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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28
로마서 3장 21-26절
사도신경의 마지막 내용은 영생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죄 사함, 몸의 부활과 함께 주의 몸 된 교회에게 주실 은혜로운 행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때 영생이라는 말 자체는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할 때 영원히 산다는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도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영생을,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영벌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단순히 영원히 산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벌과 반대되는 복된 내용이 영생 안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의 시작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 지식, 그리고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영생의 시작을 맛보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것을 영원한 기쁨의 시작으로 표현하는데, 시작할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끝난 이후에는 더욱 완전한 것으로 누리게 됩니다. 요리문답 자체는 이 생명이 끝난 이후에는 내가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한 적도 없는 완전한 복락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그 가운데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것으로 영생을 설명하지만, 생명이 끝난 이후라고 할 때 몸의 부활 부분에서 확인한 것처럼 몸의 부활 전이 있고 몸의 부활 후가 있습니다. 몸의 부활 전에도 완전한 복락을 소유한다고 할 수 있고, 또 그 가운데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몸의 부활 전까지 임시적으로만 영생의 완성에 참여할 뿐입니다. 영생의 완전한 참여는 몸의 부활 이후인데, 이때 영원한 기쁨을 맛보며 모든 완전한 복락을 소유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가 천지의 창조주임을 믿습니다.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섭리하시는 분이심도 믿는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하시고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거기로부터 오사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성부와 성자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도 믿는데, 그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나아가 거룩한 보편적 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으며, 죄 사함과 몸의 부활, 그리고 영생이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모든 것을 믿을 때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묻는데, 59문입니다.
59문. 이 모든 것을 믿으므로 그대는 지금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며 또한 영생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합2:4, 롬1:17 요3:36).
우선 사도신경의 모든 내용을 참되게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구원의 내용을 성령 하나님께서 적용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지도 않는 사람에게 죄 사함이 있다, 몸의 부활이 있다, 영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모든 내용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사도신경의 모든 내용을 참되게 믿는 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받는 유익은 무엇인가?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사도신경 내용 가운데 죄 사함과 관련해서 설명할 때 은혜로 내게 그리스도의 의를 베풀어 주셨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60문. 그대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까?
답.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됩니다(롬3:21-28, 5:1-2 갈2:16, 엡2:8-9 ,빌3:8-11). 즉,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거슬러 극심한 죄를 범하였고 그것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나(롬3:9-10, 약2:10-11) 또한 여전히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는 것을 나의 양심이 고소하지만(롬7:23), 하나님께서는 내게 공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딛3:4-5), 순전히 은혜로(롬3:24 엡2:9),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과 의와 거룩함을 내게 베푸시고 전가시키셔서(롬4:3-5, 창15:6, 고후5:17-19, 요일2:1-2), 마치 내가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나 스스로 이행한 것처럼 여기십니다(롬4:24-25, 고후5:19,21). 나는 믿는 마음으로 그런 은덕을 받아들일 뿐입니다(요일3:18, 행16:30-31, 롬3:22).
우리는 이미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살핀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지만(4문),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5문). 그럼 왜 이런 본성을 가지게 되었는가?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6문).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그의 아내와 함께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하는 것입니다(7문). 이때 중요한 것은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출생을 따라 난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으로 태어나며, 그런 죄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야고보서 2장 10절과 11절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즉 율법은 어느 하나만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열에 아홉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범한 것이 됩니다. 달리 말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킬 때만 가능하게 되는데, 죄인인 사람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율법의 요구는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해석하신 율법의 내용을 보면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에 대하여 실제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 번째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간음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고 말씀하실 만큼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도 죄로 여기십니다. 이런 율법의 요구를 죄인 된 자가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중생된 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되면 더 이상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은 없지만(롬8:1), 바울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3)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율법의 요구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적으로만 아니라 내적으로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중생에 앞서 모든 사람에 대한 다음의 선언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로마서 3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그리고 그 결과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 말씀과 같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공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과 의와 거룩함을 내게 베푸시고 전가시키셔서, 마치 내가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나 스스로 이행한 것처럼 여기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먼저 21절을 보시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에 다른 것으로 의롭다 하실 방법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에서부터 증거를 받은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기록되어 있었는데,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원복음으로 알려진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은 율법 가운데 의식법을 통해서도 나타났고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도 나타났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문을 통해 좀 더 살펴볼 것인데, 일단 로마서 3장의 본문을 계속해서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3-26)고 말씀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 가운데 일부를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주고자 하셨는데,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종으로 있던 자들을 사기 위해 그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죄인의 화목을 위한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가 무엇인지를 24절 ‘속량’이라는 단어와 25절 ‘화목제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데, 속량은 죄 값을 지불했다는 의미이고 화목제물은 그 죄 값이 그리스도의 피임을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내놓으시되 피 흘려 죽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이라도 의를 주시는 데 보탬이 되는 게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로마서 4장으로 가시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라고 하면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형벌로 이 내용을 설명하는데, 이러한 내용 외에도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을 내게 베푸시고 전가시킨 것을 그리스도의 의의 내용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부분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가되는 의와 관련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 다시 말해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형벌로 말미암아 마치 우리가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것처럼 여겨주실 뿐만 아니라(수동적 순종),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을 마치 우리가 행한 것처럼 의와 거룩함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전가시켜주신다(능동적 순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인성을 입으신 것,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에 순종하신 것, 그리고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등 그의 모든 순종으로 인하여 이루신 보상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로마서 5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8-19) 여기서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한 모든 사람의 정죄입니다. 그리고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많은 사람의 의롭다 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많은 사람의 의롭다 하심입니다. 그리고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빌립보서 2장 8절과 함께 이해하자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셨는데, 어디까지 낮추셨는가? 죽기까지 복종하실 만큼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 복종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낮아지심 전체가 순종의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과 4절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정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도록 하는 것 전체가 율법의 요구라면 바로 그 일을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구약 스가랴 3장 4절에서는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더러운 옷을 벗기는 것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것까지의 내용이 의롭다 하심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뭔가를 한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리문답은 하나님께서는 내게 공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은혜로 그 모든 일을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서 3장에서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3-5)
오늘 본문인 로마서 3장 24절에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원인이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바 그의 완전한 보상과 의와 거룩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의미에서 로마서 3장 27절은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원인, 어떤 공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께만 자랑의 이유를 돌려야 합니다.
칭의와 관련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얀 판 브뤼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그렇게 간주하여 바라보시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로운 자들로 드러나게 하여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시고, 죄책에서 해방하여 주셨다는 선언입니다. 달리 말하면 의롭게 된다는 말은 우리가 죄 없는 자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르시누스는 이런 의롭다 하심이 율법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불의한 사람에게 의의 특질들을 주입시킴으로써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복음적인 의미로, 불의한 자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며, 그를 죄책에서 사면시키고, 그에게 형벌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에게 전가된 다른 분의 보상 때문에 이루어지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로 공로가 그것입니다.
그럼 믿음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며, 26절 끝에서는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요리문답을 통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데, 믿음이 하는 역할을 무엇인가?
이신칭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텐데,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실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하면 믿음을 하나의 행위로, 믿음을 하나의 공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때 강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게 아니라, ‘믿음’에 강조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 외에 다른 방도가 있다고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하나의 행위, 하나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61문에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61문. 그대는 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나의 믿음이 가치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받으실 만 한 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보상과 의와 거룩함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이기 때문이며(고전1:30-31, 2:2), 또한 그 의를 받아 나의 것으로 삼는 데에는 오로지 믿음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롬10:10, 요일5:10-12).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할 때 ‘믿음으로’란 오직 믿음의 대상으로 말미암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의 보상과 의와 거룩함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는 그 어떠한 의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믿음을 믿음의 대상으로 말미암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요리문답의 설명처럼 나의 믿음이 가치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받으실 만 한 자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믿음을 하나의 행위로, 믿음을 하나의 공로로 보는 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란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깨닫고 취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리문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60-61문). 그리고 이때 오직 믿음이란 율법의 행위와 대조가 되는데,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와 대조된다는 의미에서 믿음이기에 믿음 자체가 율법의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사람은 의롭게 되는데, 믿음이 공로를 세움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그것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수단이기 때문에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by faith), ‘믿음으로’(through faith)라는 말은 사용하지만, ‘믿음 때문에’(on account of faiht)라는 말은 결코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문은 로마 가톨릭의 의식한 것인데, 그들은 ‘믿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뿐만 아니라, ‘믿음 때문에’라는 말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마치 믿음이 그리스도의 의를 적용시키는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존재로 간주하도록 해 주는 어떤 특정한 행위 혹은 공로일 수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데, 이 부분은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믿음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의의 원인이 되는 바 하나의 공로가 되어 버립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보상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결과 됩니다. 때문에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말은 거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 신율법주의라는 게 있는데,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이들은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두지 않고, 비록 불완전하지만 신자 자신의 신실한 의에 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량했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그들 모두를 ‘구원 가능 상태’로 인도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옛 율법인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의를 요구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믿음과 회개, 비록 불완전하지만 참회하는 죄인의 신실한 순종에 만족하는 ‘새로운 법’인 은혜의 법을 도입했기 때문에 새로운 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 즉 우리의 믿음과 회개를 통해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과 회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무엇까지 동원하는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곡과 악기를 사용합니다. 분위기를 만들어서 인위적으로 회개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좋은 믿음인 것처럼 말합니다. 소위 부흥회나 수련회 등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신율법주의는 말 그대로 새로운 율법주의일 뿐입니다. 율법주의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친다면, 신율법주의는 율법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를 바꿔버렸을 뿐입니다. 율법주의가 율법을 공로로 여기게 하는 것이라면 신율법주의는 믿음을 공로로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이 수단조차 누가 우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도 다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실 때 그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결코 믿음을 하나의 행위로, 하나의 공로로 여길 수 없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도록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란 의미에서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하지만 믿음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