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易 上編(주역 상편).
4.山水蒙(산수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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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매한 자가 어떻게 하면
난세를 뚫고 나가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리고 있다.
몽매하다는 것은
내가 뭘 아직 모르고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훌륭한 스승을 찾아 먼저 배워야 한다.
乾卦(건괘)가 주도적 리더쉽을 알려주고,
坤卦(곤괘)가 보조적 리더쉽을 알려준다면,
屯卦(준괘)는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보여주고,
蒙卦(몽괘)는 지속적인 번영을 위한 교화를 보여준다.
▣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몽 형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初噬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초서고 재삼독 독즉불고 이정
[풀이]
어리석고 몽매한 것은 형통하다.
내가 동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구하러 온다.
처음 시초점을 치면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물으면 모독하는 것이 된다.
모독하면 알여주지 않으니 바르게 지켜가야 이롭다.
[해설]
蒙(몽)은 덩굴풀의 일종이다.
蒙(몽)은 무성하면 나무를 덮어 그 밑이 어두워지니
'컴컴하다, 덮다'의 뜻이 더해 蒙昧(몽매)함이다.
屯(준)처럼 갓 태어나 경륜이 없으니 蒙養(몽양)이라 하고,
그런 蒙(몽)은 혼미한 가운데[섞여] 蒙(몽)을 넘어
지혜를 밝힐 것이다.
蒙卦(몽괘)는 重地觀卦(풍지관괘)로부터 오는데,
風地觀卦(풍지관괘) 때는 큰 艮(간)의 덮개가
아래 坤(곤)의 백성을 덮고 있었다.
推移(추이)하여 蒙卦(몽괘)가 되어서도
그 덮음이 고쳐지지 않으니,
이것을 蒙(몽)이라 한다.
또 蒙卦(몽괘)는 地澤臨卦(지택림괘)로 부터 온다.
震(진)의 싹이 坤(곤)의 흙을 뚫고
지면으로 비로소 나올 적에,
그 새싹을 머리에 이고 있으면서
그 형세가 아래로 드리우고 있으니,
그것이 덮고 있는 무성한 풀이다.
사물이 생겨날 적에는 반드시 어리다.
한편 蒙卦(몽괘)는 屯卦(준괘)의 도전괘이기도 하다.
예로 정치적 혼란기가 屯卦(준괘)라면
그 교화의 시기는 蒙卦(몽괘)로,
水雷屯(수뢰둔)이 제후를 세우는 임금의 도라면,
蒙(몽)은 童蒙(동몽)이 스승의 도를 구하고 있다.
산 아래 땅속에서 샘 솟듯 흘러나오는 물,
몽[山下出泉蒙,산하출천몽]은 한시도 쉼없이
솟아나와 내를 만들고, 강을 이루고,
마침내 큰 바다로 흘러간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방울의 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바다에 이르는 것을 보면 과연 지혜의 자식이라 할 수 있다.
고로 蒙卦(몽괘)는 어릴 때부터,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지혜를 쌓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동몽선습』과 『격몽요결』은 몽매한 자에게 천지의 이치로
개몽하고자 하는 開蒙頭里(개몽두리)이다.
아래 문왕의 괘사는 바로 그런 개몽두리를 담은 메세지이다.
"몽매도 형통하다.
스승인 내가 어린 제자에게 가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찾아와 배움을 청해야 한다.
배우고 가르침이 그런 것이다.
동몽이 배우려고 나를 찾아오면
때론 이끌어주고 권면하면서 흔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처음 물으면 알려주고,
두세 번 물으면 모독하는 꼴이 되어,
모독하면 알려주지 않으니,
蒙(몽)의 도를 바르게 지킴이 이롭다."
다음은 공자가 밝힌 彖傳(단전)이다.
"산기슭 아주 작은 샘에서 흐르는 물줄기 蒙(몽)은
가냘프고 의지할 곳이 없다.
그렇지만 그 蒙(몽)이 점차로 시내와 강을 이루어
끝없이 넓은 바다로 나간다.
그 까닭은 본시 지혜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蒙(몽)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훌륭한 지도자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童蒙求我,동몽구아].
단, 선생이 동몽을 가르치기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匪我求童蒙,비아구동몽].
몽매한 자가 스승의 도움을 받아 바르게 잘 길러진다면
성인의 공덕을 지닐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스승의 가르침을 구하는 몽매한 자가,
스승을 의심하면 결국 자신마저 모독하는 결과를 낳는다.
고로 몽매한 자의 도는 바른 덕을 길러서,
장차 성인의 길을 회복함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이 맑아야 달이 도장을 치고
[如水淸, 方可印月.여수청, 방가인월],
거울을 닦아야 원래 밝고 맑은 거울을 볼 수 있듯이,
어리고 몽매한 자는 순진무구한 자세로
배움을 청해야 이롭다[利貞,이정].
예로, 판단을 구하기 위한 점을 치는 경우도
성심성의를 다하여 점을 친다면 반드시
진실이 나타난다[初噬告,초서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점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치면[再三,제삼],
이는 점의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瀆,독].
가르침을 의심하는 자를 가르치는 일은,
결국 스승까지도 모독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瀆則不告,독즉불고].
고로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 함은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易(역)에서
'初噬告, 再三瀆, 瀆則不告. 초서곡, 제삼독, 독즉불고]'라
한 바이다" 고 하였다.
蒙(몽)이란 사물에 가려져 있을 뿐,
그 가운데는 분명히 올바름이 있다.
"가려짐이 아무리 심하여도 끝내는
그 올바름을 없애지는 못한다.
무릇 자신의 가려짐을 깊이 근심하지 않으면,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는다.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으면 正心(정심)이 이기지 못하며,
正心(정심)을이기지 못하면 내가 비록
그에게 가르쳐준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묻는 점에 가르쳐준다'는 것은,
묻는 그에게 덮여 있는 것을 벗겨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는 한 번에 벗겨내 준다.
고로 '時中(시중)'은 성인이 그를 계발시킬 만하면
계발을 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그가 正心(정심)을 길러서
스스로 이겨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의 공적이다.
공자는 몽매한 자에게는 올바른 도를 길러
장차 성인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공로,
즉 성인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활은
스승에게 있다고 하였다[蒙以養正 聖功也,몽이양정 성공야].
彖曰(단왈)의 주석을 보면
蒙卦(몽괘)가 臨卦(임괘)와 觀卦(관계)로부터 왔음을
說證(설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