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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하나님은 왜 심판을 하십니까?
일자: 2023년 5월 28일 주일
[사도행전 5:30~32]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https://youtu.be/6ZLDQRzentw
설교 목적: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소개한다. 노아의 홍수, 소돔성의 불심판, 그리고 애굽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 메시지 등이 그것이다. 사도들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설교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장대한 판타지로 그려준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은 왜 심판을 하실까? 그리고 그 심판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우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면 왜 그런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대답은 우리를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줄 것이다.
특히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증인이라고 말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생각하면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
2.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이유
3.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범죄
4.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주시는 세상
5.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
1.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
오늘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함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서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여러 차례 이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불에 녹아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기장 대표적인 심판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물로 애굽을 완전히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하여도 임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고생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두 가지 대표적인 심판을 뽑는다면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생활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로로 끌고 간 바벨론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철저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예루살렘은 한 세대가 못 되어 로마 군대에게 철저하게 파괴되고 짓밟혔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재판 과정에서 로마의 총독 벨릭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말했습니다(행 24:25). 사도 바울의 행적을 보면, 이 세상 만민은 예외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사도에게 근신하는 마음을 주었으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용기와 열정을 주었다고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너지게 되는지를 반복적으로 그려줍니다. 그것은 판타지로 그려지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분명한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수없이 많이 증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세상을 심판하실까요?
2.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이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창조 이후로 계속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때는 이 세상에 죄가 가득하여 세상이 캄캄하고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때에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세상에 빛을 비추시고 질서를 세우시며 그 공간에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리자요 대리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땅이 어지럽게 되어 생명이 자랄 수 없게 될 때 하나님은 다시 일어나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이 세상을 파괴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고 다시 새롭게 만드시려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노아의 시대 때 홍수로 세상이 다 휩쓸렸지만 그 물에서 육지가 다시 솟아나 신세계가 열렸고 노아의 가족에게 새로운 세상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는 심판이면서 동시에 제2의 창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실 때 애굽은 쑥대밭이 되었고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 애굽 전역에 곡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창조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애굽의 심판을 이스라엘의 창조 이야기로 다시 들려주었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이사야 43:1~3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를 낳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심판을 당했을 때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심판은 파괴와 멸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기 백성을 새롭게 만드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65:17)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려고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어그러질 때 하나님은 심판하실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때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약자의 한숨과 고통의 신음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방문하셨을 때 성경은 이렇게 그 배경을 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창세기 18:20~21
모세를 부르시고 애굽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어떤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9~10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때는 이 땅에서 학대와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을 때입니다. 그 부르짖음에는 순교자들의 애절한 기도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순교자들의 부르짖는 기도가 어떤 내용인지를 소개합니다: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6:9~11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세상에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이며 그때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일어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모습을 바로잡으시려는 것일까요?
3.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범죄
먼저 노아 시대에는 폭력과 보복이 난무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라멕입니다. 라멕은 매우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는 노아 시대에 땅에 죄가 가득하게 되었을 때 살았던 사람의 전형입니다. 창세기가 폭력과 보복의 사람 라멕을 소개하는 대목을 보겠습니다: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야, 실라야,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를 해치지 마라. 죽여버리리라. 젊었다고 하여 나에게 손찌검을 하지 마라. 죽여버리리라.
24 카인을 해친 사람이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4:23~24, 공동번역개정판
소돔과 고모라 성에는 약자와 이방인을 괴롭히는 문화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까지 들렸겠지요.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성에 살던 롯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 소돔에 어떤 죄가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나그네의 모습으로 천사가 자기 마을에 방문을 했을 때 롯은 그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소돔성 사람들은 그 손님들을 다짜고짜로 끌어내어 괴롭히려고 했습니다.
4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소돔 시민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온통 몰려와 롯의 집을 둘러싸고
5 롯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오늘 밤 네 집에 든 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자들하고 재미를 좀 보게 끌어내어라."
6 롯이 밖으로 나가 등 뒤로 문을 닫고
7 사정하였다. "여보시오, 제발 이런 못된 짓은 하지들 마시오…”
창세기 19:4~7, 공동번역개정판
소돔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동성애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닿은 부르짖음은 괴롭힘을 당한 사람들의 억울한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돔성의 진짜 죄악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학대와 괴롭힘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롯의 집에 손님으로 찾아온 천사들에게 대한 소돔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입니다.
최근에 저는 프랑스로 입양되어간 아이가 그곳의 양부모에게 어떻게 학대를 당했는지를 들려주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불쌍한 한국의 입양아들은 낯선 나라에서 노리갯감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학대는 어느 때나 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일본에서 살해된 조선인들의 숫자는 수천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그 원혼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지 않았을까요? 최근에 일본 수상 기시다는 선진국 7개 나라의 지도자들을 초청한 행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히로시마 원폭 한인희생자 위령비에 참배를 했습니다. 히로시마의 피해는 참으로 처참합니다만 그보다 먼저 일본인 자경단이 조선인을 죽이도록 방조한 일본정부의 책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억울한 조선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애굽을 왜 심판하셨을까요? 저는 애굽도 역시 나그네와 이방인을 학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굽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외국인은 히브리인들입니다. 그들은 요셉이라는 전설적인 영웅을 따라 애굽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우대를 받았지만 점차 괴롭힘을 당했고 마침내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당한 학대는 영아살해로 이어집니다. 사내아이를 잃은 히브리인들의 곡소리가 어찌 하늘에 닿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하시면서 애굽의 맏아들을 다 죽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영아뿐 아니라 성인까지 장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심판은 이방인에 대한 학대의 결과였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못된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을 착취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착취를 방조하는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이 심판을 선포하셨을 때 그 메시지는 유사합니다. 그것은 약자를 괴롭히고 착취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양을 잡아먹는 목자라고 지도자들의 악행을 고발했습니다(겔 34:3). 예수께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도적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막 12:40, 눅 20:47).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 그리고 학대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나라는 강대국이든 이스라엘이든 가리지 않고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은 어떤 곳일까요?
4.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주시는 세상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새 창조를 선포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통해서 새롭게 열리는 세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십니다. 이사야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사야 65:17, 25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세상에 대한 그림을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입니다. 이리는 어린 양을 잡아먹는 짐승입니다. 사자도 소를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고, 사자는 소처럼 짚을 먹습니다. 뱀은 통째로 다른 짐승을 삼키지 않고 흙으로 양식을 삼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해함도 상함도 없습니다.
한때 독일은 프랑스와 유럽 나라들을 잡아먹는 이리였고 사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독일은 이웃 나라들과 함께 화폐를 공유하고 상생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서로를 향하여 긴장하고 무기를 쌓아 서로를 겨누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은 독일과 주변 나라들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아직 아닙니다. 남북은 군비경쟁을 하고 있으며 서로를 향하여 정밀타격할 미사일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 미사일들이 떨어질 좌표를 이미 지정해 두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도 양국 지도자들이 화해의 손짓을 하고 있지만 두 국민 사이에 있는 원한과 감정들은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났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는데 아직도 한반도에는 평화가 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늘을 향한 부르짖음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억울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제주4.3사건과 여수ㆍ순천 민중항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한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에 담아 다시는 독재자들의 총구가 시민을 향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일도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평화와 공존의 세상입니다. 그것은 천상에서 펼쳐진 그림이 이 땅에서 실현될 모습입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사죄와 화해를 통해서 적국의 나라들이 평화와 공존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나라 독일은 나찌의 부당한 명령을 제대로 판단하여 거부하지 않고 유대인을 살해한 말단 직급의 군인과 경찰들을 추적하여 지금까지도 법정에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철저한 사죄와 회개를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철저한 사죄와 회개만이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쉼을 줄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 세상이 오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이 오지 않겠습니까? 원한이 남아 있는데 또 사죄를 해야 하는 것이냐 라고 반문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행동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제주도에서 죽은 사람들은 빨갱이라느니 광주에서 1980년에 빨갱이들이 설치고 다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우리 사회가 사죄와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맞을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유럽의 상황과 한번 비교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손흥민 선수는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양인입니다. 유럽에서 뛰는 동양의 선수들은 인종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유럽에는 아직도 동양인과 아프리카계 흑인을 차별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년 5월 7일 손흥민 선수가 교체되어 나올 때 상대팀을 응원하는 관중 한 사람이 눈을 찢는 행동을 하면서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 일에 대한 영국프로축구협회의 대응은 단호했습니다. 그 사람을 경찰에 알리고 영원히 그 경기장에 들어올 수 없게 막았다고 합니다.
수많은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눈을 찢는 행동으로 동양선수를 조롱할 때 그것은 즉시 문제가 되고 바로잡혀집니다. 이것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입니다. 차별과 조롱과 비방을 해도 가볍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 고통이 신음이 되고 신음이 부르짖음이 되어 하늘에 닿을 때 그 사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심판이 무엇입니까? 심판은 세상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개입이자 활동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새롭게 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희망하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이런 확신이 충만했습니다.
5.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약속대로 성령이 교회에 임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령강림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2장에 잘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드린 지 십일째 되는 날,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했을 때 제자들은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게 된 확신은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 설교에 잘 드러납니다. 그 메시지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확증하신 사건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는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변론을 합니다. 그 변론에서 베드로는 공회에서 대제사장의 주장에 반박합니다. 대제사장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증거하여 그 죽음의 책임을 공회에 돌리려는 것 아니냐고 심문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사람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면서 진실을 증거했습니다. 진실은 무엇입니까?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 백성에게 죄를 용서받고 회개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자신들이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증인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사도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도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어떤 점에서 증인일까요? 이것에 대하여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에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16~21
이것은 예언자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요엘의 예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에 심판을 선언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요엘을 통하여 그 백성에게 심판의 날을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예루살렘은 군대의 공격을 받아 망하고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이제라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들은 심판을 당한 후에 다시 빚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새 사람이 된 백성에게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예를 얻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주님은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남녀노소 할 것없이 다 성령을 받아 예언자처럼 말하고 환상을 보며 하나님의 뜻에 정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확증하시려고 하늘에는 기사를 땅에는 징조를 보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기사와 징조는 한 마디로 하면 피와 불과 연기입니다. 이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을 보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미 왔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성령의 강림입니다. 이제 120명의 신자들에게 일제히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백성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은 피와 불과 연기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은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으니 그것은 예언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 세대의 끝이며 세상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이제 모든 육체에게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다 일어나 방언도 말하고 예언도 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피와 불과 연기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는 전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이렇게 증거했을 때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것을 인정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피와 불과 연기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함께 망하고 교회는 거기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군대가 일어나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 산으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오순절 교단은 성령강림을 은사와 능력의 관점에서 이해했습니다. 세계선교를 위한 능력을 부어 주시기 위하여 성령이 임한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은 성령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성령충만을 받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성령강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새롭게 생각해 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이 자신들이 목격한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증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새 일을 시작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가득하게 될 때마다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때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개입이자 활동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세상을 심판하셨고 어떤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예루살렘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애굽의 왕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예수님의 권고를 듣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그 백성에 대한 심판뿐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심판을 내리시면서 동시에 자기 백성을 그곳에서 구원하시고 새로운 언약백성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산헤드린에는 사망선고를 선언하시고 자기 백성에게는 새로운 징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 성령강림입니다. 사도들은 구약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 새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도들은 자신들이 지금 만물의 마지막에 살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예루살렘에 임할 피와 불과 연기이며, 그 마지막은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새 언약백성이 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위대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이 살고 있음을 사도들은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성령이 증거하고 있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동안 성령강림을 은사적인 측면에서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새로운 의미에서 성령강림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서 새 일을 행하신다는 증거로 성령강림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일은 심판이며 새로운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에 죄가 가득하면 그 세대를 심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하신 일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세대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애굽의 전역에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그들이 죄로 자기의 세대를 어그러뜨릴 때 바벨론과 모압, 암몬 같은 민족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마다 새로운 백성이 태어났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에 제자들은 자기 세대가 말세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 시대의 지도자들과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이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실 것인데, 그들이 바로 교회 즉 자신들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 일을 이루시며 그 심판과 새 창조의 증거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제자들은 확신했습니다. 그것이 성령강림의 의미라고 제자들은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를 살펴보시며 하나님은 다시 심판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100년전에는 일본의 관동지방에서 억울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피와 불과 연기의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지금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러시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나라에는 어디에서 누가 어떤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어떤 약자들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원한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설 것입니까? 억울한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자리에 서라고 하나님은 교회를 자기 백성과 대리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영혼들이 누구인지를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령의 이런 음성을 듣지 않고 은사나 능력만을 받고자 한다면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것입니다. 아니 성령은 심히 근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이 너무 크면 하나님은 우리나라 교회에 심판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3장의 권면을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브리서 3:15~19
<끝>.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에서
같은 주제로 좀더 짧게 설교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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