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봉미산 신륵사
여주 봉미산( 鳳尾山, 156m) 남쪽자락의 신륵사(神勒寺)는 여강을 마주하고
있는 강변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말사이다
창건 시기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 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수없다
사찰 이름을 신륵 이라고 한데는 미륵 또는 왕사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과, 고려 고종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잡을수 없었는데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으니 순해져서
신력으로 제압 하였다 하여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때에는 벽절 이라고도 불렸다 하는데 이는 경내 동대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데서 유래 했다고 한다
불이문을 통과하여
관세음보살 은행나무와 신륵사 다층전탑
신륵사 극락보전과 다층석탑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을 2단으로 한후, 위로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 포털)
조사당 앞에 있는 600년된 향나무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으로 가는 계단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출처: 국가문화유산 포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신륵사 석등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준다
(출처:국가문화유산 포털)
신륵사 전탑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 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
(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 포털)
전탑에서 내려다본 강월헌
강월헌에서의 일몰이 아름답다고 한다
여강을 바라보며 휴식중인 평택섶길 회원님들
수상스키
황포돛배
수상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