래 차에서 쉬고 있기도 하고 비로 인해 길이 질퍽하기도 하여 그냥 내려왔다
근처 흥법사지도 있나본데 거기까진 못 갔다
대신 김두한 고택이 있다하여 들렀는데 둘러볼만하진 않았다
다시 간현유원지쪽으로 와 조엄 기념관을 찾았다
조엄 선생은 1763년 통신정사로 일본에 갔다가 굶주린 백성을 위해 고구마 종자를 국내로 들여와 보장법과 재배법을 보급한 인물이다.
그러나 후손(손자)인 풍양조씨 조만영 등이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이끌기도 하면서 그의 백성에 대한 공적은 나에게는 색안경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해설사께서 때마침 심심하셨나 내게 이것저것 설명하며 나와 왔다갔다 역사관 등 한담을 하다보니 거의 30분 이상을 기념관 안에서 지냈다 덕분에 많이 배우기도 했다 특히 해설사 개인적인 학설 의식주 혁명이 기억에 남는다 주의 혁명은 온돌, 의의 혁명은 문익점의 목화씨, 그리고 식의 혁명은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구황작물)로 인한 당시 백성의 기근을 획기적으로 해결함. 일리가 갔다
기념관 옆에는 사당이 있다 위민문이란 현판이 인상적이다
사당 뒤쪽으로 신도비와 함께 그 위로 오르면 묘소가 나온다
묘갈은 조만영 한용구 서 김이양 찬이다
고구마 체험에 온 학생들이 낀다는 장갑이 형형색색으로 예뻐 한컷 찍고 구룡사를 향해 운전석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