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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海里 스크랩 2000년대 시문학사 / 맹문재
홍해리洪海里 추천 0 조회 250 13.05.19 02: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세영 외 10인,『한국현대시사』(공저), 민음사, 2007, 10. 11.

 

         2000년대 시문학사

 

          맹문재


1. 시대 상황

2000년대는 새천년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때보다도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불안과 비극적인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와 같은 징후는 새천년의 길목에서 일어났던 Y2K 상황에서부터 볼 수 있다. Y는 연도(year)를, K는 1000(Kilo)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천년을 뜻하는 밀레니엄과 컴퓨터 프로그램상의 오류를 가리키는 버그의 합성어로 밀레니엄 버그(Millenium Bug)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컴퓨터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모든 산업에 대혼란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1900년대의 19를 편의상 고정시키고 마지막 두 자리만 변수로 사용해왔으므로, 2000년대의 마지막 두 자리인 00을 변수로 표식하면 컴퓨터가 1900년으로 오식하는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Y2K로 인한 큰 사고가 없이 새천년을 맞이했지만, 새로운 시대가 순조롭게만 진행되지는 않을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와 같은 예상이 여실하게 증명된 것이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이었다. 미국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와 의사당을 비롯한 주요 관청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동시다발적으로 테러 공격을 받은 이 사건은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테러 사건의 배후 인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하고 그를 비호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조직을 붕괴시켰다. 뿐만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전쟁을 감행하는 등 인류사에 또다시 피를 뿌렸다. 지난 20세기는 폭력과 전쟁의 역사로 얼룩졌기 때문에 새천년에는 반성과 화해로써 극복되기를 희망했지만, 세계 평화의 실현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2000년대를 특징짓는 또 다른 면은 자본주의의 심화라고 할 수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철거 이후 사회주의가 몰락되면서 20세기 내내 견고하게 대치했던 냉전 구도는 허물어지고, 그 대신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건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장악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 간의 경계마저 제거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한국도 예외 없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 상황이 그 여실한 면이다. 기업들의 무리한 투자와 금융기관의 경영 부실,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교역조건 악화 등으로 인해 연쇄부도를 일으키고, 대외신인도의 추락에 의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빠져나감에 따라 외환 보유고가 고갈된 것이다. IMF는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한국 정부에 긴축통화정책의 실시, 부실한 기업의 정리, 모든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 8% 이상 유지,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폐지, 재벌 경영의 투명화, 기업의 적대적 인수 및 합병 허용,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요구했다. 다급한 한국 정부는 IMF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져 노동자들은 실직과 취업난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해야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양극화가 더욱 심해졌고, 물질가치가 인간의 정신가치를 지배하는 현실이 도래했다. 자본주의의 영향은 2007년 4월 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된 데에서 보듯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2. 시단 상황

2000년 9월 소설가 황순원이, 같은 해 12월 시인 서정주가 타계했다. 어느 시대나 문인들의 타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들의 경우가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한국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고, 또 새로운 세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20세기의 한국 문단을 이끌어온 상징적 존재들이 타계함으로써 새로운 시인들이 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2003년 2월 이문구(소설가), 3월 조병화(시인), 4월 이태극(시조시인), 8월 신동집(시인) 및 이오덕(아동문학가), 10월 최영숙(시인), 11월 이근삼(극작가), 12월 윤석중(아동문학가) 등이 타계했다. 2004년 5월 구상(시인) 및 어효선(아동문학가), 10월 류달영(수필가), 10월 김상옥(시조시인), 11월 김춘수(시인) 및 김정구(시인), 12월 전우익(작가) 등도 타계했다. 2005년 2월 이형기(시인), 12월 이선관(시인), 2006년 5월 박영근(시인), 6월 차범석(극작가), 8월 박영한(소설가), 9월 정세기(시인), 2007년 1월 박찬(시인), 2월 오규원(시인) 및 조영관(시인), 4월 백창일(시인), 5월 권정생(아동문학가) 및 피천득(시인, 수필가), 6월 정규화(시인) 등도 타계했다. 이들 중에 황순원, 서정주, 조병화, 이태극, 신동집, 이오덕, 이근삼, 윤석중, 구상, 어효선, 김상옥, 김춘수, 이형기, 차범석, 권정생, 피천득 등의 타계는 특히 세대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2000년대의 한국 시단은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적 구분이 상당히 와해된 상황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내세운 거대 자본이 사회의 전역을 지배하게 되자 문학 분야 또한 영향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해 문화 영역 전체가 산업 가치로 전환되었듯이 문학 역시 예외 없이 가치의 변화를 겪었다. 역사나 국가, 민족, 민중, 계급, 해방 등과 같은 거시 담론의 가치들은 축소 내지 폐기되었고, 대신 일상, 개인, 욕망, 몸, 탈중심 등과 같은 미시 담론의 가치들이 대두되었다. 그동안 문학이 고유하게 견지해온 정신 가치는 더 이상 지배적인 요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감각과 시각적인 효과가 중요하게 인식된 것이다.

2000년대에는 새로운 시인들이 대거 시단에 등장해 활동했다. 대중문화의 과감한 차용, 상상력 발휘, 언어 활용의 다양화 등으로 문학의 사회성이며 공리성을 추구하던 기성세대 시인들과는 상당히 다른 시의 미학을 지향했다. 기성세대 시인들은 시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이들은 시의 형식을 중요하게 여겼고, 기성세대 시인들은 시의 문법을 유지하였지만 이들은 오히려 문법을 파괴했다. 그리고 기성세대 시인들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중시했지만 이들은 그보다 자기 인식에 중점을 두었다.

그렇지만 2000년대의 한국 시단은 어느 한 가지의 특성만으로는 집약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시인들의 평균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창작활동 자체가 연장된 데다가 새로운 공급층과 수요층이 다양화되었다. 대학에 문예창작학과가 대폭적으로 신설된 것은 물론 각 지역의 문화센터에 문예창작 강좌가 개설되어 있고, 228종의 문예지(2006년 『문예연감』)가 발간됨으로 인해 다수의 시인이 제도적으로 배출되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컴퓨터의 급속한 확대로 인해 시인의 활동 지형도가 변화되어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활동이나 문단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3. 시단의 양상


1) 원로 및 중견 시인1)들의 활동

2000년대의 한국 시단은 새로운 시인들이 많이 등장해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원로 및 중견 시인들의 활동도 못지않았다. 현대 의술의 발달, 건강관리 개선, 식생활 향상, 문화생활의 확대 등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평균수명이 80세에 이르렀기 때문에 시인들의 수명 역시 연장되어 작품 활동 기간이 늘었다는 외면적인 면도 있지만, 창작 의욕 자체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원로 및 중견 시인들은 자신이 추구해온 시의 주제며 형식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심화시키는 쪽으로 활동했는데, 인문학적 통찰을 통한 삶의 의미와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였다. 

1960년대 이전에 등단해 2000년대에 작품활동을 한 시인으로는 김종길, 김규동, 김남조, 신경림, 박희진, 허만하, 황동규, 조영서, 유경환, 고은, 함동선, 마종기, 민영, 김영태, 이성부 등을 들 수 있다.

김종길은 『해가 많이 짧아졌다』(2004)에서 인생의 아름다움과 유한함을 성찰했다. 김규동은 『느릅나무에게』(2005)에서 헤어진 고향의 가족과 지인들을 그리워하며 조국 통일을 염원했다. 신경림은 『뿔』(2002)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면서 지인들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회한을 보여주었다. 황동규는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2003)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색했다. 김영태(1936~1971)는 『그늘 반근』(2000)『누군가 다녀갔듯이』(2005)에서 내면에 존재하는 고독, 기쁨, 그리움 등을 풍요롭게 그렸다. 고은은 140권의 저서를 가지고 있는 시인답게 2000년대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보였는데, 『두고 온 시』(2000) 『남과 북』(2000) 『순간의 꽃』(2001) 『만인보』16~23(2004/2006) 『부끄러움 가득』(2006) 등에서 사회 문제 및 자연 인식을 보여주었다. 마종기는 40여 년의 도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2007)를 간행했는데, 시간과 사랑에 대한 사념들을 담백한 시어로 담았다. 민영은 『해지기 전의 사랑』(2001) 『방울새에게』(2007)에서 인생의 외로움, 고독, 그리움 등을 노래하면서 이름 없는 풀, 꽃, 새 등과 대화를 나누었다. 

1960년대에 등단한 정진규는 『도둑이 다녀가셨다』(2000) 『본색』(2004)에서 가족의 소중함과 자연의 엄정한 생명력을 노래했다. 김종해는 『풀』(2001)에서 궁핍했던 시대에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를 품었다. 이수익은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2000)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에서 삶의 본질을 응시했다. 이승훈은 『비누』(2004)『이것은 시가 아니다』(2007)에서 자아에 대한 탐구를 지속했다. 최하림은 『풍경 뒤의 풍경』(2001)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하는 풍경들의 참모습을 그렸다. 박의상은 『질문과 농담과 시』(2005)에서 시 형식을 파괴하는 실험정신으로 인간의 욕망과 농담과 상처를 담았다. 유안진은 『봄비 한 주머니』(2000) 『다보탑을 줍다』(2004)에서 일상생활의 가치와 여성성을 그렸다. 오규원(1941~2007)은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에서 개념화되기 이전의 이미지, 즉 ‘날[生]이미지’라는 본인의 시론과 작품을 일체화시켰다. 천양희는 『너무 많은 입』(2005)에서 생의 상처와 절망에 맞서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했다. 조오현은 『산에 사는 날에』(2001) 『아득한 성자』(2007)에서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을 사색했다. 강인한은 『푸른 심연』(2005)에서 존재의 심연을 탐구했다. 오탁번은 『벙어리장갑』(2002) 『손님』(2006)에서 유년의 추억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노래했다. 이건청은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2000) 『푸른 말들에 대한 기억』(2005)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2007)에서 문명에 의해 사라져가는 자연과 사회적 약자들을 품었다. 오세영은 『적멸의 불빛』(2001) 『봄은 전쟁처럼』(2004) 『시간의 쪽배』(2005)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2005) 『문 열어라 하늘아』(2006)에서 인간 가치와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했다. 강은교는 『초록 거미의 사랑』(2006)에서 소리와 굿을 통한 심연의 세계를 노래했다. 신대철은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2000)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2005) 『바이칼 키스』(2007)에서 화전민이었던 유년 및 군복무 시절, 몽골 등의 오지 체험을 담았다. 김형영은 『낮은 수평선』(2005) 『새벽달처럼』(2007)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세계인식을 보였다. 서정춘은 『봄 파르티잔』(2001) 『귀』(2005)에서 삶의 아픔을 서정으로 승화시켰다. 홍해리는 『봄 벼락치다』(2006) 『푸른 느낌표』(2006)에서 서정적 열정으로 자연과 삶의 본질을 노래했다. 문정희는 『오라 거짓 사랑아』(2001)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2004) 『나는 문이다』(2007)에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주체적인 여성으로 노래했다. 김지하는 『화개』(2002)『유목과 은둔』(2004) 『비단길』(2006)에서 생성과 소멸의 우주적 존재와 생명 문제를 사유했다. 이시영은 『은빛 호각』(2003) 『바다 호수』(2004) 『아르갈의 향기』(2005)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에서 가난하고 어두웠던 시간과 함께했던 인물들을 산문시 형태로 그려냈다.

1970년대에 등단한 임영조(1945~2003)는 『시인의 모자』(2003)에서 장인이 물건을 공들여 만들 듯 시인의 모자를 만들어 쓰려고 했다. 노향림은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에서 고통과 슬픔을 섬세하게 이미지화했다. 정희성은 『詩를 찾아서』(2001)에서 말을 새로 배운다는 자세로 참다운 시 쓰기를 고민했다. 조정권은 『떠도는 몸들』(2005)에서 담담한 어조로 예술혼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나태주는 『이 세상 모든 사랑』(2005) 『쪼금은 보랏빛을 물들 때』(2005) 『물고기와 만나다』(2006)에서 삶의 연륜과 사랑을 노래했다. 이선관(1942~2005)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2000) 『배추흰나비를 보았습니다』(2002) 『지금 우리들의 손에는』(2003) 『어머니』(2004) 『나무들은 말한다』(2006)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정치 민주화, 환경문제, 조국 통일 등을 노래했다. 이하석은 『것들』(2006)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황폐한 도시 문명을 비판했다. 신달자는 『어머니 그 비뚤비뚤한 글씨』(2001) 『오래 말하는 사이』(2004)에서 모성과 여성의 생명력을 노래했다. 이기철은 『가장 따뜻한 책』(2005) 『정오의 순례』(2006)에서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면서 존재론적 근거를 성찰했다. 김승희는 『냄비는 둥둥』(2006)에서 음악적인 율동으로 여성의 일상과 야성미를 회복시켰다. 허형만은 『영혼의 눈』(2002) 『첫차』(2005)에서 일상과 인정의 소중함을 노래했다. 김명인은 『바다의 아코디언』(2002) 『파문』(2005)에서 내밀하고 정제된 시어로 생의 문제를 탐색했다. 한영옥은 『비천한 빠름이여』(2001) 『아늑한 얼굴』(2006)에서 삶의 면면을 노래했다. 조창환은 『피보다 붉은 오후』(2001) 『수도원 가는 길』(2004)에서 아쉬움과 그리움과 아름다움 등 길 위에서 느낀 회상들을 그렸다. 이태수는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에서 삶의 쓸쓸함과 서정적 자아를 탐구했다. 김광규는 『처음 만나던 때』(2003) 『시간의 부드러운 손』(2007)에서 세월과 일상의 의미를 그렸다. 하종오는 『무언가 찾아올 적엔』(2003) 『반대쪽 천국』(2004) 『님시집』(2005) 『지옥처럼 낯선』(2006) 『아시아계 한국인들』(2007) 『국경 없는 공장』(2007)에서 대지와 농민,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을 그렸다. 이영춘은 『시간의 옆구리』(2001)에서 일상과 생의 내면을 그렸다. 최동호는 『공놀이하는 달마』(2002)에서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하는 화두를 가지고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했다. 이상국은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2005)를 통해 가족, 나무, 어둠, 별 등을 노래했다. 강영환은 『푸른 짝사랑에 들다』(2003) 『불무장등』(2005) 『집을 버리다』(2005) 『벽소령』(2007) 등에서 바다와 산과 생의 운명을 그렸다. 김명수는 『아기는 성이 없고』(2000) 『가오리의 심해』(2004)에서 차별을 넘어서는 생명의 소중함을 노래했다. 이성복은 『아, 입이 없는 것들』(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에서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감정으로 깊은 세계인식을 보여주었다. 송재학은 『기억들』(2001) 『진흙 얼굴』(2005)에서 어둡고 절망적인 자의식을 응시했다. 박몽구는 『개리 카를 들으며』(2001) 『마음의 귀』(2006)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그렸다. 문충성은 『허공』(2001) 『백년 동안 내리는 눈』(2007)에서 자신의 고향인 제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김혜순은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2000) 『한 잔의 붉은 거울』(2004)에서 활달한 상상력으로 남성 중심의 관념을 넘어서는 부정의 미학을 획득했다. 손종호는 『새들의 현관』(2006)에서 인간 존재의 가치를 탐구했다. 장석주는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2001) 『붉디 붉은 호랑이』(2005)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아를 성찰했다. 고형렬은 『김포 운호가든집에서』(2001) 『밤 미시령』(2005)에서 고향, 가족, 일상, 자연 등을 성찰했다. 박남철은 『바다 속의 흰머리뫼』(2005)에서 형태파괴의 시 형식 및 인터넷 양식을 차용하며 현실의 위선과 모순을 비판했다. 박노해는 2000년대에 들어 시집이 없지만 1980년대에 추구했던 노동시를 평화와 생명사상으로 확대했다.

1980년대에 등단한 박태일은『풀나라』(2002)에서 전통적인 시어로 소리와 색깔 등을 예민하게 포착했다. 이소리는 『바람과 깃발』(2006)에서 노동의 체험과 민요의 차용으로 삶의 애환을 노래했다. 최두석은 『꽃에게 길을 묻는다』(2003)에서 생태적 감수성으로 인간의 길을 찾았다. 김정환은 『해가 뜨다』(2000) 『하노이 서울시편』(2003)『레닌의 노래』(2006)에서 역사, 죽음, 사랑의 시간을 회복했다. 이재무는 『위대한 식사』(2002) 『푸른 고집』(2004)에서 농촌 공동체의 체험을 그렸다. 남진우는 『타오르는 책』(2000)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2006)에서 죽음의 다양한 이미지를 그렸다. 박영근(1958~2006)은 『저 꽃이 불편하다』(2001)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2007)에서 자본주의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했던 삶의 힘듦을 담았다. 정규화(1949~2007)는 『슬픔의 내력』(2004) 『나무와 바람과 세월』(2004) 『오래된 변명』(2006) 『머슴새가 울었다』(2007)에서 신부전증이라는 병마 속에서도 삶의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았다. 배창환은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2000) 『겨울 가야산』(2006)에서 공동체적 삶을 추구했다. 이사라는 『시간이 지나간 시간』(2002)에서 세월에 묻힌 기억과 죽음의 흔적들을 들춰보며 자신의 내면을 조망했다. 이기형은 1917년 함남 함주 출생으로 1982년 시집 『망향』으로 등단했는데, 『산하단심』(2002) 『봄은 왜 오지 않는가』(2003) 『해연이 날아온다』(2007)에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그렸다. 김수열은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2001) 『바람의 목례』(2006)에서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던 1980년대의 열정과 4․3항쟁의 슬픔을 그렸다. 윤재철은 『세상에 새로 온 꽃』(2004)에서 도시문명에 끌려가지 않는 인간 가치를 제시했다. 김사인은 『가만히 좋아하는』(2006)에서 고즈넉한 시어로 내면의 풍경화를 그렸다. 양애경은 『내가 암늑대라면』(2005)에서 여성의 시각에서 사랑을 그렸다. 이문재는 『제국호텔』(2004)에서 디지털화된 도시를 비판하며 자연의 생명력을 옹호했다. 김경미는 『쉿 나의 세컨드는』(2003)에서 외로움에 젖어 있는 자아를 그렸다. 이승철은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2001) 『당산철교 위에서』(2006)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40대 남성의 자화상을 그렸다. 김백겸은 『북소리』(2002) 『비밀방』(2005)에서 상상력으로 시의 고유한 세계를 지향했다. 박찬(1948~2007)은 『먼지 속 이슬』(2000)에서 자연의 경이와 삶의 깨달음을 노래했다. 최영철은 『일광욕하는 가구』(2000) 『그림자 호수』(2003) 『호루라기』(2006)에서 소외된 자들과 유대감을 가지려고 했다. 고재종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2001) 『쪽빛 문장』(2004)에서 인문학적 감각과 언어의 섬세함으로 농민시를 확장시켰다. 백무산은 『초심』(2003) 『길 밖의 길』(2005)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사유했다. 이은봉은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2003) 『길은 당나귀를 타고』(2005)에서 생태적 사유로 삶을 성찰했다. 윤중호(1956~2004)는 유고시집 『고향 길』(2005)에서 산업화 과정에 소외된 농촌 고향을 그렸다. 김기홍은 『슬픈 희망』(2002)에서 공사장 인부들의 힘든 삶과 동료애를 그렸다. 김용락은 『시간의 흰 길』(2000)에서 IMF시대의 불행한 상황을 그렸다. 김해화는 『누워서 부르는 사랑 노래』(2000)에서 노동현장에서의 상처와 고통과 희망을 노래했다. 도종환은 『슬픔의 뿌리』(2005) 『해인으로 가는 길』(2006)에서 집착을 치유하는 근원을 살폈다. 황인숙은 『자명한 산책』(2003)에서 세월과 함께하는 삶의 연민과 애잔함을 담았다. 이승하는 『뼈아픈 별을 찾아서』(2001)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2005)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2007)에서 고통을 겪는 이 세계의 실상들을 휴머니즘으로 담아냈다. 박남준은 『적막』(2005)에서 생태적 인식으로 자연과 함께했다. 정일근은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2003) 『경주 남산』(2004) 『가족』(2004) 『오른손잡이의 슬픔』(2005)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2006)에서 가족, 사랑, 자연, 아픔 등을 서정적으로 그렸다. 문인수는 『동강의 높은새』(2000) 『쉬』(2006)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노래하면서 힘없고 가여운 대상들에게 연민을 보였다. 박영희는 『팽이는 서고 싶다』(2001) 『즐거운 세탁』(2007)에서 오랜 영어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을 되돌아보며 역사적 현실을 응시했다. 장경린은 『토종닭 연구소』(2005)에서 비인간화된 자본주의의 현실을 풍자했다. 박주택은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2004)에서 적막과 상처의 얼룩들을 유장한 문체로 그렸다. 김윤배는 『부론에서 길을 잃다』(2001) 『사당 바우덕이』(2004)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2007)에서 욕망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공광규는 『소주병』(2004)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40대 가장의 현실을 고백했다.

  

2) 서정시의 심화와 확대

서정시의 세계관은 자아와 이 세계의 동화, 즉 자아와 이 세계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조화와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이상향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능동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해 공동체적 의식이 소멸하고 인간 소외가 심해지고 있는 21세기의 상황에서 서정시의 가치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인정, 의리, 이해, 희생 등의 인간 가치가 지극히 왜곡되거나 함몰되고 있으므로 이 세계와 동일화를 지향하는 서정시의 정신이 극복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익명화된 섬에서 단자화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고 자신마저 수단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서정시의 정신은 인간 가치를 회복하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정시는 이 세계의 존재들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포옹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시장 가치에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인간 정신으로 주체성을 지향한다. 이는 대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합일을 추구하고, 또 대상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자세로는 이 세계와 동일화를 이룰 수 없음을 인식하고 긍정적으로 연대를 지향하는 것이다.  

2000년대 이전까지의 서정시는 참여시 및 실험시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전통적인 서정시의 입장에서 보면 참여시는 구호만을 내세우는 선동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었고, 실험시는 주관적이고 난해한 상징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순되고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데에는 서정시의 가치가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서정시는 다양화되고 급변하는 시대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거나 전위적인 위치에서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했다. 이 세계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서정시의 성격은 상당히 변모되었다. 유구한 전통을 계승해 영역을 넓혔고, 보수적인 성격을 상당히 극복했다. 과거로의 회귀만을 추구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열린 세계인식으로 품은 것이다. 아울러 인습적인 규범에 의지하지 않는 창의력을 발휘하여 시 형식도 다양성을 획득했다.

2000년대의 서정시를 이끈 장석남은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2001)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2005)에서 자연의 질서에 동화되는 세계인식을 통해 자아를 성찰했다.


벌판은 

안 어기도 돌아오는 봄 때문에도

해마다 넓고

넓어서

四月의 내 作文 공부는

힘에 부친다

   ―「벌판」 부분


엄정한 질서를 지키고 있는 대자연에 비해 자신의 글쓰기가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있다. 벌판이 의연한 것은 자기 존재를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글쓰기가 힘에 부치는 것은 온몸으로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편견과 안일과 타협과 욕심을 뛰어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인식은 자연에 비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는 것이어서 종래의 인생관을 새롭게 확장시켰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자기 존재를 진지하게 성찰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한 규범으로 볼 수 있다.

허수경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2001)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2005)에서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시선으로 인류의 폭력을 고발하면서도 희망을 품고 모국어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을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붉은 고춧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대구 저녁국」)와 같은 면에서 확인된다.

정끝별은 『흰 책』(2000) 『삼천갑자 복사빛』(2005)에서 “밥이 쓰다/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밥이 쓰다」)라고 했듯이, 일상의 상처들을 이야기하면서 가족을 중심으로 사랑을 노래했다.

나희덕은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5)에서 약하고 가녀린 대상들을 모성으로 감싸안았다.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눈 부비며 쌀을 씻는 동안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   (중략)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

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

쌀 씻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창 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한 생애가 가리라

       ―「겨울 아침」 부분

    

‘어치’는 까마귀과에 속하는 텃새로 우리나라 전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시는 어미 어치가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시인을 그 모습을 통해 자신의 자식 기르기를 성찰하고 있다. 진정한 모성이란 자식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밥 먹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고, 때에 이르러서는 독립적인 존재로 기꺼이 품에서 내려놓는 일이라고 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윤학은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2000)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2003) 『그림자를 마신다』(2005)에서 삶의 주변에서 마주하는 사물과 상황들을 담백한 문체로 묘사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금 캐러 광산에 다닌 아버지./돌가루 쌓아놓고 사는 아버지.”(「기침」)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

최정례는『붉은 밭』(2001) 『레바논 감정』(2006)에서 자아의 결핍과 불안을 기억을 통해 치유했다.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퇴근해 돌아오는 사람을/집 앞 계단을 세 칸 남겨놓고/갑자기 심장을 멈추게 해 끌고 가버린다/오빠가 그렇게 죽었다//전화를 받고 허둥대다가/스타킹을 신는/그동안만이라도 시간을 유예하자고/고작 그걸 아이디어라고”(「스타킹을 신는 동안」)와 같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선영은 『일찍 늙으매 꽃꿈』(2003)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인연의 대상들을 품었다. “내가 천사를 낳았다/배고프다고 울고/잠이 온다고 울고/안아달라고 우는/천사, 배부르면 행복하고/안아주면 그게 행복의 다인/(중략)//내 속에서 천사가 나왔다/내게 남은 것은 시커멓게 가라앉은 악의 찌끄러기뿐이다”(「내가 천사를 낳았다」)라고 아이를 천사라고 여기고 있듯이, 주위의 대상들을 모성으로서 품은 것이다.

박형준은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2002) 『춤』(2005)에서 중심부에 서지 못한 존재들을 섬세한 언어로 그렸다.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겨울 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地平」 부분


온몸에 수포가 돋아날 정도로 위급한 자식을 아버지가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상황이다. 시인은 위와 같은 모습을 통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곤궁한 삶 자체의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다. “고통의 미묘한/발자국 속에서/울다 가는”(「빛의 소묘」) 사람들의 깊은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록은 『제비꽃 여인숙』(2001) 『의자』(2006)에서 자연과 사소한 일상들을 섬세한 묘사와 시어의 활용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중략)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의자」 부분


위의 작품이 독자에게 친밀하게 다가오는 근거는 어머니가 집안 식구들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라든가, 의자가 다른 사람을 위하는 상징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지만, 어머니의 말투 또한 주목할 만한 면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목소리라는 구어체 형식으로써 삶의 본질적 가치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는 것이다.

문태준은 『수런거리는 뒤란』(2000) 『맨발』(2004) 『가재미』(2006)에서 도시의 삶에서 상실한 공동체 의식을 회복했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문태준, 「가재미」 부분


위의 작품은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들어 있기에 따스하게 읽힌다. 허름한 지방의 한 병원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환자와 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들의 “파랑 같은” 삶을 포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횡행하는 이 시대를 되돌아보게 한다. 근시안에 갇혀 있는 자본주의의 관점을 극복하는 휴머니즘이 있는 것이다.

장철문은 『산벚나무의 저녁』(2003)에서 가족의 삶과 자신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담았다. “그마저 방향을 잡지 못하고/햇살과 각을 이루거나,/마주보자고 고개를 쳐드는 놈도 있다/한쪽 방향으로 기는 놈들은/제 발로 신문지를 벗어날 것이니,/좌충우돌하는 놈들만 손가락으로 집어낸다/손가락에서 빠진 놈들은 몸을 웅크리고/쌀인 체한다/살겠다는 것이 겨우/눈 가리고 아옹인 때가 있다”(「살생」)와 같은 면이 좋은 예이다. 신문지를 깔고 벌레가 난 쌀을 널었을 때 갈 방향도 제대로 모르는 채 도망가기에 바쁜 바구미들의 모습이 자신의 삶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김선우는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면』(2000) 『도화 아래 잠들다』(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2007)에서 어머니를 토대로 한 모성과 아울러 여성성을 그렸다.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도화 아래  잠들다」)와 같은 토로에서 볼 수 있다.

손택수는 『호랑이 발자국』(2004) 『목련 전차』(2007)에서 섬세한 언어로 가족의 정서를 담았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부분


시인은 한 번도 목욕탕에 함께 가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와서야 비로소 당신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게 지는 일로 가족을 먹여 살린 아버지는 지게자국으로 시커멓게 죽어 있는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당신의 아픈 세월을 품는 것이다.

박성우는 『거미』(2002) 『가뜬한 잠』(2007)에서 가난한 가족사를 중심으로 존재의 의미를 사회적이며 실존적인 차원에서 조명했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목격작에 의하면 사내는/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중략)//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거미」)에서 볼 수 있듯이, 삶의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다. 파산한 한 가장이 자살한 장면과 그의 가족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등단한 이희중은 『참 오래 쓴 가위』(2002)에서 삶의 주체성을 추구했다. 송찬호는 『붉은 눈』(2002)에서 이미지의 힘을 보여주었다. 황학주는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2002) 『루시』(2005) 『저녁의 연인들』(2006)에서 국제민간구호단체의 일원으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그렸다. 상희구는 『발해기행』(2006)에서 발해의 역사와 의의를 그렸다. 박철은 『험준한 사랑』(2005) 『사랑을 쓰다』(2007)에서 변두리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그렸다. 장옥관은 『하늘 우물』(2003)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2006)에서 시적 상상력을 확장시켰다. 채호기는 『수련』(2002)에서 수련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을 통해 시의 본질을 포착하려고 했다. 함민복은 『말랑말랑한 힘』(2005)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했다. 성선경은 『서른 살의 박봉 씨』(2003) 『몽유도원을 사다』(2006)에서 생활과 사물에 대한 관찰과 자기 성찰을 통해 공동체적 삶을 지향했다. 전기철은 『풍경의 위독』(2004) 『아인슈타인의 달팽이』(2006)에서 자본주의의 허구적인 면을 비판했다. 김기택은 『소』(2005)에서 사물들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다. 양문규는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2002) 『집으로 가는 길』(2005)에서 자연의 질서와 농촌 고향의 정서를 지켰다. 이향지는 『내 눈앞의 전선』(2003)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경림은 『상자들』(2005)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이 세계의 존재들을 상상력의 상자 속에 담았다. 정우영은 『집이 떠나갔다』(2005)에서 소외된 고향을 보듬었다. 차창룡은 『나무 물고기』(2002)에서 현실과 신화, 차안과 피안의 세계를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렸다.

1990년대에 등단한 신현림은 『해질녘에 아픈 사람』(2004)에서 성숙한 시선으로 이 세계를 감싸안았다. 이진명은 『단 한 사람』(2004)에서 인연 대상을 소중하게 품었다. 박라연은 『공중 속의 내 정원』(2000) 『우주가 돌아가셨다』(2006)에서 활달한 상상력으로 생과 사의 신성함을 노래했다. 김상미는 『잡히지 않는 나비』(2003)에서 몸과 영혼이 켜는 사랑을 노래했다. 조용미는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2000)『삼베옷을 입은 자화상』(2004)에서 대상의 내면에 귀를 기울였다. 박현수는 『위험한 독서』(2006)에서 시어의 본질을 탐색하면서 자기 실존을 성찰했다. 이인원은 『빨간 것은 사과』(2004)에서 세월과 함께하는 자신의 그림자를 역설의 시학으로 그려냈다. 반칠환은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2001) 『웃음의 힘』(2005)에서 원형적인 사랑을 노래했다. 최영숙(1963~2003)은 『모든 여자의 이름은』(2006)에서 눈물겨운 삶의 열정을 보였다. 조항록은 『지나가나 슬픔』(2002) 『근황』(2007)에서 생에 대한 애증과 연민을 이야기했다. 최서림은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2000) 『구멍』(2006)에서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박찬일은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2002) 『모자나무』(2006)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고민했다. 김소연은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2006)에서 빛과 그림자의 존재를 성찰했다. 고두현은 『늦게 온 소포』(2000)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2005)에서 겸손한 세계인식으로 자연의 순리와 삶의 본질을 탐색했다. 한혜영은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2002) 『뱀 잡는 여자』(2006)에서 힘들었던 이민의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인연들을 소중하게 품었다. 김길나는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2003)에서 존재 의미를 공간과 시간으로 확장시켰다. 곽효환은 『인디오 여인』(2006)에서 비판정신을 서정성의 토대 위에 놓았다. 심재휘는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2002)에서 시간과 풍경들을 그렸다. 김영남은 『모슬포 사랑』(2001) 『푸른 밤의 여로』(2006)에서 낙관적인 세계관으로 자연을 품었다. 배용제는 『이 달콤한 감각』(2004)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상들을 묘사했다. 조은길은 『노을이 흐르는 강』(2007)에서 애달픈 운명들을 연민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김윤은 『지붕 위를 걷다』(2004)에서 여성성을 통과의례의 차원으로 인식했다. 한정원은 『낮잠 속의 롤러코스터』(2005)에서 성정과 이치의 시학을 지향했다. 이영광은 『직선 위에 떨다』(2003) 『그늘과 사귀다』(2007)에서 과묵한 리듬으로 죽음과 삶의 의미를 탐색했다. 박해람은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2006)에서 담담한 문체로 인정의 세계를 그렸다. 우대식은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2003)에서 길의 이미지로 생의 도정을 고민했다. 이안은 『목마른 우물의 날들』(2002)에서 가난과 상처를 전통시의 아름다움으로 담아내었다.

2000년대에 등단한 여태천은 『국외자들』(2006)에서 현대 도시인들의 불안한 내면을 그렸다. 조정 『이발소 그림처럼』(2006)에서 현실을 참신하면서도 다양한 이미지로 직조했다. 위선환은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2001)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2003) 『새떼를 베끼다』(2007)에서 일상의 풍경을 서정적 인식으로 그렸다. 박홍점은 『차가운 식사』(2006)에서 시적 감수성으로 존재의 고통을 담았다. 휘민은 『생일 꽃바구니』(2007)에서 삶의 이야기들을 정연하게 들려주었다. 하선영은 『사랑의 슬픈 기쁨』(2005)에서 여성성을 절실하게 이야기했다. 길상호는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2004) 『모르는 척』(2007)에서 자연 친화적인 서정성을 넘어 이 세계에 적응해야 하는 내면의 불안을 그렸다. 고영민은 『악어』(2005)에서 공동체적인 유대감을 추구했다. 윤성학은 『당랑권 전성시대』(2006)에서 도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재치 있게 그렸다. 

이밖에 2000년대의 서정시를 이끈 시인으로는 강경호, 강문숙, 강상윤, 강성철, 강수, 강신애, 강연호, 고명수, 고영, 고운기, 고증식, 고진하, 고찬규, 공계열, 구순희, 권대웅, 권형영, 김나영, 김미성, 김경수, 김경인, 김병호, 김선굉, 김수복, 김석준, 김선태, 김수우, 김영산, 김영탁, 김완하, 김요일, 김용범, 김유선, 김월수, 김은숙, 김은정, 김인구, 김점용, 김정숙, 김정인, 김재혁, 김종태, 김찬옥, 김충규, 김형술, 노춘기, 류기봉, 류외향, 류인서, 류종민, 마경덕, 문경화, 문영, 문정영, 문창길, 문혜진, 박경자, 박상수, 박완호, 박용하, 박이화, 박종국, 박진용, 박철희, 방미영, 배한봉, 백우선, 백인덕, 변삼학, 서석화, 서안나, 서영처, 손진은, 손한옥, 송용구, 송종규, 송종찬, 신구자, 심언주, 심호택, 신용목, 안명옥, 안성원, 양선규, 양정자, 여선자, 오정국, 유수연, 유승도, 윤성택, 윤홍조, 이강산, 이관묵, 이규리, 이기와, 이나명, 이동재, 이문숙, 이병률, 이사라, 이선형, 이수정, 이선이, 이영식, 이영주, 이종암, 이지엽, 이진수, 이진영, 이창수, 이태선, 이홍섭, 임재춘, 장대송, 장무령, 장승기, 장종권, 전길자, 전동균, 전성호, 전윤호, 정공량, 정낙추, 정복여, 정숙, 정숙자, 정영선, 정영운, 정유화, 정채원, 정한용, 정해종, 조영순, 조정인, 조하혜, 조현석, 주병율, 최규승, 최영규, 최정애, 최춘희, 하영, 하재영, 한광구, 한명희, 한성례, 황선식, 허순위, 허혜정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3) 실험시의 등장과 확대

2000년대에 들어 시 형식의 해체화, 산문화, 요설화 등이 급격히 증가했다. 소위 ‘미래파’라고 지칭되는 일군의 시인들이 등장해 실험시의 영역을 확산시킨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기존의 주류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경향이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2000년대에는 보다 운동적이었고 집단적이었다.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부정과 대중문화의 수용, 새로운 스타일의 추구 등으로 시단에 환기력을 준 것이다.

그렇지만 2000년대의 실험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은 데서 볼 수 있듯이, 긍정적인 결과만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시 형식의 획일성 및 상투성, 과도한 장광설, 체험의 진정성 부족, 사유의 깊이 부족, 폐쇄적 세계관, 무의미한 유희성, 서술구조의 단절 등으로 시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미학을 담보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실험시들은 혼란스러운 사회의 거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을 낳고 있다거나, 다양한 사회 문제를 개선하기는커녕 방관과 무관심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시들은 기존의 시단을 상당히 허물고 새로운 담론을 주도해 나갔는데, 그만큼 새 천년의 한국 시단은 새로운 시를 기대하고 있었다.

2000년대의 실험시는 1980년대 중반 이후의 해체시 경향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키치적인 소재, 탈장르적 속성, 낯선 이미지의 조합, 대중문화의 활용, 반권위주의 성향 등의 성격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전 시대의 해체시와는 다소 차이를 보였는데, 현실에 대한 인식 태도가 그것이다. 1980년대의 해체시는 형식적인 실험을 행하면서도 현실을 반영하려는 목표를 다소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 2000년대의 실험시는 현실을 반영하기보다 개인의 의식을 강조했다. 거대담론이 아니라 미시담론으로써 자조적인 면을 추구한 것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신세대 시인들의 도전 중에서 가장 획기적이었던 경우는 386세대가 행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정치 민주화와 노동해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명분을 얻을 수 있었고 독자들과도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박노해와 백무산을 위시한 노동시나 황지우와 박남철을 위시한 해체시는 그 형식이 달랐지만, 기성세대에 도전하려는 의식은 유사했다. 그 결과 기존의 시 규범에서 보면 모두 비(非)시적인 것이었지만, 비시도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문학의 영역 확대 내지 사회적 가치를 전파시킨 것이다.

2000년대에 등장한 신세대 시인들의 도전은 1980년대 해체시 시인들만큼 시단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만큼 독자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이루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2000년대의 실험시는 창조성과 공유성, 개인성과 보편성 간에 유기적인 관계를 획득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들은 좋은 시의 기준으로 전통적인 시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는가를 삼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고도의 자본과 기술이 주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시의 전통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창조적 가치를 획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2000년대의 실험시를 이끈 김언희는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2000) 『뜻밖의 대답』(2005)에서 도발적인 이미지로 관습화된 가치들을 조롱했다.


거울 속의

아버지, 새빨간

페티큐어를 하고, 아이,

꽃만 보면 소름이 쳐요, 허리를

꼬는 아버지, 과부가

된 아버지

시뻘건 아버지의 음부, 아버지의

질, 하룻밤에 여든여덟 체위로

내 남자와

하는,

  ―「가족극장, 과부가 된 아버지」 부분


시인에게 아버지란 성적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는 짐승 같은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아버지를 벗겨내는 일이야 말로 허위와 권위로 대변되는 남성 중심 사회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인의 세계인식은 시집(『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서문에서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고, 심장이 약한 사람이나 과민 체질이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다고 밝힐 정도로 도전적이다. 시문학의 전통적 가치로 여겨온 서정성이나 아름다움이 여지없이 조롱당하고 있는 것이다.

박상순은 『LOVE ADAGIO』(2004)에서 작품의 배열을 가나다, 숫자, 알파벳순으로 할 정도로 시의 관습을 전복시켰다. “미니멀한 것으로 한 곡 들려줄까? 하지만 뒤틀 줄도 알아야 해. 내 비극의 컬러를 모르면 마라톤 경주를 관람할 수 없단다. 본능이라고 생각하진 마! 눈을 감으면 잘 들리니? 귀를 막으면 더 크게 들리지? 그 사람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빵공장, 마라나, 그런 시를 쓴 사람 있잖아. 사실은 내 시야. 새우 한 마리. 바다에서 잡혀온 새우 한 마리.”(「가수 김윤아」)처럼 논리성을 버리고,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꿈과 환상과 장난 등의 욕망을 표출시키고 있다.

함기석은 『착란의 돌』(2002)에서 비루하고 불안한 현실을 낯선 이미지로 그렸다.


핏빛 말 따라온다 관을 매고 따라온다 경마장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오래 전에 죽은 친척들이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웃는다 나는 직업소개소로 들어간다 광장이 나온다 아무도 없다 초조해진다 한 소년이 다가온다 황소의 머릴 달고 있다 검은 뿔이 돋아나 있다 난 일곱 살이야 함기석이라고 해! 소년의 뒤로 집이 보인다 내 유년의 뒷마당이 보인다 목 없는 해바라기 아래 어머니가 울고 있다 병든 누이를 업고 대추나무 한 그루 뒷산으로 달아나고 있다 소년은 나를 끌고 정원으로 들어간다 담은 죽은 해파리와 산호로 덮여있다 지붕은 온통 뱀의 껍질로 뒤덮여 있어 햇빛이 비칠 때마다 시퍼렇게 번쩍인다 한 노인이 지팡일 짚고 거실에서 나온다 내 손에 푸른 깃털의 새를 건네주며 말한다 이 열쇠 잘 간직하게 난 30년 후의 자넬세 자넨 앞으로도 불안과 고통의 날들을 보내게 될 게야 노인이 말하는 동안 입에서 보라색 연기가 흘러나온다

  ―「착란의 돌, 미궁」 부분


위의 작품은 언어의 지속적인 방출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다. 풍요롭고도 현란한 이미지의 향연은 작품의 의미와 상상력을 끊임없이 증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들은 일상의 예상성을 뛰어넘는 놀이를 제공하면서 이성적 논리를 극복하고 있다.

이수명은 『붉은 담장의 커브』(2001)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2004)에서 내면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하고 형이상학이기도 한 비유들을 선보였다.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고양이가 하나 둘 셋/의자에 하나 둘 셋/바닥에 하나 둘 셋/창틀에 하나 둘 셋//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들//고양이를/관람하는 고양이들”(「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에서 볼 수 있듯이, 탈출할 수 없는 일상의 고통과 통합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파편화된 풍경들을 그렸다.

이장욱은 『내 잠 속의 모래산』(2002) 『정오의 희망곡』(2006)에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시간과 공간의 혼재를 그렸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나는 줄넘기를 했다./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넘실거리는 음악,/음악은 정오의 희망곡./(중략)/나는 사랑을 잃고/당신은 줄넘기를 하고/음악은 정오의 희망곡,/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최후까지/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정오의 희망곡」)와 같은 모습이 그 예이다. 정오의 의미는 전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분위기를 띠는 상징으로 역전되고 있는 것이다.

김참은 『미로여행』(2002) 『그림자들』(2006)에서 꿈과 같이 비논리적이고 비선형적인 세계를 그렸다.


임금님이 포도주 두 병을 비웠을 때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요리사의 며느리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옷을 짜고 있었습니다 요리사가 구워낸 칠면조가 임금님 식탁에 올라갔을 때 요리사의 아내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잔치가 있는 이웃집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의 요리사가 창고에서 포도주 병을 꺼내 쌓인 먼지를 닦고 있을 때 감옥에 갇혀있는 노름꾼의 큰아들이 죽었습니다 노름꾼의 큰아들이자 사촌오빠의 사위가 죽은 줄도 모르고 왕비는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술 취한 임금님이 식탁에 엎어져 코를 골고 있을 때 요리사의 막내딸은 아홉 번째 항아리를 열고 뜨거운 기름을 부었습니다 임금님이 잠꼬대를 하고 있을 때 요리사네 옆집에 사는 할머니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요리사와 도둑」 부분


『아라비안나이트』에 수록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을 패러디한 작품인데, 임금과 요리사의 사이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 혹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의 관계를 알레고리화한 작품으로 읽힌다. 시인은 기름에 데어 독 안에서 죽고 만 평범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황병승은 『여장남자 시코쿠』(2005)에서 일관된 의미나 이미지를 넘어 자유롭고 분방한 상상력으로 실험시를 추구했다.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여장남자 시코쿠」 부분


여장한 남자는 일종의 트랜스젠더로 그 정체성이 모호하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므로 정체성을 확정할 수 없는데, 시인은 그와 같은 인물의 상황을 시대의 전형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 정체성의 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사회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을 만큼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김경주는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에서 음악과 시의 경계를 허물고 탈장르의 형식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감각을 선보였다.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밤 불가능이라는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내 워크맨 속 갠지스」 부분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비정하고도 성스러운 이 세계 앞에서 경악했고 그 야설(夜雪)을 받아내느라 몸은 다 추웠다. 어두운 화장실에 앉아 항문으로 흘러나온 피를 닦으며 나는 자주 울었다.”라고 시집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인은 결코 안온한 서정성을 품고 있지 않다. 통사론이나 의미론 등 한국어의 체계에서는 결코 어긋나지 않았으면서도 상상적인 진술로 인해 매우 낯설다. 그만큼 시어가 다양하고 문장이 자유롭고 개성이 강한 것이다.

1980년대에 등단한 박서원은 『모두 깨어 있는 밤』(2002)에서 고통을 품는 신성한 꽃을 피웠다.

1990년대에 등단한 함성호는 『너무 아름다운 병』(2001)에서 현대 문명의 텍스트들을 비판했다. 박정대는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2001)『아무르 기타』(2004)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2007)에서 언어의 압축과 절제를 넘어서는 유희로 시의 낭만성을 확장시켰다. 변종태는 『안티를 위하여』(2006)에서 상상력과 일상을 결합시켰다. 김왕노는 『슬픔도 진화한다』(2002) 『말달리자 아버지』(2006)에서 개인과 시대의 우울을 인식했다. 이원은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2001)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2007)에서 기계와 문명의 감각과 그 너머의 근원을 낯선 이미지로 그렸다. 주종환은 『일개의 인간』(2002) 『끝이 없는 길』(2007)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의 모순점들을 비판했다. 윤의섭은 『천국의 난민』(2000)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2005)에서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관계를 환상적으로 그렸다. 성미정은 『사랑은 야채 같은 것』(2003) 『상상 한 상자』(2006)에서 일상을 상상력으로 전환했다. 조연호는 『죽음에 이르는 계절』(2004) 『저녁의 기원』(2007)에서 섬세한 이미지와 환상으로 죽음, 가난, 불화 등을 이미지화했다. 이용한은 『안녕, 후두둑 씨』(2006)에서 상상적인 표현으로 다원화된 세계를 그렸다. 박서영은 『불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2006)에서 여성의 몸과 자의식을 성찰했다. 이영수는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2002)에서 미로같이 다양한 현실을 제시했다. 정재학은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2004)에서 세계의 부조리들을 담았다. 김종미는 『생일선물』(2006)에서 가족사를 참신한 비유와 상징으로 그렸다. 진수미는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2005)에서 여성의 몸과 내밀한 욕망을 발견했다. 정익진은 『구멍의 크기』(2003)에서 존재의 비애를 직시했다. 김언은 『숨쉬는 무덤』(2003) 『거인』(2005)에서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존재의 근원을 탐구했다. 권혁웅은 『마징가 계보학』(2005)에서 1980년대의 텔레비전 드라마, 만화, 영화 등의 대중문화 코드를 소시민들의 삶과 연결시켰다. 김근은 『뱀 소년의 외출』(2005)에서 환상적인 이미지와 설화의 세계로 생의 본질을 탐구했다. 이기성은 『불쑥 내민 손』(2004)에서 낯선 산문시 문체로 죽음과 부패로 얼룩진 도시를 그렸다. 이재훈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풍부한 상상력으로 최초의 말이 발성되는 순간을 기록했다. 신해욱은 『간결한 배치』(2005)에서 관계의 소통과 불안을 그렸다. 조말선은 『매우 가벼운 담론』(2002) 『둥근 발작』(2006)에서 전복적인 이미지로 억압과 부조리한 상황을 그렸다. 김병호는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2006)에서 미시의 현상을 일상세계에 연결했다. 김민정은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2005)에서 환상과 연상으로써 이 세계의 기성세대를 조롱했다. 김행숙은 『사춘기』(2003)에서 미성숙으로 인한 초조와 우울, 외로움, 충동, 호기심 등을 그렸다. 최치언은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2005)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낯선 형식으로 조명했다.

2000년대에 등단한 이민하는 『환상수족』(2005)에서 손과 발이 절단된 뒤에도 그 부위가 남아 있는 것으로 느끼는 병리적 증상을 통해 자아의 결핍과 상처를 그렸다. 이승원은 『어둠과 설탕』(2006)에서 빈혈 상태에 있는 현대사회를 묘사했다. 이기인은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2005)에서 폭압적인 자본주의를 외설적인 기호로 반영했다. 김이듬은 『별 모양의 얼룩』(2005)에서 인간 가치가 사물로 전락한 이 시대를 그로데스크하게 그렸다. 박진성은 『목숨』(2005)에서 병과 삶의 실재를 탐구했다. 유형진은 『피터래빗 저격사건』(2005)에서 모니터킨트로 대변되는 신세대의 정서를 담았다. 박판식은 『밤의 피치카토』(2004)에서 자신의 내밀한 자의식을 성찰했다. 안현미는 『곰곰』(2006)에서 활달한 상상력과 독특한 어법을 보였다. 장석원은 『아나키스트』(2005)에서 대중가요, 과학, 수학, 형이상학 등의 소재로써 형식의 단순함을 파괴하며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하재연는 『라디오 데이즈』에서 체험의 사물들을 낯선 이미지로 기억했다. 이근화는 『칸트의 동물원』(2006)에서 상상력으로 일상의 의미를 탐색했다. 조영석은 『선명한 유령』(2006)에서 세속적인 속성을 상상력으로 간파했다.  


4) 참여시의 지속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10석을 획득, 44년 만에 국회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가난과 사회적 차별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는 민중들의 열망이 그만큼 컸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분단 55년 만에 장벽을 허물고 개최된 남북 정상회담 역시 역사적 사건이었다. 온 겨레가 부푼 기대로 지켜본 남북 정상회담은 분단을 넘어 화해와 통일을 향한 대장정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치열한 국제 경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서로 이념을 달리한다고 할지라도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해서 협력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 것이다.

2007년 4월 2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FTA는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약칭으로, 국가 간 물자나 서비스의 이동을 증진시키기 위해 무역 장벽을 제거하는 협정이다. 그 결과 비교우위에 있는 상품의 수출은 촉진되지만, 경쟁력이 약한 분야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 2004년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뒤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더욱 본격적으로 세계의 무역시장에 뛰어든 셈이다. 앞으로 유럽연합(EU)이며 중국 등과도 무역 협정이 진행될 것이므로 한층 더 심화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 세계의 어떤 시장도 개방시키고 재편시킨다. 무역과 투자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고, 투자협정을 맺고, 상품과 서비스를 자유롭게 거래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키는 것이다. 환경 및 노동 관련 규제를 폐지하고, 외국 자본의 차별화를 막고, 자산매입과 기업인수 등의 투기에도 몰두한다. 그리하여 지배받는 국가는 내수시장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증하고 임금 격차가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예는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한 데서 여실히 볼 수 있다. IMF는 요청한 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한국 정부에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 결과 국내 시장은 세계 자본의 투기장이 되었다. 자본의 토대가 약한 기업들은 도산했고, 구조조정이 불가피했으며,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사회의 변혁보다도 실업의 그림자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정도로 자본의 시장에 휩쓸린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비춰보면 시문학은 역사와 사회를 통찰해야 할 책무가 있음이 재확인된다. IMF체제, 미국과 북한의 핵분쟁, 비정규직 및 실업문제, 남북문제, 자유무엽협정 등 일련의 역사적 격변은 문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독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된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의 참여시는 그 기대를 만족할 만큼 달성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나름대로 지속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여시는 ‘아직’ 존재하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한국 시단의 저변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의 참여시를 이끈 최종천은 『눈물은 푸르다』(2002)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2007)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실재성을 성찰했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노동은 시들어버렸다

열 개의 열려 있는 입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다

모든 필요를 만들어내던 손

인간의 유일한 실재인 노동보다

입에서 쏟아지는 허구가 힘이 되고 권력이 된다니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

  ―「가엾은 내 손」 부분


시인은 실재를 통해 상징화된 노동을 비판한다. 상징으로 표상되는 관념과 추상과 형식주의를, 그것을 지향하는 예술을, 그리고 그것을 공고히 하는 이 세계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다. 오늘의 예술이나 노동이 상징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보고, 노동으로써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김신용은 『환상통』(2005) 『도장골 시편』(2007)에서 수의를 만드는 아내와 함께하는 삶을 통해 가난과 인간소외로 인한 고통을 치유하려고 했다.


 이 도장골에 처음 발을 디?을 때, 나를 압도한 것은 풀이었다. 집 뒤, 버려진 산밭에서부터

풀들은 무적의 군대처럼 진군해와, 울타리를 덮고 마당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 안 오는 밤, 달빛에 끌려 마당에 내려서면 이슬들은 우거진 풀숲에 맺혀, 그야말로 진주알처럼 빛나며 있곤 했다


그때, 나는 문득 풀의 짐은 이슬!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게도 없이, 짓누르는 무게를 버틸 지게 작대기도 없이


맨몸으로 등에 짊어지고 있는 짐,


그 짐이 무거울수록 무게가 아프게 등짝을 파고들수록, 그 아픔을 덜기 위해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걸어야 하는


그렇게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걸어 짐을 내려놓은 순간, 다시 등에 얹어야 하는

   ―「도장골 시편― 이슬」 부분

풀잎에 달린 이슬방울을 보고 지게꾼으로서 날품을 팔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리고 있다. 그만큼 시인에게 노동은 삶의 조건이자 토대이다. 그리하여 도장골이라는 곳으로 삶의 장소를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생활고라는 실존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컴퓨터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도 육체적 노동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그들의 땀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고 인식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엄원태는 『물방울 무덤』(2006)에서 궁핍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포옹했다. “식당 아줌마는 늘 준비해놓은 반찬 중에서/날짜를 못 이겨 상하기 직전인 것만으로/자신의 식사를 해결하곤 하는데,/그 처연한 혼자만의 식사를/그 앞을 지나다니며 무심히 몇번 보았다/삶이란 게 그런 것은 아닌가/쉬어빠지기 직전의 음식을 어쩔 수 없이/혼자서 느릿느릿 씹어대는, 어떤, 말로는 다 못할/무심함 같은, 그런 나날들의 이어짐……”(「늦은 오후의 식당」)에서 보듯이 하찮은 사람들을 끌어안은 것이다.

맹문재는 『물고기에게 배우다』(2002) 『책이 무거운 이유』(2005)에서 이자(利子)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고찰했다. “나는 경찰서며 보험사며 심지어 병원 영안실이/부르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그들의 손짓을 싫어한다//그러나 나는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클럽 회원증을 찢지 못한다/(중략)/이 도시에서 나를 배척하는 건/이자 클럽이다”(「利子 클럽」)라고 했듯이, 이자로 상징되는 무소불위의 자본주의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자는 생산활동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한 대상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자의 만연에 희생당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유홍준은 『喪家에 모인 구두들』(2004) 『나는, 웃는다』(2006)에서 ‘반쪼가리’로 칭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그렸다.


반쪼가리 아버지가 반쪼가리 어머니 또 패대기치고 있었다 반쪼가리 밥상이 오리처럼 날아갔다 반쪼가리 마당 가득 반쪼가리 그릇들이 흩어졌다 반쪼가리 교과서를 북북 찢었다 나는 반쪼가리 교과서를 찢고 또 찢으며 울부짖었다 반쪼가리 아버지 런닝구도 너덜너덜했다 반쪼가리 달이 떠서 반쪼가리 잠자고 어머니 또 행상 나갔다 반쪼가리 아버지 또 검은 고무튜브 옷 입고 시장바닥 기어다녔다 반쪼가리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반쪼가리 동생 업고 시장입구에 서서 들었다

     ―「반쪼가리 노래」 부분


시인이 반쪼가리들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자신을 반쪼가리로 인식하고, 그와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반쪼가리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억압받고 있는 작고 낮고 힘없고 부족하고 하찮은 반쪼가리들을 포옹하면서 밝고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고 있다. 반쪼가리들을 억누르는 세계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생명력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표성배는 『개나리 꽃눈』(2006) 『공장은 안녕하다』(2006)에서 공장 생활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사십이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높다. 건너야 할 강이 몇 개인지도 모른다. 공장 그림자가 어깨에 내려앉아 아이들 커가는 것만큼 작아진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공장 터에는 번들거리는 건물이 높이 솟아 내 추억 같은 외로움마저 슬프게 한다/그래도 공장은 안녕하다”(「공장은 안녕하다」)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장은 시인의 삶에서 배제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근대사회 이후 공장은 사회 및 경제 상황을 크게 변화시켰다. 공장의 기술과 인력, 제도, 이념 등은 자본주의 사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시인은 공장의 상황과 문제점들을 나름대로 고민했다.

1980년대에 등단한 김만수는 『산내통신』(2007)에서 일상의 가치와 시의 미학으로 그렸다. 강세환은 『상계동 11월 은행나무』(2006)에서 불편한 지형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끌어안았다. 최창균은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2004)에서 참여적 메시지는 자제되어 있지만 농민시의 계보를 잇고 있다. 안상학은 『오래된 엽서』(2003)에서 민중 정신을 되돌아보면서 농민들의 현실적 고통을 담았다. 정세기(1961~2006)는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2002)에서 삶의 신념과 상처를 끌어안았다. 서수찬은 『시금치학교』(2007)에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삶을 중심으로 농어민들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했다. 육봉수는 『근로기준법』(2002)에서 노동운동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토로했다.

1990년대에 등단한 유용주는 『은근살짝』(2006)에서 유년기의 가난과 슬픔을 그렸다. 조성국은 『슬그머니』(2007)에서 민중의 편린에 빚진 마음을 내보였다. 최영미는 『돼지들에게』(2005)에서 위선적인 지식인들을 풍자했다. 김태정은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2004)에서 자본주의의 질서를 거부하는 인간애를 그렸다. 이중기는 『밥상 위의 안부』(2001) 『다시 격문을 쓴다』(2005)에서 이농문제와 농업 개방에 따른 농촌 붕괴를 토로했다. 조기조는 『기름 미인』(2005)에서 도시의 거리를 부유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를 그렸다. 한미성은 『어두워질 때까지』(2006)에서 인간다움의 세계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찾았다. 박해석은 『하늘은 저쪽』(2005)에서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비판했다. 정철훈은 『살고 싶은 아침』(2000)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2002) 『개 같은 신념』(2004)에서 현대사의 문제와 역사적 실존을 고민했다. 박일환은 『푸른 삼각뿔』(2001)에서 뒤틀린 일상들을 그렸다. 이덕규는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2003)에서 농민들의 삶과 애환을 그렸다. 윤임수는 『상처의 집』(2005)에서 늙은 역무원, 가난한 농부, 철도 궤도공 등을 소개했다. 이세기는 『먹염바다』(2005)에서 서해 어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살려냈다. 이종수는 『자작나무 눈처럼』(2002)에서 풍자와 야유로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했다. 박관서는 『철도원 일기』(2000)에서 철도원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류외향은 『꿈꾸는 자는 유죄다』(2002)에서 자본주의에 억압된 자들의 소통을 간구했다.

2000년대에 등단한 조혜영은 『검지에 핀 꽃』(2005)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투쟁을 노래했다. 이면우는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2001)에서 힘들지만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었다. 송경동은 『꿀잠』(2006)에서 노동시의 구체성을 복원시켰다. 임희구는 『걸레와 찬밥』(2004)에서 되돌아보기와 바로보기로써 사회적 자아를 인식했다.

이밖에 2000년대의 참여시를 이끈 시인으로는 고증식, 권혁소, 김광선, 김명환, 김시천, 김사이, 김인호, 김종인, 김태수, 김해자, 문동만, 문영규, 문창길, 박인섭, 박후기, 박희용, 서규정, 송태웅, 신현수, 안용산, 오인태, 오철수, 이대흠, 이도윤, 이민호, 이한주, 이행자, 임동확, 전승묵, 정연수, 조현문, 황규관 등을 들 수 있다.



1) 2007년을 기준으로 등단한 지 20년이 넘은 시인들을 지칭한다. 필자의 임의적인 구분이다. 

* 출처 :리얼리스트 100 원문보기 글쓴이 :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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