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신임 목사 이익제李益齊가 어제 출근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일찍이 남다른 치적이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도 옛날 수완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서울 종조부께서 서울에서 돌아오셨다. 들으니, 오시복吳始復오시복(吳始復, 1637~1716) :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1662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유수·강릉 부사·이조와 호조의 판서 등을 역임했다. 1701년 희빈 장씨 사건이 터졌을 때 신천 군수 윤희 등이 오시복·민암·목창명 등 남인들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여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의 치죄를 두고 아직 논계가 정지되지 않았고, 남악南岳남악(南岳) :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을 지칭한다. 남악은 이현일이 거처하던 영해부(寧海府) 석보촌(石保村)의 동쪽 골짜기에 있던 우사(寓舍)를 말한다.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1648년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1689년 산림(山林)으로 천거되어 사업(司業)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 장령·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692년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병조 참판··우참찬·이조 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1697년에 호남의 광양현으로,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에 이거되었다가 1704년에 금양에서 죽었다.·류명천柳命天류명천(柳命天, 1633~1705) : 자는 사원(士元), 호는 퇴당(退堂), 본관은 진주이다. 167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대사간·예조와 공조의 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701년 장희재(張希載)와 공모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해하려 하였다는 지평 이동언(李東彦)의 탄핵을 받고 나주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류상운柳尙運류상운(柳尙運, 1636~1707) : 자는 유구(悠久), 호는 약재(約齋)·누실(陋室),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166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평안도 관찰사·이조 판서·형조 판서·영의정을 역임했다. 1694년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인현왕후(仁顯王后)에 대한 불온한 글귀가 있다는 이유로 투옥되자, 그를 처형하자는 노론의 주장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그는 장희재를 처형하면 그 혐의가 세자의 생모인 희빈에게까지 미쳐 정국의 혼란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남구만(南九萬)과 합세해 장희재를 제주도로 유배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후 장희빈의 사사를 반대하다가 남구만과 함께 파직되어 충청도 직산(稷山)에 부처되었다.·오도일吳道一오도일(吳道一, 1645~1703) :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673년 춘당대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대사헌·강원도 관찰사·병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에 유배되었다.·남구만南九萬남구만(南九萬, 1629~1711) :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65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대사간·대제학·좌·우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했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가벼운 벌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하고 낙향했으나 그 뒤 부처되었다. 등도 멀리 유배되었다고 한다. 계사 중에는 서울에서 소란스러운 말이 너무 심하고 또한 하늘의 재해와 시절의 변고가 하루도 없는 날이 없다고 한다.
흰 무지개가 여러 번 해를 꿰뚫었고, 태백성太白星이 늘 대낮에 나타났으며, 어가의 능행陵行 때 사슴이 행렬로 뛰어 들었고, 주상의 관冠이 새문안[新門內]에서 저절로 떨어졌으며, 대궐로 이동할 때는 부엉이가 전각 위에서 울었다고 한다. 또 들으니, 김춘택金春澤김춘택(金春澤, 1670~1717) :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로 남인이 정권을 담당하였을 때에는 여러 차례 투옥되고 유배되었다. 1701년 소론의 탄핵을 받아 부안(扶安)에 유배되었으며,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를 모해하였다는 혐의를 입어 서울로 잡혀가 심문을 받았다.이 장희재張熙載 처의 밀통 사건 때문에 호남에 귀양 가 있으면서 자주 바깥으로 드나들고, 또한 서울에까지 뻔질나게 다니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며, 이세백李世白이세백(李世白, 1635~1703) : 자는 중경(仲庚), 호는 우사(雩沙)·북계(北溪),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1675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관찰사·대사간·이조 판서·좌의정을 역임했다.과 김진구金鎭久는 방자하게 굴면서 위세를 부린다고 하고, 또한 양남兩南(영남과 호남)에 흉년이 심하게 들어 바야흐로 진휼을 베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