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직후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매달 9일 갑오 장날이 되면 우리집은 잔치날이 됐습니다. 그날 아침이면 당숙들과 당숙모들이 오시고 머슴형들은 새벽같이 뒷담넘어 텃밭의 돼지막에서 3백근 짜리 돼지를 골라 잡아서 머리 족발 내장들을 손질하고 마당에선 차일 치고 멍석 깔고 큰상들을 내놓는등 분주했어요.
시안의 한겨울에는 사랑채 아궁이에 솥을 걸고 잔치도 방바닥이 뜨끈뜨끈한 사랑채에서하고... 봄부터 가울까진 남쪽 담장 곁에 큰 솥 두 개를 걸고 넓은 마당에서 했어요.
당숙모들은 밥 쌀을 안치고 쌀을떠낸 물로 기름이 둥둥뜨는 뻘건 돼지 장국을 끓였습니다. 술도가의 배달부 아저씨들은 자전거로 싣고 온 막걸리를 술독에 가득 채웠지요.
점심이 되기전부터 장보러 온 시골사는 먼 친척들이 몰려오고.. 속인들은 그 가족까지 몰려와서 마당이 왁자지껄해졌습니다. 친척들은 좀 얌전하나 속인들은 모두 한 성질 하는 사람들이라서 술이 취하면 싸움이 벌어지니 큰당숙은 술단지 옆에 앉아 막걸리를 한사람당 딱 한사발씩만 줬어요.
그날은 모두들 특히 아이들과 부인내들이 배불리 점심을 먹었습니다. 당시는 니나내나 배불리 먹지 못하는 시절이라서 반찬이라곤 배추김치와 무우석박지 뿐이고 돼지의 내장등 부산물만(살코기는 봉송에 넣어서) 넣고끓이 뻘건 장국이지만..
오직 배불리 먹는게 중요한 시절이라서 다들 누구 눈치보지 않고 양껏 먹었습니다. 집에가도 저녁밥을 안먹을 정도로 하루종일 먹었습니다. 심지어 다음날 아침밥도 안먹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면서 물을 못먹게 했어요. 아이가 물을 달라하면 “물을 먹지 말고 밥을 먹어라 밥으로 뱃구래를 채워라”며 물을 못먹게합니다.
장국솥옆에 앉아 장국을 퍼주다 그 모습을 본 큰당숙모가 “애기 채한다 물 먹여라”하면 마지못해 물을 조금 먹이곤 했어요. 당시는 먹는게 그만큼 간절했고 배고픈게 호랭이보다 무서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뻘건 장국은 기가막히게 맛있어요. 나는 국민학교 때 부터 마당에서 속인 아재들과 섞여앉아 장국을 먹었어요. 초 중학교 때 학교가는 날도 점심시간이면 우리반의 고단한 친구들과 집에 달려와서 속인들과 섞여앉아 먹었습니다. 맥가이버 형님도 마당에서 먹었어요. 형님과 나는 그 때부터 속인들과 친했습니다.
손님들은 하루종일 대문을 들락날락하며 9일 갑오장날을 보냈습니다. 맘껏 먹고 나가서 장을 보고는 또 들어와서 먹고.. 말하자면 9일 장날이면 가난한 먼 친척들과 속인들은 남의 눈치나 굶주림에서 해방된 날이었어요. 지금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보리를 수확하기전인 3~5월의 그 유명한 보리고개엔 굶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먹는게 고단한 계절인 3.4.5.월 3개월은 9일날 잔치후 보름만이 24일의 장날도 똑같이 잔치를 했습니다.
떼거리 가 없어도 용기내어 말하지 못하고 그냥 굶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들이 눈치보지말고 주눅들지말고 그날만은 편하라는 의미일 겁니다. 밥과 장국이 바닥나면 밥을 몇 솥 더하고 장국을 몇 솥 더 끓여냈습니다. 그래서 맘껏 먹어도 되고 맘껏 떠들어도 되는..맘껏 웃어도 되는..기죽어 사는 사람들이 고단함에서 해방된 날 9일의 갑오 장날이었어요 배곯는 사람들이 맘껏먹는게 보기 좋았는지 아버지는 잔치에 들어가는 돈은 아끼지 않은듯합니다. 또 그 정도는 아버지의 재정이 충분히 뒷받침 됐기에 많은 사람들이 배불렀을 겁니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일찍 집에서 나가서 종일 사무실에 계셨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신이 집에 계시면 모두들 편히 먹고 놀지 못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어요.
언젠가 아버지는 뭔가 급한일이 있는지 집에 들어오셨는데... 마음을 풀어헤치고 멍석에 앉아서 유쾌하게 먹고 떠들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인사하는데... 아버지는 이미 마당과 정원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셨는데도 다들 엉거주춤하며 조용해져요.
아버지는 아마 그게 싫었던듯합니다. 당신이 집에 있으면 그들이 맘놓고 떠들고 즐기지 못하는 불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급히 들어 온 그 날도 아버지는 급히 나가셨어요. 그러자 다시 왁자지껄하며 마당이 시끄러워요. 언젠가 아버지는 큰당숙에게 ''저들은 평생 손님들을 대접했을 뿐 자신은 손님이 되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장날만은 저들이 손님이 되게해주자 우리가 저들 때문에 이렇게 사는게 아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 당숙들의 불만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도 아침에 잠깐 마당에나와 당숙모들과 머슴형들을 지휘하고는 집에 들어가 상급의 형수들과 떡하고 적(부침개)부치고 삶은 돼지고기를 한근내기로 끊어서 독가루종이에 봉송을 싸느라 종일 마당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후 늦게 모두들 이제 간다며 인사하면, 큰당숙은 어머니가 싸서 내놓은 봉송을 그들의 손에 들려줬습니다. 중간에 장에나가 술이 꽐라가 되어 들어온 사람은 큰당숙에게 혼나고 봉송을 제일 늦게 받았어요. 술취한 사람은 혼나면서도 늦게라도 봉송을 꼭 받아서 갔습니다. 봉송은 떡 서너쪽과 적(부침개)서너장과 한근쯤의 돼지고기 한덩이 대추 사과등 과일이 들어있는데 그 봉송封送은 그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세월이 가도 그 봉송 얘기를 두고두고했습니다. 봉송을 받기전에 술이 취하면 혼나고 봉송수령이 늦으니.. 봉송을 받아 나오면 이젠 됐다하고 주막에서 술을 두어사발씩 더마시고 흥얼거리며 집에 갔답니다. 70년 언저리 먼 친척의 딸(나에겐 동생뻘)이 어린시절 9일의 장날이면.. 고삿에서 하루종일 기다리다가 먹었던 그 봉송에 대해 글을 썼는데..
''불콰하게 술이오른 아부지가 가져온 봉송안의 고기와 떡과 대추 곶감등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는 아련한 그시절 봉송이야기였습니다. 그게 무슨 일등 신문사의 고교백일장에서 장원을해서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어요. 아버지는 글 잘 쓰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이뻐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전의 우리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나의 대학 과후배인 동료선생님과 결혼해서 정년하고 잘 살더니 몇년전 다 늙어서 둘이 손잡고 딸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 갔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말을 안했을 뿐이지 먼 친척들과 속인들이 징글징글 했을 겁니다. 본의 아니게 그 많은 사람들의 뒷배가 돼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들의 힘든 일과 슬픈 일을 강제로 함께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쁜 일도 함께하는 보람이 있었기에 그런 일을 기꺼이 감내했을 겁니다. 그건 나도 그렇습니다..90년대초까지 누군가 불쑥 ''대린님''하고 나타나면 그날은 내시간을 한 두시간쯤 뺏기고 밥사주면서 그의 넋두리 들어야하는 날입니다. 다른형님들은 나만큼 만만치 않은지 속인들은 유독 나한테만 그랬습니다.
우리집의 9일갑오 장날잔치는 7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는데 그 때쯤이면 모두 살만큼 살아선지 많이 먹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장날을 총괄하시던 어머니께서 쓰러지면서 장날잔치가 마감됐습니다.
그집은 우리집 9일의 손님들이 모이는 장소가 됐습니다. 나도 가끔 가서 그들과 어울리며 장국을 먹었습니다. 40년간 성황이었지만 아줌마가 80이 넘어 할머니가 된 2010년 문닫았습니다. *오늘이 우리동네 9일장입니다. 해서 장구경 갔는데. 누가 내 코트 뒤를 잡고 [대린님]하고 불러세워요. 70이 넘은 늙은이를 어떤놈이 대린님?..하고 돌아봤더니 낯이 익어요.
10여년전 내가 중풍맞은 직후에도 이렇게 장에서 만난.. 50년전 9일날 잔치의 어린 손님입니다. 부산사는데 집안일로 왔답니다. 옛날식 다방에서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그 친구 어린시절 9일장날의 잔치와 봉송의 추억을 들었습니다.
첫댓글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귀한 글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