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조씨 시조단묘에서 동쪽으로 마을길을 따라 1km정도 이동하면 성승장군부부묘가 나온다
2차선 길가에 최근에 조성한 듯한 성승장군의 신도비가 먼저 보인다 그 맞은편 언덕의 조그만 숲에 묘가 있다
성승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적곡(赤谷)으로 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後) 성석용(成石瑢)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 1440년(세종 22)에 경상도병마절제사를 거쳐, 1446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0년(문종 즉위)에 정조사(正朝使) 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같은 해 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세조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에게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자 아들인 성삼문을 비롯,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김질(金礩) 등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들과 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 등의 무신을 포섭하여 배후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조종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해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벌일 때에 거사하기로 정하였다. 동지중지추원사 유응부와 당상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 뒤에 별운검(別雲劒)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는 명을 내려 거사는 중지되었다.
한명회 등 계유정난 주축세력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한명회는 과거에 여러번 떨어질 정도로 학문에는 찌질했으나 이런 정치적 수완능력 및 상황판단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에 뒷날 관가(觀稼: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 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불안해하며 장인이자 정승급인 우찬성 정창손에게 말하면서 배반, 세조에게 밀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들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잡혀가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다. 이 때 아들 성삼문·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1784년(정조 8)에 판서 엄숙(嚴璹)의 상소로 성삼문 아버지 성승도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오늘날 성승에 대한 상세한 행장이나 전기 등이 없는 것은 당시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삼문 등 사육신에 대한 신원문제가 중종 이후 매 왕권마다 이어지다가 1692년 숙종 때 판부사 김덕원과 홍주 유생들이 청원해 해결된다
숙종18년 임신(1692년) 3월 25일 고 부총관 성승의 관작을 복구하다
고(故) 부총관(副摠管) 성승(成勝)의 관작(官爵)을 복구했다. 성승은 성삼문(成三問)의 아비로서 육신(六臣)들이 죽음을 당하였을 적에 성승도 끼었었다. 임금이 이미 육신의 관작을 복구하자, 홍주(洪州)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기를,
“성승의 분묘(墳墓)가 본주(本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데 그가 살던 집과의 거리가 가까와 몇 리뿐이고, 성삼문의 아내도 그 옆에 장사했는데, 성승 부자(父子)의 가산(家産)은 모두 관아에서 몰수했었습니다. 본도(本道) 연산현(連山縣)에 있는 성씨(成氏) 가문의 전민(田民)이 지금 충훈부(忠勳府)에 속해 있는데, 듣건대 그 노비[臧獲]들이 지금도 해마다 한 차례씩 초혼제(招魂祭)를 차린다고 합니다. 육신들의 관작을 이미 복구하셨고 보면 성승에게도 다르게 할 것이 없습니다. 또 그 전민(田民)도 도로 내주어 남아 있는 분묘에서 나무하거나 목축하는 것을 금할 수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해부(該府)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복주(覆奏)하기를,
“성씨 가문의 전토(田土)를 지금 마땅히 내주어야 하는데, 노비(奴婢)에 있어서는 의거할 만한 문서가 없으니, 본부(本府)의 노비 중에 연산현(連山縣)에 있는 사람들을 특별히 나누어 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했다.
성승장군 묘지에서 또다시 노은동 방향으로 채 1km 못가서 성삼문의 처 연안김씨의 묘소가 나온다
역시 2차선 길가 언덕 높이 있다
성삼문이 대역죄인으로 거열형(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처형을 당한 후 그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병자 9월 7일자 내용이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부녀(婦女) 내에 이소동(李小童)의 아내 천비(千非), 이공회(李公澮)의 아내 동이(同伊),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비을개(彌飛乙介)ㆍ딸 계금(繼今)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주고,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고,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ㆍ딸 내은금(內隱今)ㆍ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ㆍ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주고, 이현로(李賢老)의 아내 소사(召史), 민보창(閔甫昌)의 아내 두다비(豆多非), 김유덕(金有德)의 아내 금음이(今音伊)ㆍ딸 옥시(玉時)는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ㆍ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황보흠(皇甫欽)의 아내 석을금(石乙今), 박쟁(朴崝)의 아내 오덕(吳德)ㆍ딸 효비(孝非)는 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에게 주고,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ㆍ딸 가구지(加仇之)ㆍ말비(末非)ㆍ막금(莫今), 성삼고(成三顧)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살 된 딸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에게 주고, 이승윤(李承胤)의 아내 가은비(加隱非), 지화(池和)의 아내 막금(莫今)은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주고, 이휘(李徽)의 아내 열비(列非), 허조(許慥)의 아내 안비(安非)ㆍ딸 의덕(義德)은 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에게 주고, 이자원(李滋源)의 아내 유나매(維那妹), 이개(李塏)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右參贊) 강맹경(姜孟卿)에게 주고, 이윤원(李潤源)의 첩 분비(粉非), 이경유(李耕㽥)의 아내 효생(孝生)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징석(李澄石)에게 주고, 박인년(朴引年)의 아내 내은비(內隱非),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보배(寶背)는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아내 소사(召史), 고덕칭(高德稱)의 아내 보금(甫今)ㆍ딸 신금(信今)은 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에게 주고, 이해(李諧)의 아내 종금(終今)ㆍ딸 불덕(佛德)ㆍ불비(佛非), 김유덕(金有德)의 누이 막장(莫莊)은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중손(朴仲孫)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누이 선비(善非), 조완규(趙完圭)의 아내 소사(召史)ㆍ딸 요문(要文)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숙주(申叔舟)에게 주고, 이석정(李石貞)의 아내 소사(召史), 권자신(權自愼)의 아내 어둔(於屯)ㆍ딸 구덕(仇德)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권준(權蹲)에게 주고, 우직(友直)의 아내 오대(五臺), 김현석(金玄錫)의 아내 영금(英今)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남(權擥)에게 주고, 윤영손(尹令孫)의 아내 탑이(塔伊)ㆍ딸 효도(孝道), 이반경(李反敬)의 첩 막생(莫生)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에게 주고, 김문기(金文起)의 딸 종산(終山), 최득지(崔得池)의 첩 지장비(地莊非)는 대사헌(大司憲) 최항(崔恒)에게 주고, 성삼성(成三省)의 아내 명수(命守),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효도(孝道)ㆍ딸 산비(山非)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에게 주고, 성맹첨(成孟瞻)의 아내 현비(現非), 최사우(崔斯友)의 첩 옥금(玉今)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주고, 심신(沈愼)의 아내 석정(石貞)ㆍ딸 금정(金正)ㆍ은정(銀正), 성승(成勝)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에게 주고, ....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ㆍ딸 백대(百代), 이명민(李命敏)의 아내 맹비(孟非)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주고,
...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질(金礩)에게 주고,..."
이렇게 그녀들은 공신이나 대신들에게 노리개나 종으로 내려주어 그 치욕을 감당하게 한다
그렇게 세상 못볼꼴, 못할꼴 다보고 몇 십년만에 겨우 풀려난 성삼문 아내 차옥과 딸 효옥은 그래도 끝까지 지아비이자 아버지 성삼문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렸다 한다
그 후 순조 때 정식 제사를 국가에서 관여했다
고(故) 문충공(文忠公) 성삼문(成三問)에 대해 그 방손(傍孫)으로 하여금 따로 사우(祠宇)를 지어 제사를 대신 지내는 의리에다 부조(不祧)의 예(禮)를 적용시키라 명하였으니,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으로 인한 것이었다. 옛날 현묘조(顯廟朝) 때 성삼문의 신주(神主)가 백악산(白嶽山)의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나왔었는데, 아직까지 사손(祀孫)을 정하지 못하였기에 방손으로 제사를 주관하도록 택정(擇定)할 것을 청하자,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고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삼문은 조선의 가장 절의있는 인물이 되기까지 45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극한의 고통을 겪다 살아난 인물이 된다
성삼문처 차옥도 이제는 편히 눈을 감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