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28-기타)_#8-1(A~C) Albéniz,Allegri, Esther Abrami, Badarczewska,Barber,Boulez,Bruch, Busoni, Canteloube,Chabrier,Charpentier, Cimarosa,Corelli, Cortág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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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삭 알베니즈(Isacc,Albéniz,1860~1909 스페인) 칸프로돈에서 세관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 스페인의 작곡가. 어릴 때부터 음악의 천재 소년으로 주목을 받고, 또 피아니스트로서 각지를 연주 여행했다. 그의 콘서트 경력은 9살 때 아버지가 아이작과 그의 누나 클레멘티나를 데리고 스페인 북부를 순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신화는 열두 살 때 알베니즈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하는 배에 밀항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쿠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콘서트를 연 후 리버풀, 런던, 라이프치히를 여행했습니다. 15세 때는 이미 전 세계에서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이 아니며, 알베니즈는 연주자로서 세계를 여행했지만 세관원으로서 자주 여행해야했던 아버지와 동행했습니다. <Wikipedia> 파리에서 마르몽텔에게 사사, 라이프찌히에서 야다스존과 라이네케에게, 브뤼셀 음악원에서 헤바르트 등에게 정식으로 작곡을 사사했으며, 한 때 리스트에게 배우기도 했다. 20세 때부터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유럽 각지를 연주여행하여 명성을 확립했다. 또 스페인의 민속 음악에 의한 다수의 피아노 곡을 작곡했고, 1892년 이후는 런던과 파리에 살면서 작곡에 전념했다. 그는 자기의 연주회의 프로그램을 장식하기 위해 250곡 정도의 피아노 소품을 썼다. 그것은 특징 있는 스페인의 각 지방의 리듬과 민요를 소재로 삼아, 스페인의 독특한 기타의 서법에 의한 것인데, 이것에 의해 민족 음악의 확립을 이룬 공적은 크다. 만년에 작곡된 《이베리아》는 4권 12곡으로 된 피아노곡으로, 드뷔시의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민족적인 색채가 넘쳐 있는 뛰어난 명곡이다. 알베니즈는 근대 스페인이 낳은 대표적인 작곡가임과 동시에 또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알베니즈는 1909년 5월 18일 프랑스 남서부 라보르드의 캄보 레뱅에서 48세의 나이로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기 불과 몇 주 전, 프랑스 정부는 알베니즈에게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는 바르셀로나 몬주익 공동묘지에 묻혔다.
▲ 주요 작품 피아노 모음곡 《스페인》(작품 165), 모음곡 《스페인의 노래》(작품 232), 모음곡 《이베리아》 4권(1905~09) 등이 있다.
(2)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 1582경~1652) 158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1591년 로마에 있는 로마에 있는 프란체시(S. Luigi del Francesi) 합창학교에 들어가 1596년 변성기로 소프라노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까지 머물렀다. 1628년 교황청 외곽의 페르모에 있는 성당에서 가수 겸 작곡가로서 활동했으며, 47세였던 1629년에 교황 우르바노(pope Urban) 8세에 의해 로마 시스티나(Sistine Chapel) 성당의 콘트랄토 가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노래 뿐 아니라 합창단이 부를 노래를 작곡하는 데에도 열심히 이었다. 그런데 그의 종교 합창곡들은 17세기의 곡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이었던 카톨릭교회의 지침에 따라 르네상스 폴리포니(다성음악) 스타일로 작곡되었다.그의 대표곡이라할 수 있는<미제레레>역시 마찬가지이다.
(3) 에스터 아브라미(Esther Abrami, ??~??프랑스)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전도 유망한 작곡가·연주가이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Wikipedia>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음반 발매와 일부 애호가들의 블로그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녀의 작품 중<No. 9 Esther’ Waltz>가 KBS Classic FM라디오에서 발표한 2021년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 랭킹TOP 10! 에 랭킹 없이 별도로 추가되어 있기에 여기에 소개합니다.
(4) 바다르 체프스카(Badarczewska,Thekla : 1834~1861폴란드) 바다르체프스카는1834년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1857년 육군 대위인 바라노프스카(Jan Baranowska)와 결혼하여9년 동안에5명의 아이를 낳고, 1861년에 사망하였다.남편 바라노프스카는1857년에 제정 러시아 황제로부터3등 스텐라우스(Stainlaus)훈장을 받았으나,바다르 체프스카가 죽은2년 후에1월 폭동으로5명의 아이를 다리고 타슈켄트로 이주 했다. 이 곡은 그녀가18세 때에 작곡한 곡으로 그 동네 고아원의 후원자인 마키에비츠(Anna Makiewicz)에게‘Vals pour le Pianoforte’라는 곡명으로 헌정되었다 (5) 바버(Samuel Barber,1910~1981미국) 그는1910년에 미국 팬실바니아주의 웨스트체스터 출생하였다.그의 백모는 미국의 위대한 콘트랄토인 루이즈 호머였고,작곡가로 알려지기 전 그 자신도 재능 있는 성악가로 인정받았다. 커티스음악학교를 졸업한1932년에 서곡「욕지거리 학교」로 인정을 받고, 1935년 로마에 유학하였다.로마 체류 중에 그의 초기의 대표작「1악장의 교향곡」(1936),「현악을 위한아다지오」(1936)를 작곡하였으며, 1937년에 작곡한「관현악을 위한 에세이」는 토스카니니에 의해 초연되었다. 그의 작풍은 대체로 온건한 편이지만 그 속에 미국의 현대생활을 반영한 기지와 신선미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밖의 주요작품에「바이올린 협주곡」,「제2교향곡」(1944),오페라「바네사」(1958),「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1966)그리고 발레음악「미디아」(1946)등이 있다. (6) 불레즈(Pierre Boulez,1925~2016,프랑스) 1925년에 출생한 피에르 불레즈는20세기 음악 거장 중의 하나로 작곡가,지휘자,주최자로서의 활동이 유럽의 음악계에 각별히 깊은 영향을 미쳤다.그의 초기 작품들은 음렬주의 기법들을 고수하지만,곧 더 유연하고 극적인 작곡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그 유명한「주인 없는 망치」(1954)를 탄생시킨다.후에 그는「주름 속의 주름」,「전례」에서와 같이 한정적인 선택 요소와 함께 전자 공학을 이용하였다.이러한 작업 방식은1970년대와1980년대에 신개념의 음악 창작과 탐구를 위한 음악·음향연구소IRCAM에서의 작품 활동에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까다로운 청각의 소유자였던 그는 지휘자로서도 성공적 활동을 펼쳤다.특히 명확성이 최고 중요시 되는 작품에서 그의 활약은 컸다. (7) 브루흐(Bruch,Max 1838~1920,독일) 1838년1월6일에 프러시아의 수도 쾰른에서 태어났다.가수이자 음악선생이었던 어머니 덕분에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를 배웠으며 본에서 브라이덴슈타인으로부터 음악의 기본교육을 받았다.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14세 때 모차르트협회에서4년간 장학금을 받게 되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힐러와 라이네케에게 작곡을 사사하였다. 1865년부터5년간 코블렌츠의 연주협회 지휘자에 이어 존더스하우젠의 궁정악단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880년~1883년에 영국의 리버풀교향악단 지휘자로 있다가 귀국 후1883∼1890년에는 브레슬라우 연주협회장을 지냈고, 1891∼1910년에는 베를린 예술아카데미의 교수 겸 작곡부장을 역임하였다.그의 작풍은 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았는데,철저한 낭만주의 스타일로 아름답고 뚜렷한 멜로디와 리듬,긴장감과 낭만 넘치는 풍부한 색채감 그리고 이론으로 무장한 자신감 넘치는 오케스트레이션에 그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g단조」를 손꼽을 수 있겠는데 비르투오소적인 연주효과를 요구하는 곡으로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기본 레퍼토리이고,바이올린과 하프와 관현악을 위한「스코틀랜드 환상곡(Schottische Phantasie」은 환상적인 감미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민요가 많이 등장한다.또한 관현악 반주의 첼로독주곡「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유태교의 옛 성가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종교적 정열과 동양적인 비애가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8) 부소니(F.Busoni,1866~1924 독일)
(9) 캉틀루브(Canteloube, 1879~1957프랑스)
(10) 샤브리에(Chabrier, Alexis Emmanuel 1841~1894프랑스) 프랑스 근대음악의 선구자인 샤브리에는1841년1월18일 프랑스의 앙브리외에서 태어나, 1849년 파리에서 타계했다. 1861년부터 내무성 관리로 일하다가1880년 그의 나이39세 이르러서야 음악에 투신하였으므로 음악가로서의 생애는 극히 짧은 편이다.그러나 프랑크 등과 함께 열렬한 바그너주의를 제창하며 활약한 업적은 크다. 바그너에 심취하였으나 작품은 바그너의 영향보단 본인의 독자적인 작품을 창작하여,프랑스 인상주의 음악 확립에 기여하여 후에 드뷔시 등의 작곡가와 라벨 등 프랑스6인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1) 샤르팡티에(Charpentier, gustave,1860~1956) 1860년6월25일 프랑스의 로렌주 뒤즈에서 태어나, 1881년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고, 1885년 마스네의 작곡과에 들어가1887년 칸타타「다동」으로 로마대상을 획득했다.그 규정에 따라 이탈리아로 유학했을 때 유명한「이탈리아의 인상」을 만들었다.후에 마스네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되었고, 1902년‘부인 근로자 협회’를 창립하여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음악을 통한 문화 운동을 했다. 1912년에는 마스네의 뒤를 이어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그의 음악은 로맨틱하고 감상적이며,마스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음악의 자연주의’라고도 할 만하며,프랑스 음악이 낭만파에서 인상파로 옮겨 가는 시대의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은1900년에 초연된「루이즈(Louise)」인데,직업 소녀와 예술가의 로맨스를 다룬 이 곡은 몽마르뜨 언덕의 시정·색조·충실한 생활 등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으로,이른바 음악에 의한 파리의 찬미라고 할 수 있다. (12)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 1749~1801이탈리아) 18세기의 이탈리아오페라 부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로시니에게 전승(傳承)한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남다른 악재(樂才)를 보였으므로나폴리의 음악원에 입학이 허락되어 여기서 이탈리아 여러 대가의 성악 양식을 완전히 대성공을 거두었으며,일약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명성이 높아짐몸에 익혀1772년, 22세로 음악원을 졸업하였다.그 해에 발표한 오페라로 에 따라 국외로부터의 초빙이 있어1787년37세로 러시아의 여황제예카테리나2세의 궁정 작곡가로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1791년 러시아에서 귀국하는 도중오스트리아황제의 초청으로살리에리의 후임으로서 빈 궁정악장이 되었다.여기서 걸작오페라 부파<비밀결혼>을 써서 창작활동의 정점에 달하였다. 1793년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의 궁정악장에 취임하였다.그 뒤 공화제혁명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금됐다가1800년나폴리에서 추방되었다.감금되었을 때 건강을 해친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1월11일베네치아에서 급사하였다. (13)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이탈리아)#1392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는18세기 초의 음악 전반에 충격을 주었으며 바이올린 연주에 처음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코렐리는 볼로냐와 라벤나의 중간 쯤에 위치한 후지냐노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공하기까지의 상세한 과정은 알 수 없으나13살 때부터 볼로냐의 음악을 이끌던 조반니 벤베누티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이 악기의 매력에 사로잡혀 훗날 로마를 무대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1687년 코렐리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주최한 로마 음악축제의 감독을 맡으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몇몇 군주와 귀족들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가장 큰 후원자는 추기경 피에트로 오토보니였다.그는1689년에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8세의 조카 아들이다.오토보니 추기경은 코렐리와 친교를 맺고 자신이 만든 악단의 감독으로 그를 임명했다.코렐리는 추기경의 궁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작곡을 하거나 로마 사교계의 명사 모임인‘월요 콘서트’에 나가 가르치거나 지휘를 했다. 코렐리는 근면하고 겸손했다.옷장에는 불과 몇 벌의 옷밖에 없었다.주변에서 아무리 권해도 마차를 타는 법이 없었다.헨델은“그가 좋아하는 취미란 돈이 안 드는 그림 감상뿐이었다.”고 회고했다.실제로 그는 대단한 그림 콜렉터였고 미술품 감식의 권위자로도 평가를 받았다.코렐리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연주 요청을 쉴 새 없이 받았다.그는 언제나 그들에게 공손했다.어느 날 오토보니의 궁에서 조촐한 연주회를 가졌을 때였다.한 손님이 옆 사람과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그러자 코렐리는 바이올린을 놓고 청중석으로 들어가 앉았다.까닭을 물으니“제 연주가 저분의 대화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4) 코르타가(Ernesto Cortágar,1940~2004멕시코) 에르네스토 코르타가는 멕시코시 출신의 작곡가,편곡가 겸 피아니스트이다.아버지는 멕시코 작가 및 작곡가 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을 지낸 작곡가였다. 그가13살 때에 아버지가 타계하자 음악 공부를 그만두고 영화 음악으로 전향했다. 1958년에는 불과18세의 어린 나이로 콜롬비아의 카르타게나 국제 영화제에서<melody Rio de Sueños>로 남아메리카 영화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그는500여개에 이르는 영화 음악으로1999~2001년에 걸쳐mp3.com의 제1인자가 되었으며,이 기간 동안에14백만 다운로드를 달성하였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멕시코로 돌아와 탬피코(Tampico)에 정착하여 살다가 암으로 2004년에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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