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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5장 36-40절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성자이신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나신 분으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버지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도 있게 하셨다고 할 때, 또한 모든 것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할 때 생명을 주는 문제도 그리고 심판하는 문제도 결코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분이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거기에는 조금의 불의도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여전히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성모독이 아니라 자신의 옮음을, 자신의 정당함을 증언해 줄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충분히 증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증언한다고 할 때 그 증언이 참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 자신이 자신을 증언함으로 그 증언이 참되다고 할 수 없는 것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자로서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증언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에 앞서 세례 요한의 증언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하기를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이렇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5:34) 분명 그가 증언한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비록 진리를 전한다 할지라도 세례 요한이 진리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례 요한의 증언이 진리이지만 진리에 대한 증언이 세례 요한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에 불과합니다. 종의 입을 열어 진리를 전하게 하시고, 그 진리가 증거 되어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 모든 일이 누구에게 달려 있는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체가 아니라 그를 세우신 하나님, 그분이 진리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한다고 해서 거기에 구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진리를 전하게 하셨기에 거기에 구원이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 요한에 대하여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세례 요한의 증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한때나마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빛으로 나아왔는가? 세례 요한을 통해 증언케 하신 진리로 나아왔는가?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 증거는 36절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7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처럼,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신 역사라고 표현합니다. 성자이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체시지만, 동일본체로서 동등하시고 동등하시기 때문에 영광과 권능에 있어 조금의 차이도 없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리고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이루실 수 있지만 자신이 이룬 것은 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신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성부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란 무엇인가?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신 것처럼 기적과 이적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과 이적의 역사는 예수님만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도 행하고 앞서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행하신 바가 있습니다. 심지어 거짓 선지자들 역시도 행한다고 말씀하신 바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과연 기적과 이적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증언하기에 충분한 것인가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 분별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성경은 분명 기적과 이적이 사도의 표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고후12:12).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런 기적과 이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과 이적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신 역사라 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6장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때(요6:29) 믿도록 만드시는 역사, 다시 말해 복음의 역사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신 역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기적과 이적의 역사에 대하여 분별이 요구된다고 말씀드렸지만, 모든 기적과 이적은 사실 말씀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왜 사도의 표로 기적과 이적을 행하도록 하셨는가? 말씀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14장 3절입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한글성경은 ‘두 사도’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하게는 ‘둘’로 표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의 전도 여행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나바의 경우 사도로 분류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두 사람이 이고니온이라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표적과 기사를 행함으로 은혜의 말씀을 증언했다고 말씀합니다. 표적과 기사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은혜의 말씀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도 동일하게 증거 하는데,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20절에서는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 없는 능력, 말씀 없는 기적과 이적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적과 이적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할 때(딤전4:5) 말씀이 없는 기적과 이적은 거룩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과 무관하게 기적과 이적만 주목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과 10절입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과 이적은 자신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내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적과 이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증하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께 주셔서 행하게 하신 기적과 이적 그리고 말씀 사역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었는가? 그가 행하시는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14장 28절에 보면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가 분명 있지만 그런 분명한 증거도 거절할 정도로 그들의 마음은 완악하고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더 큰 두 번째 증거를 말씀하시는데, 37절 상반부입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가깝게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졌지만, 이어지는 말씀에서 성경에 대하여 말씀하기 때문에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증언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구약 선지자의 증언을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증거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가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증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증거 하기를 기뻐하셨는가?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을 통해 증거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해 증거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판명성에 있어서는 구약보다는 신약이 더욱 분명한 형태로 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경우, 그리고 사도들의 경우 예수님을 실제로 본 자들로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선지자보다 세례 요한이, 사도들이 더욱 판명하게 본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누구로부터 세워진 자들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진 자들입니다. 때문에 구약 선지자든, 세례 요한이든, 사도든 하나님의 증언보다 크지 않습니다.
다만 세례 요한의 증언이 진리인 것처럼 구약 선지자들도 진리만 증언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증거라고 해서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이 뭔가 모자라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의 증언, 세례 요한의 증언, 사도들의 증언은 다 진리로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판명성의 차이일 뿐입니다. 구약은 그림자로 알리신 방식이라면 신약은 그림자가 실체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이 아무리 진리라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보다 크지 않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이 주체라는 측면에서, 또한 하나님이 유효성의 주인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만이 가장 큰 증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를 말하고 있지만 아버지께서 나를 친히 증언하셨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부터 아버지께서 친히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셨지만 37절 하반부를 보시면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그 형상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처럼 그 형상도 보지 못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나타내신 바에 대하여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듣지 못한 자로, 보지 못한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에게 형상이 있어서 본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 없지만 믿음 안에서는 본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히11:1). 이 믿음으로 선진들은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의 경우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하나님 지식이 들려졌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졌지만 듣지 않는 자로 있었습니다. 실제로 형상이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마치 형상을 나타내신 것처럼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사6:9).
더욱 분명하게 38절에서는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당시 유대인들 마음에 새겨졌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 마음속에 거하였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올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까지 보내십니까? 말씀 자체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4절로 올라가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말씀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이 증언했고, 또한 사도들을 통해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는가?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지만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39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예수님 당시 성경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 유대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것인데, 단순히 이 땅에서의 생명이 아니라 영생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영생을 얻도록 하는 데 있으며, 너희도 그것을 위하여 구약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유대인들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영생은 율법을 통한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레위기 18장 5절에서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율법을 통한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율법은 그대로이지만 사람이 그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도록 한 것이 아담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우리처럼 원죄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죄가 전혀 없는,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대상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조차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순종할 수도 있고,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였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마음에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불순종을 택했던 겁니다. 아담조차 하나님의 작은 명령조차 행하지 않았는데, 원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 가운데 누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고 말씀합니다.
보통 구약을 율법으로 부르지만 율법만 기록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율법과 함께 복음의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할 때 구약에는 율법만 기록되어 있는 게 아니라 복음의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복음의 내용을 그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율법서 안에서도, 또한 시편을 비롯한 시가서 안에서도, 구약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안에서도, 나아가 그런 역사 속에서 활동한 선지자들의 글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없는 영생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율법으로, 신약은 복음으로가 아니라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복음으로,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구약 성경을 연구했지만 구약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영생을 위해 성경을 연구했지만 영생을 위한 유일한 길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은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물론 여기에는 성경에 대한 무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무지만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완악함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끊임없는 고집,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고자 그런 고집이 영생이라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0절과 1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모두가 영접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경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그를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가셔서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여기서 우리는 잠깐 3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할 부분이 있는데, 예수님 당시로 하자면 분명 구약 성경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로 생각할 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란 말씀을 단지 구약에만 적용될 수 있는가? 디모데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고 할 때도 ‘모든 성경’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 신약이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이 아닌 구약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그것만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신구약 통일성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단 성경은 영생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구약 성경도 마찬가지고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성경만이 영생을 위한 유일한 길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책도 영생을 위한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영생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알려주신 책은 유일하게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다면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판명성의 차이일 뿐입니다. 구약 성경의 경우 영생을 위한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지만 그것을 희미하게만 보여줍니다. 반면 신약 성경의 경우 좀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구약의 경우는 그림자로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신약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를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와 실체라는 차이 때문에 구원의 효력, 영생의 효력이 달라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또한 그런 방식으로 구원과 영생을 베푸시는 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구약 통일성은 초기 교부들에게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인데, 고린도후서 4장 13절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란 말씀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주석에 보면 “신구약의 차이는 실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시대(경륜)에 따라 변한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마니교에 대한 반대 논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신구약은 이름만 다를 뿐 저자로서 저들 안에서 말씀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믿음의 같은 성령, 신구약 시대의 같은 포도원 주인으로서 같은 한 하나님, 같은 한 입법자로서부터 나왔다는 점에 대한 강조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때 저들 안에서나 지금 우리 안에서나 성령의 은혜도 같고 믿음의 능력도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요, 교의도 같고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비록 다양한 방식일지라도,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같은 성령이 모든 것을 경륜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해가 이후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의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의 직접적인 기틀이 되는데, 칼빈의 경우 우리가 지금 살피고 있는 기독교강요 1539년판 제7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데 이 유사점과 차이점은 한 마디로 서둘러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은 옛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그 본질과 진실에 있어서 우리의 것과 너무 같아 서로 동일하며, 다만 분배된 순서에서만 다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기독교강요 2판 : 프랑스어 초판, p.504) 여기서 분배된 순서란 ‘다양한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식들’로 이해할 수 있는데,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의 내용과 같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구약의 경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되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면, 신약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방식이란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고 해서 신약과 다른 교리를 가르쳤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는 다를지라도 시대마다 같은 교리를 가르치셨는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일관성’이 빛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칼빈은 그의 갈라디아서 4장 주석에서 “옛 조상이나 우리는 ‘한 믿음, 같은 중보자, 한 아버지 하나님의 부르심, 같은 영의 다스림, 같은 교리’를 받았으므로, 구약의 성도들이나 우리(신약)나 실체에 있어서 차이가 없고 우연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동일한 정신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제7장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에 대한 고백 5항과 6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먼저 5항입니다. “이 언약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에 다르게 실행되었다(고후3:6-9). 율법 아래에서 이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진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 유월절 양,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실행되었다(히8-10장, 롬4:11, 골2:11,12, 고전5:7). 그것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택자들을 약속된 메시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지도하고 세우기에 그 때를 위해 충분하고 유효적이었고(고전10:1-4, 히11:13, 요8:56),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택자들은 완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졌고, 이 언약은 구약이라 칭해진다(갈3:7-9,14).” 그리고 이어 6항에서는 “복음 아래 실체이신 그리스도가(골2:17) 나타나졌을 때, 그 안에서 이 언약이 실행된 규례들은 말씀 설교 및 세례와 성찬의 성례들의 실행이다(마28:19,20, 고전11:23-25). 그것은 수적으로는 보다 적을지라도 보다 단순하게 그리고 외적 영광이 덜하게 실행된다. 그러나 그것들 안에서 보다 충만하고 확증적이며 영적으로 효력있게(히12:22-27, 렘31:33,34) 모든 민족들, 즉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마28:19, 엡2:15-19) 이 언약은 제시되며 신약이라 칭해진다(눅 22:20).”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6항 마지막 부분에서 “그러므로 실체에 있어서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륜들 아래 하나이며 동일한 은혜언약이 있다(갈3:14,16, 행15:11, 롬3:21-23,30, 4:3,6,16,17,23,24, 시32:1, 히13:8).”고 고백합니다.
반면 로마 가톨릭 신학은 달리 생각합니다. 구약의 약속은 일시적이었지만 지금은 하늘적이라고 말하면서 저때의 계명들은 좀 더 외적인 규정들이지만 지금의 것들은 완전한 규정들이요, 손으로 된 규정일 뿐만 아니라 영혼으로 된 규정이며, 그때 성례들은 단지 비유적인 것들이고 지금은 은혜를 수령하는 것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과 함께 구약 성도들은 직접 하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연옥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 비로소 하늘로 데려감을 얻는다는 입장을 펴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신학의 언약론에 따라 일부 소키누스주의자들의 입장과 코케이우스의 언약신학을 분명히 부정하는데, 코케이우스의 경우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죄 용서는 죄들을 못 본 체 간과하는 정도라면,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죄 용서는 죄를 제거하는 용서라고 했습니다. 코케이우스는 분명 소키누스나 펠라기우스,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처럼 행위언약이 죄로 말미암아 폐지되고 이스라엘도 은혜언약 아래 있었다는 입장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수를 저질렀던 겁니다. 마치 구약과 신약 백성의 죄 사함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겁니다.
구약 성도와 신약 성도의 구원이 다르지 않습니다. 죄사함도 다르지 않으며, 영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영생을 위한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한 분외에 다른 것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언약으로 주신 하나님도 한 분 외에 다른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한 분 하나님, 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한 믿음, 한 소망, 한 교회, 하나의 구원의 서정 그리고 하나의 교리 등 구약이나 신약이나 전혀 다르지 않는 내용으로 있을 뿐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앞서도 말했지만 판명성의 차이일 뿐입니다.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지만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결코 구원이, 영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갈 때만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그러하고, 38년 된 병자의 구원과 영생이 그러하고, 구약 모든 하나님의 참된 백성의 구원과 영생이 그러합니다.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와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신 구약 말씀에 대하여 살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적과 이적이 말씀을 섬기는 것이라고 할 때 말씀에 대한 불신앙은 어떤 기적과 이적을 보여준다고 해도 결국 믿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죽어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갑니다. 이때 지옥에 간 부자가 형제들을 생각해서 간청을 합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형제들에게 가 복음을 전하면 믿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답변이 무엇입니까?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31) 왜 기적과 이적이 말씀을 섬기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기적과 이적이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과 이적이 더 분명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과 이적보다 ‘더 확실한 예언’은 성경밖에 없습니다(벧후1:19-20 참조). 때문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 말씀을 통해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한다 할지라도, 기적과 이적의 역사를 보여준다 할지라도 결코 믿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특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면’이라고 할 때 구약을 의미합니다. 판명성에 있어서는 구약보다는 신약이 더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도 핑계할 수 없도록 하신다면 신약의 말씀은 더더욱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유대인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보고 있습니다. 그의 기적도, 또한 그의 말씀도 직접 듣는 자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완고하고 완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저들의 불순종이 저들이 악으로 있습니다. 그럼 38년 된 병자나 구약의 성도, 신약의 성도는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물론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순종은 우리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