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밭에 내리는 싸락눈
11월의 끝자락, 어느 새벽에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시다가 환한 설광 때문에 끝내 창문을 열었다. ‘세상에나!’ 이제 갓 자란 어린 배추에 싸락눈이 내려앉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첫눈이 올 시기도 아닌데, 이렇게 급하게 눈이 내리니 어린 배추가 줄줄이 동사할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명색이 첫눈인데 운치 있게 뭉텅뭉텅 내리는 것도 아니고 쏭당쏭당 얇게 저민 듯 가루가 되어 퍼붓고 있었다.
나야 집 옆 작은 공터에 한 고랑 심었을 뿐이지만, 수천 포기 농사를 업으로 삼은 농부는 그렇게 얼어가는 배추를 바라보며 얼마나 애가 탈까.
싸락눈은 눈치도 없이 반갑지 않은 식객처럼 혼곤히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농사짓는 것은 하느님과 동업하는 일이라고 했던가. 작년에는 잘 자란 배추밭의 골 바른 밭이랑에 배추흰나비 날아오르고 배추의 노란 고갱이가 수줍은 듯 속살을 감추고 통통하게 살이 올랐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송에서는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배추가 얼어서, 농촌에서는 배추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배추 한 포기에 만원을 호가하고 있으며 시골에서는 밤에 차를 대놓고 배추를 싹쓸이해가는 도둑도 생겼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배추 몇 포기를 심은 우리보고 돈 벌었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배추밭을 내다보면 국화에 에워 쌓인 배추의 시퍼런 잎들이 출렁이는데, 꽃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옆집 사람은 일산 근교에 밭을 빌려 배추를 심었는데, 약을 치지 않으면 다른 밭에서 벌레가 단체 원정을 오니 할 수 없이 농약을 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밭은 집들 가운데 있는 공터라서 다른 밭에서 마실 올 벌레들도 없어 약을 치지 않았다. 여름 내내 고추, 상추, 깻잎, 부추, 토마토 등이 잘 자라니, 살아가는 기쁨 한 가지가 늘어났다.
지난가을 초입에 배추를 심었다. 그러나 배추는 다른 농작물보다 해충이 유난히 많았다. 어린 배추 싹을 노리는 벌레들이 우글우글했다. 배추좀나방과 거세미나방 유충 등 종류도 다양하다. 웬만한 것들은 손으로 잡아 땅속에 묻어버리지만, 야행성인 거세미나방 애벌레는 땅속 깊이 흉물스런 몰골을 숨기고 있다가 한밤중에만 활동을 개시한다.
“거세미나방 애벌레는 농사꾼의 원수야. 그리고 가을 나방은 꼴도 보기 싫어. 거세미나방 애벌레를 잡으려 손전등을 켜들고 배추밭 사이를 헤매다 보면, 밤이슬에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는다고.” 전원에서 농사짓는 후배가 하나하나 꿰듯이 얘기했다. “배추 모종을 꽂아놓고, 잘못되면 어쩌나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야.” “배추 한 포기를 키워내려면 백일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특히 배추 농사가 참 힘이 든다고 후배는 말했다.
배추 떡잎이 고개를 살포시 내밀기 시작하면 남편은 손으로 일일이 벌레를 잡아낸다. 유순한 연녹색 배추벌레가 식욕이 얼마나 왕성한지, 조금만 게을러도 배춧잎은 이미 망사처럼 너덜너덜해 지곤 한다.
작년에는 배추가 너무 넘쳐나서 애면글면 키우던 배추밭을 갈아엎는 장면이 TV에 나왔다. 우리야 그저 재미로 농사를 짓지만, 농부들은 그럴 때 얼마나 애가 탈까. 채소를 키우면서 농산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서, 마트에서 아무리 비싸도 토를 달지 않게 되었다.
배추는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는 아주 중요한 채소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샐러드용으로 약간 재배될 뿐이다. 특히 우리나라 배추는 세계 어느 곳의 배추보다도 품종이 우수하다. 독일에 잠깐 있을 때 김치를 담가 보았지만, 배추의 맛 자체가 우리나라와 다르다. 일본에 있는 친구도 일본 배추와 우리나라 배추는 품종 자체가 달라서 한국의 김치 맛이 안 난다고 투덜댔다.
우리나라에서 배추가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인 1236년에 출간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의서인 <향약구급방>에 이미 나온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채소가 아닌 약초로 주로 사용되었다. 지금 우리의 전통이라고 여겨지는 것 가운데는 사실 이백여 년 전인 영정조 시대에 정착된 것이 많은 것처럼, 김장 배추도 바로 이 시기에 채소로서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늦게 정착되어 우리 입맛을 순식간에 사로잡은 배추김치도 시대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다.
주부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김치 냉장고 덕분에 김치는 일 년 내내 싱싱하여 따로 김장철이라는 것이 사라졌을 정도이다. 이처럼 김치를 편안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어린이들은 인스턴트식품에 입맛이 길들어져서 김치 냄새에 고개를 돌린다.
그러니 학창 시절 도시락 바닥에 김치를 깔아 난로 위에 쌓아놓고, 김치 냄새에 침을 삼키던 일은 이제 애틋한 추억일 따름이다.
싸락눈에 바람까지 가세하니 매서운 날씨는 도저히 풀릴 기미가 없다. 지금 배추를 뽑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얼어버릴 것이 뻔하다. 날은 점점 어두워 오는데 남편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 나도 팔을 걷어붙였다. 겨우 조금 거들었을 뿐인데 싸라기눈이 얼굴을 후려치고 허리가 끊어지게 아프고 온몸이 추위로 뻣뻣하게 얼었다.
우리가 키운 배추는 작고 볼품없어서 상품가치도 없는데다가, 이렇게 한 포기씩 뽑는 일도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싸락눈에 짱짱한 칼바람까지 합세하니 견딜 수 없어, 남편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먼저 들어와 버렸다.
겨울 초입에 내리는 이 싸락눈은 처음 오는 눈은 맞지만 ‘첫눈’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배추들을 거두지 못한 밭에 내리는 서운한 눈이어서 그런가. 다 자란 배추를 거두고 빈 밭을 내다보며 느긋한 사념에 젖어 있을 때 앞이 안 보이게 뭉텅뭉텅 소리 없이 내려야 첫눈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