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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뱀에 물려 고통 받고 있습니다. / 2017년 7월 9일 주일 예배
본문 / 민수기 21:1-9
안면도에 있을 때에 사택을 신축하기 전에 살던 주택은 조립식으로 지은 낡은 가건물 같았습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실외보다 더 더운 곳이었는데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아 방바닥의 수평에 편차가 심했고 심지어 갈라지고 움푹 들어간 곳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방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벽을 타고 시커먼 게 스멀스멀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설마와 혹시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며 눈을 번뜩이고 보니 뱀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고 징그러워하는 게 뱀입니다. 얼마나 놀랐든지 뱀도 놀라 뒷걸음을 쳤습니다. 한 동안은 정말 집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 징그러운 뱀이 타락한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겁할 일입니까? 얼마 전 인천에서 어린 초등학생을 유인하여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주범 김양은 열일곱 살, 공범 박양은 열여덟 살 소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들은 범행 전에 사냥을 나간다고 문자를 주고받고 훼손한 장기를 선물하고 그것을 받은 공범은 선물이 예쁘다 했다고 합니다.
주범인 김양의 아버지는 의사이고 엄마는 교사입니다. IQ가 140이나 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공범 박양의 집안도 큰 재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돈을 목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어린 소녀들이 작은 어린아이를 유인하여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 신체를 훼손하고 그것을 선물로 주고받는 이 끔찍한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소녀들 안에 악마가 크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 소녀들 안에 있다는 그 악마는 사실 모든 타락한 인간 안에 있는 짐승입니다. 그 짐승이 인간을 음란하고 사악하게 만든 뱀입니다. 그 뱀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난 타락한 악한 마귀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그 저주는 뱀에게 물린 그 결과입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말씀합니다. 이 간교한 뱀은 여자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강하게 부정하며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말합니다. 아담과 화와는 뱀에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한 그 말씀을 부인하고 불순종하여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뱀에게 물린 결과입니다. 어떻게 물렸습니까? 뱀의 던져주는 그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에 물린 것입니다. 뱀의 독은 이빨에서 뿜어져 나와 사람을 해치지지만 마귀는 독은 그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에 있고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를 멸시하게 하고 교만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게 하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에 타락한 인간은 음란하고 사악한 죄가 그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의 방황을 마치고 가데스를 출발하여 가나안으로 진군하려는 시기입니다. 가데스에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가데스에서 북쪽으로 진군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빠르고 편한 길입니다. 그 길은 왕의 대로로 불려 질 만큼 잘 닦여진 도로입니다.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간곡하게 그 길을 통과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에돔은 강하게 반발하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할 수 없이 가까운 길을 놔두고 에돔과 모압을 돌아서 광야로 들어가 우회하여 요단 동쪽으로 진군하기위해 다시 그 지긋지긋한 광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며 불뱀에 물려 고통 받는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본문 2-3절에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말씀합니다.
지난주에는 변화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 인자와 긍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가페’를 배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물려 타락한 인간은 변화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임이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밝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은 시체 옆에서도 밥을 먹고 심지어 그 시체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고 더 놀라운 것은 산 자식까지 잡아서 허기진 식욕을 해결하는 게 타락한 인간의 식욕, 욕망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타 죽은 형제들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땅이 갑자기 입을 열어 사람을 산채로 삼키고 닫는 그 저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마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그들은 전혀 요동하지 않고 광야 40년 내내 한결같이 원만하고 불평합니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40내내 원망과 불평을 달고 사는 것일까요? 교회에도 원망과 불평으로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버젓이 대놓고, 어떤 사람은 뒤에서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수군수군 했다고 말씀하는데 그 수군수군하는 것이 우리는 당신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불평입니다. 불평과 원망을 잘하는 사람은 그 증상을 고치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뱀에 물린 모든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인데 그것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게 된 인간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인간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되었다고 착각에 빠져 하나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의 사고는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한 인간에게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게 선한 것이 상대에게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안중근은 우리에게는 의로운 사람이지만 일본인의 시각에도 의사이겠습니까? 우리는 일본에게 역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만 월남파병 군군에게 민간인이 학살되어 그 패해와 진실을 요구하는 베트남 국민들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세계에는 힘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선악을 판단하시는 분은 유일무이하신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뱀에 물린 인간에게서는 끊임없이 그 타락한 본성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원망과 불평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판단으로는 가깝고 편한 길로 가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기뻐합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은 그들에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악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단순한 짜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은 그 교만한 마음에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하는 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뱀은 타락한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뱀에 물린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그 힘과 영광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뱀에 물린 타락한 인간의 인생입니다. 인간은 뱀에 물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었기에 이 세상의 가치와 영광이 되는 모든 것을 제물로 드려 자신을 숭배하는 자아숭배자로 타락했습니다. 자아숭배가 곧 우상상배의 실체입니다.
그 자아숭배자가 이 세상에서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을 불의로 정죄하고 악으로 판단하며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길로 인하여 뿔이 났고 그 악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은혜마저 멸시하는 죄악으로 일어났습니다.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성도는 알 수 없습니다. 그 구원의 길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고통스러운 먼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성도는 아무 일 없이 평안하게 잘 먹고 살만큼 잘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이삼일 앓다 멋있는 유언을 남기고 천국으로 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꿈은 미리감치 깨는 게 좋습니다. 그런 꿈을 꾸고 있다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낼 날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입니다. 성도는 그 가는 길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나는 이런 길로 가고 싶습니다. 이 길로 인도해 달라고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내가 가야할 길을 주님이 아시니 주님이 인도하는 그 길이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도 가기 원합니다. 고백하며 주님의 손을 잡고 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주님이 인도하는 그 길이 곧 선한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뱀에 물린 인생들은 하나님의 길과 그 방법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후회하며 씨도 뿌리지 못하고 먹을 것도 없던 광야에서 날마다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만나를 경멸까지 합니다. 그들은 40년간 심지도 뿌리지도 가꾸지도 않은 만나를, 그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하늘 양식을 매일 먹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양식을 하찮은 음식이라 불평하며 싫다고 합니다. 저는 밥을 50년 가까이 먹었지만 아직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빵은 주식이 아니어서 모릅니다만 신기하게 하루 세끼 50년을 먹어도 싫증이 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먹을 것도 없는 그 광야에서 은혜로 먹은 만나를 마음이 싫어한다. 불평합니다. 입에서 싫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인도하는 그 길과 방법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뱀에 물린 인간이 음란하고 악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정욕과 탐심의 독이 뿜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독성을 갖고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영적인 간음과 패역을 일삼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광야 생활의 첫 해에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으로 음란을 행하더니 광야 마지막 해에는 바알을 섬겨 2만 4천명이 죽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인 간음과 패역을 일삼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육적 간음을 죄로 정죄 받는 것을 원치 않듯이 교회와 성도들 또한 영적인 간음과 패역을 죄로 정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남자의 정욕이 여러 명의 여자를 소유하는 것이듯이 타락한 성도는 절대로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마귀의 세상을 곁눈질하다 눈이 맞으면 대놓고 음란을 행하고 나중에는 그것이 자랑이 되고 축복으로 인정됩니다. 결국에는 세상의 영광으로 자신의 자아를 영화롭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복 있는 사람으로 둔갑합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황혼에 젊고 예쁜 여자와 바람이 나면 처음에도 불륜으로 지탄을 받을 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로맨티스트로 인정받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와 성도들 안에 세상의 타락한 가치관이 그대로 들어와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세상의 축복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우상숭배의 기지가 된 것이 아닙니까? 성도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세상의 즐거움으로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죄를 죄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시대, 영적인 음란과 패역이 성도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감각 없는 자로 살아가는 이 시대가 말세입니다. 목회를 하시던 어떤 분이 신앙생활을 하려면 큰 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합니다. 제가 작은 교회를 섬기기 때문에 열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이 뭔지도 모르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 믿음이 세상에 보이는 그 환경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분명히 상관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외롭고 불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배우겠다고 여기에 오는 거라면 잘 오시는 겁니다. 종교적인 놀이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런 곳에 오지 못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외롭게 하면 안 됩니다.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섬겨야 비로소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가치하게 외면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광야에서 만나를 처음 본 이스라엘은 그저 놀랍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하찮은 것이 되었듯이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이며 영적인 은혜는 시간이 지날수록 타락한 성도의 삶에서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여러분에 하나님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가 소중하십니까?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데도 이런저런 핑계로 외면 받는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이 세상의 고난과 인생의 여러 가지 슬픔을 이기는 힘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말씀과 은혜를 멸시하는 그 음란과 교만함이 불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망과 불평을 하자 불뱀을 보냈습니다. 본문 6절에서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멸시하고 불평하자 불뱀이 나와 그들을 물은 것은 그들 안에 있던 그 사악한 뱀이 밖으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등에 붉은 줄무늬가 있는 광야의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던 뱀에게 이미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 인생들아! 너희들은 이미 간교한 뱀 마귀에게 속아 나를 대적하는 독사의 새끼들이 되었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 거룩한 자들에게 너희들은 독사의 새끼이며 마귀의 자식이라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인간은 뱀에게 물려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로 죄와 사망이 왔으나 타락한 인간은 뱀의 세상을 사랑하며 정욕과 탐심으로 자신을 숭배하다 멸망의 길을 갑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세상의 권세를 잡은 뱀을 영원한 불 못에 심판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 뱀의 거짓말에 속아 자신을 위해 살던 자들은 마귀를 섬기는 자들로 드러나 함께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뱀에게 물린 모든 인생은 결국 그 뱀으로 인해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뱀에 물려 고통을 호소하며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본문 7-8절에서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다마 그것을 보면 살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 고통 중에 회개하는 사람들이 성도가 되어 나옵니다. 옻나무에는 우루시올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이것이 알레르기를 일으킵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이 옻 순으로 닭을 삶아 목사님들을 초대하여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옻의 독성분인 우루시올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옻을 심하게 타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큰 고통을 줍니다.
사람들 중에는 간교한 뱀의 독이 그 안에 퍼져도 전혀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도 있고, 고통이 있어도 그 해독제를 찾지 못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장 19절에서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뱀에 물리면 아주 심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를 버리고 반역하여 죄악에 떨어지면 심판의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을 버린 그 영혼의 쓰라린 절망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남에 가슴에 대못을 박고 아무 일 없듯이 사는 인간들은 절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라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상처를 받았다고 원한을 품고 사는 것도 못합니다. 그 미움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주님의 십자가로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영광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등에 짊어질 십자가를 금 면류관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고 있는 인생이 성도라면 결국 나중에는 그 머리에 쓴 영광을 고통을 받고 벗어야 할 때가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고통스럽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던 사람이 그 자식을 사고로 잃고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 이제 내가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고백하고 물질을 사랑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고 그 가난의 고통에서 하나님 이제 내가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기도합니다.
죄와 사망의 고통으로 죽어가던 성도들을 살린 것은 장대위에 높인 달린 놋뱀입니다. 뱀에 물려 고통 받는 자들에게 그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그 독에서 해독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놋뱀은 이스라엘 성도들 안에 있던 불뱀이며 마귀에게 속아 타락한 뱀 같은 자아입니다. 그들은 뱀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합니다. 민수기 35장에서 ‘피 흘림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뱀에 물리고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은 그 자신이 직접 장대에 매달려 저주를 받음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나님의 진노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화될 수 없는 불가능한 자들을 그 거룩하신 은혜로 구원하십니다. 장대위에 높이 달린 놋뱀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인이 되어 저주를 받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합니다.
놋뱀이 뱀에 물려 타락한 성도들의 뱀 같은 자아를 대신하여 장대위에 달렸듯이 예수님은 뱀같이 음란하고 패역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와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뱀에 물려 고통 받으며 영원한 사망으로 죽어가는 성도가 그 저주에서 해독되는 구원의 길은 자신의 뱀 같은 자아를 대신하여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회개하며 바라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 안에서 나온 것이 결국 뱀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입니까? 나는 음란하고 사악함 뱀으로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간음을 일삼으며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반역하는 마귀의 자식으로 살아왔음을 깨닫고 그 고통을 회개하며 나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은 그 은혜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본문 9절에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쳐다보고 있습니까? 여전히 자신의 삶의 무대만을 바라보며 탐탁지 않은 소품들과 시나리오로 인해 원망하거나 좌절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사람의 무대와 소품을 부럽게 쳐다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뱀의 세상으로 자신을 섬기려는 자아숭배자의 소망 없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 안에는 아직도 뱀의 유혹으로 타락한 뱀 같은 자아가 주인으로 있기에 뱀이 권세 잡은 이 세상의 영광으로 그 자아를 숭배하고 싶은 것입니다. 뱀 같은 자아를 숭배하며 죄악을 배설하는 자들은 마귀와 함께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매단 사람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그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는 뱀 같은 옛 자아를 광야에 묻고 하늘에 속한 새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성도들이 정말 행복자입니다. 여러분은 행복자입니까? 그런 성도들의 입에서는 하늘에 올라가는 구원을 기뻐하는 찬양이 나오고 은혜를 노래하는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방심하면 안 됩니다. 악한 마귀는 택한 성도들이 잠자는 틈을 노리고 그 독을 뿜어대기 때문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사막을 아빠와 함께 여행하다 죽은 독사의 머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벌어진 뱀의 입에 손을 넣는 순간 죽은 뱀의 입이 닫히며 독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아이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긴급히 병원으로 가야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순간 죽은 것 같은 뱀은 다시 살아나 성도의 삶을 죄악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의지할 것은 자나 깨나 십자가에 달리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 은혜를 의지하고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