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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데이의 역사 뒷담
수수께끼의 금등지사란 과연 뭘까?
걸오군이 칼침 맞아가면서도 홍벽서 야간알바를 뛰는 이유. 그것은 금등지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수수께끼의 키워드, 금등지사란 과연 뭘까요? 금등은 쇠줄로 단단히 밀봉한 상자인데, 서경의 고사에 등장했던 소품이기 때문에 그 이름 그대로 금등이라고 불립니다.
영조의 금등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것은 정조 17년인 1793년입니다. 이 해에 정조의 최측근인 영의정 체재공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지요. 그동안 사도세자의 죽음은 아무도 언급할 수 없었던 금기사항이었기 때문에, 체재공의 상소문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제공자였던 노론은 체재공의 행동에 크게 분개할 수 밖에 없었죠.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영조의 뜻이었으니, 이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영조에 대한 모욕이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때 채제공이 공개한 것이 바로 문제의 금등입니다. 체재공의 주장에 따르면 영조는 당시 왕의 비서관인 도승지였던 체재공을 은밀히 불러 이 금등을 전하며 소중히 보관하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체재공은 사도세자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갔던 인물이므로, 영조는 그를 믿고 금등을 맡긴 것이지요.
정조는 신료들에게 이 금등에 담긴 문서 중 영조가 쓴 한 구절의 시구를 공개하였는데,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삭장 지팡이여(장례 때 상주가 짚는 지팡이), 삭장 지팡이여, 그 누구의 것이던가. (이 일을) 금등에 담아 천년을 간직하면서, 내 품에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또 생각하노라.’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시는 죽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면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는 영조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지요. 이처럼 영조가 금등을 통해 사도세자의 처형을 후회하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체재공의 주장도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정조는 금등을 덕분에 노론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중심으로 하는 화성 개혁도시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됩니다. 영조는 죽기 전, 손자인 정조가 노론들과 맞서 싸울 수 있으려면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벗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먼 훗날 그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마지막 전언이 담겨진 금등을 마련한 것입니다. 위태로운 위험 속에 손자를 두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할아버지 영조의 마지막 선물인 셈이지요.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남긴 마지막 편지'라는 설정만 따오고, 체재공이 아닌 윤희 아빠가 어딘가에 숨겼다 뭐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듯합니다. 역사적 사실이라면 체재공네 집안에 있겠지만, 드라마니까 비밀스럽고 은밀한 데에 숨겨져 있겠지요? 어쨌건 간에 흥미진진한 보물찾기가 빨리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9강에 등장한 금난전권
성균관 스캔들에는 원작과 다른 소재들이 상당수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9강에서 방송된 금난전권입니다. 비록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정조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소재라고 생각되어서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금난전권이 시전이 아닌 난전의 영업을 금하는 법조항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조 시대에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아마 대부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합리한 금난전권은 왜 생긴 것일까요? 그 이유는 조선이 겪은 두 번의 비극,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간신히 겪고 난 조선 왕실은 말 그대로 '거지' 였습니다. 왕실운영이 어려운 상태였지요. 그때 왕실의 재정을 지원해 준 것이 도성의 필수품을 담당하고 있던 육의전이었습니다. 조선 왕실은 그 대가로 육의전에게 독점적인 상업권을 보장해 줍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자호란이 또 일어났습니다. 조선 왕실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고, 그 대가로 시전상인들 모두에게 독점영업권을 허락해 줍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00여년 후, 조선 왕실은 그때의 대가를 치러야 했지요. 비대해져 버린 시전들이 경제 전반을 장악해 버린 겁니다. 당시 조선은 농공업의 비약적인 발달과 외부문물의 유입 등으로 전국적인 유통망이 필요해진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시전들이 유통망을 독점하고 횡포를 부려대는 겁니다. 당시 시전상인들은 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난전들의 삥을 뜯었다고 합니다. '맞고 꺼지던지, 물건을 반값에 넘기던지….'하고 껄렁껄렁 협박을 하면서 말이지요. 시전들은 자신들의 독점권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했고, 그를 위해서 당시 실세인 노론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가 성균관스캔들에서 잘 묘사되어 있고요.
드라마에서 앞으로 어디까지 금난전권 이야기를 다룰지는 모르겠지만,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비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우리의 정조전하께서는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데 성공을 하시게 될 겁니다.
역시 우리의 정조전하는 참말로 멋지십니다!
순두전강과 정조의 진짜 무서움(?)
‘전강’이란 궐에서 보는 시험, 즉 임금 앞에서 보는 시험을 말합니다. 전강의 '전'자가 '전각'할 때 쓰는 그 '전'자거든요. 문신들이 시험 보면 '문신전강', 중국어시험은 '한학전강' 이런 식입니다.
하지만 전강의 기본은 뭐니 뭐니 해도 성균관 유생들이 치르는 시험입니다. '순두'를 직역하면 '열흘의 머리'가 되므로, 아마도 1일,11일,21일에 치러진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열흘에 한 번씩 치러진다는 의미.
전강의 시험방식은 기본적으로 복불복시스템입니다. 이산정조에도 잠깐 나왔었는데 통 안에 작은 나무막대기가 들어있고, 그걸 뽑으면 '시경 **편' 하고 책이름이 쓰여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책 3과 본문' 이나 '세계지리책 동남아시아 단원' 뭐 이런 식으로요. 이 작은 막대기를 '생'이라고 부르는데, 생을 뽑는 즉시 닥치고 본문암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미션에 실패하면........... 야, 야외취침?!!!
어쨌든 국왕 앞에서, 어려운 유교경전을, 그것도 복불복으로 외우는 시험이므로 매우 짜릿짜릿한 시험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대부분의 왕들은 전강을 싫어합니다. 잠이 쏟아질 것 같은 유교경전을 외우는 것도 싫지만, 듣고 있는 건 더 짜증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정조전하는 전강과 세상의 모든 시험을 열렬히 애정 했습니다. 본인 스스로의 취미가 공부였던 데다가 인재양성이 최대과제였기 때문에, 정조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시험열풍을 일으킵니다.
그의 개혁 기지였던 규장각에다가 '초계문신'이라 해서 37세미만의 젊은 관료들을 데려다가 3년간 공부만 죽어라 시킵니다. 월2회 구술고사, 월1회 논술고사, 그리고 수시 수행평가, 깜짝 이벤트로는 1박2일 합숙하며 논어 외우고 다음날 정조 앞에서 몽땅 외우기……. 뭐 이런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시험문제 출제도, 성적관리도 정조가 직접 합니다. 종종 강의도 직접 했고요. 심지어 시험에 낙제하면 의금부에 끌려가서 왜 공부를 안했는지 추궁을 당하기까지 했다는군요. 그야말로 공부지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스템이랄까요.
정조는 초계문신들을 괴롭히는데 그치지 않고 규장각 각신들 및 기타 일반신료들에게도 시시때때로 시험을 출제하여 자근자근 괴롭혀 주었습니다. 이렇게 열흘에 한 번씩 성균관에 와서 시험압박을 주며 즐거워하기도 하였고 말입니다.
무, 물론… 정조의 의도는 좋았습니다. 본인이 공부를 좋아하니, 남들도 함께 하면 좋으리라는… 뭐 그런 좋은 의도였겠지요. 정조의 엄마인 혜경궁 홍씨의 증언에 따르면, 정조는 대여섯살 때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새벽같이 일어나 세수하고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일반적인 경우는 신하들이 경연을 통해 왕을 가르치고, 훈계도 좀 하고 그러는데 정조 시대만큼은 꼼짝없이 왕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했지요.
그래서 결론은......? 너무 공부를 잘해도, 주변사람이 피곤하다는 거! ㅠㅠ
복수의 정체
오늘 뒷담의 주인공은 지난 10강 도둑사건의 진범인 복수 소년입니다. 대충 보아하니 뭔가 낮은 신분인 것 같기는 한데 대체 뭘 하는 친구인지 좀 더 살펴볼까요?
복수소년은 본인의 입으로 '나는 반촌에 사는 반쪽짜리 사람인 반인이다' 뭐 그 비슷한 소개를 합니다. 소년의 정체는 반인이라는 건데…. 자, 우선 복수 소년의 차림새를 볼까요? 낡은 옷차림에 단발(?)머리, 중요한 것은 단발머리라는 겁니다. 조선 시대에 머리를 자른 남자는 단 한 종류밖에 없습니다. 노비이지요. 에엑? 복수소년 노비였어? 딱히 주인이 있어 보이진 않던데? 사실은 소년이 살고 있는 반촌 전체가 노비촌입니다. 그것도 성균관에 소속된 전속 노비촌이지요.
아주 옛날 고려의 문신이자 유학자였던 안향이란 분이 장학재단 기부금으로 성균관에 기부했던 노비들이 계속 살면서 노비 촌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 안향이란 아저씨로 말할 것 같으면,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분입니다. 자기가 도입한 성리학을 성균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줬으면 좋겠다.뭐 이런 의도로 거액의 기부를 한 겁니다. 그 이후로 반촌의 노비들은 성균관 유생들의 잡다한 일들을 도와주고, 성균관 관리도 하면서,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균관 노비들이면 성균관에서 밥도 주고 월급도 주고 이래야 할 텐데,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가가 거지가 되는 바람에 성균관 예산도 팍팍 깎여버립니다. 그래서 노비들까지 먹여 살릴 돈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반촌의 노비들이 살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쇠고기의 도축입니다.
조선에서는 쇠고기 먹다 걸리면 끌려갔습니다. 농사를 짓는 귀한 소를 먹다니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 뭐 이런 비난을 받으면서요. (사실은 몰래몰래 다들 먹었지만 서두…….) 그런데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쇠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균관 유생들이었습니다. 조선을 이끌어갈 젊은 천재들에게 아까울 게 뭐 있겠습니까. 소도 먹이고 닭도 먹이면서 무럭무럭 키워야지요. 그래서 성균관 유생들은 매 끼니마다 쇠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반촌의 노비들은 기본적으로 소를 도축할 줄 압니다. 덕분에 성균관 재정이 어려워졌을 때, 반촌의 노비들은 소를 도축하고 판매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도 잘 알다시피, 조선에서 소를 잡는 건 백정의 몫이고, 백정은 가장 천대받던 천민의 계급이었습니다. 단순한 노비보다도 훨씬 더 하급한 족속으로 취급받았죠. 그러니까 "반촌노비인 반인들=백정 " 이었고, 반인이라고 하면 다들 개무시를 했던 겁니다. 어떻습니까, 복수소년이 비뚤어질 만하지요?
이렇게 천한 계급인 복수소년이 감히 성균관 유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따박따박 (그것도 반말로) 말대꾸를 하다간 대번에 잡혀갑니다. 심지어 복수소년은 왕 앞에서도 말대꾸를 하더군요. 왕은 얼굴만 마주봐도 잡혀갑니다. 그 자리에서 맞아죽어도 당연할 중죄란 말입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복수소년의 시건방짐에 가슴이 두근거리더군요.ㅠㅠ
등장인물 당파 상세정리 (노론)
드라마에서 주로 등장하는 세력은 노론입니다. (좌상, 병판, 하인수와 아이들 등) 그런데 이 자식들이 왕인 정조를 '금상'이라 부를 정도로 건방이 하늘을 찌릅니다. 정조 역시 그들의 작태를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있지요. 왜일까요? 노론의 시건방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최숙빈의 아들입니다. (네, 동이 입니다) 인현왕후랑 장희빈이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일 동안 최숙빈과 어린영조는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실제 장희빈에게 죽을 뻔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조를 데려다가 왕으로 만든 이들이 바로 노론입니다. 수많은 노론이 숙청당하면서까지 그들은 영조를 기어이 왕으로 만듭니다. 항간에는 그들이 장희빈의 아들이자 영조의 형이었던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러니 영조와 노론의 관계는 생명의 은인이자 공범자의 관계, 뭐 그런 끈끈한 사이입니다. 왕일지라도 노론들에게는 함부로 할 수가 없었지요. 노론 역시 '네까짓 것을 왕으로 만든 이들이 누구인 줄 아느냐' 이런 마인드였고요. 그런 꼴을 보며 자라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당연히 이런 노론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고, 자기가 왕이 되면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이랑 손을 잡겠다. 뭐 이런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과는… 뒤주 속에서 죽었지요.
노론들에게 왕은 더 이상 '하늘이 내린 존재' 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존재였죠. 정조 역시 현재 권력의 실세인 노론에게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드라마 속 정조는 사람 좋게 허허 웃고 있으면서도, 굉장히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저것들을 한번 제대로 밟아줘야 하는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기회만 엿보고 있는 상태지요.
정조가 유난히 성균관의 젊은 인재들을 탐내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당파와 상관없이 자신의 힘이 되어줄 아군이 절실히 필요하니 말입니다. 노론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비장의 카드인 '금등지사'역시 현재 정조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기입니다.
성균관 경쟁률은 얼마나 되나?
성균관 스캔들이 제작된다는 소리를 듣고 성균관에서 펄쩍 뛰었다는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아니, 무엄하게 우리 성균관을 어쩐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이 뉴스를 듣고, '아 꼰대들 진짜~!' 라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면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성균관이란 그야말로 '초 엘리트들의 집합체'이자 '꿈에 그리던 학문의 전당' 뭐 그런 거였으니 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의 수험공부는 5세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서삼경 및 역사, 문학서적을 완전히 암기하는데 성공하면 과거시험에 응시합니다.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데, 1차로 전국에서 240명을 뽑습니다. 서울대 신입생 입학정원이 3000명인 것을 생각한다면 경쟁률이 짐작될 겁니다.
요즘처럼 재수, 삼수 정도가 아니라 10수, 20수 이런 아저씨들도 다 같이 몰려오기 때문에 그 경쟁률은 엄청납니다. 오죽하면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각종 부정부패가 넘쳐나겠습니까. 10수쯤 하게 되면 목숨을 팔아서라도 합격하고 싶어지겠지요. 여기까지가 이선준이 처음 본 시험인 소과 초시입니다.
그 다음 시험은 서울에서 치러지기 때문에 15일에서 30일씩 걸려서 시험장에 도착을 합니다. 소과 복시의 시험과목은 두 개인데, 유교지식을 테스트하는 생원시, 문장력을 테스트하는 진사시 중에 선택 가능합니다. (아무래도 진사시가 경쟁률이 높습니다)
생원시에서 50명, 진사시에서 50명 이렇게 100명을 선발하는데, 이 100명이 성균관 입학의 자격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성균관 커트라인이 전국 100등인 겁니다. 전국 고3들만 대상으로 해도 전국 100등이 하늘에 별 따기인데, 전체 재수생들을 다 합한 상태에서 전국100등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성균관 꼴찌도 완전수재란 의미이지요.
때문에 성균관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꼰대아저씨들은 어벙하게 묘사되는 성균관 몇몇 유생들을 보면서 '에잉 쯧쯧….' 막 이러고 계실 겁니다. '성균관이 어떤 곳인데 저런 물건들을 데려온 게야!' 하고 말이지요. 어벙한 친구들은 아마도 시험이 아니라 아버지 빽으로 들어온 애들이겠지요?
이런 엄청난 성균관 수재들 중에서 다시 대과를 통해 추려진 33인만이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조선시대의 관료들은 난다 긴다 하는 수재들의 집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푼수떼기 대사성도 만만한 인물인 아닌 거지요. 좌상 아저씨 쯤 되면 이건 천재를 넘어 만재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등장인물의 평균아이큐가 가장 높은 드라마가 바로 성균관 스캔들이 아닐까 합니다.^^
약용선생의 위험한 발언
딸내미가 남정네들이랑 놀러나간 줄도 모르고 성균관을 찾아 헤매던 윤희의 어머니. 마침 지나가는 약용선생을 만나 학부모 면담을 하게 됩니다. 약용선생은 딸내미를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윤희엄마에게 이런 말을 남기죠.
“천주학에서는 하늘 아래 사내와 계집이 똑같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차피 조선에서도 언젠가….”
아니, 시방 뭐라고 하셨습니까요? 약용선생의 이 말은 단순히 '멋진 말' 따위가 아닙니다. 당장 관아로 끌려갈 중대한 위험발언이지요. 왜냐하면 천주교는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 천주교를 금지한 이유는 약용선생의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똑같다, 그리고 노비와 양반도 똑같다. 고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을 발칵 뒤집을만한 위험한 사상인 것이지요. 게다가 조상에 대한 효를 최우선하는 조선사회에서 제사는 우상숭배라는 주장을 펼치니, 금지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약용선생의 집안은 조선천주교역사를 언급할 때 반드시 언급될 만큼 유명한 집안입니다. 그 집 형제들이 다 천주교를 믿었고, 조선 초기 천주교 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집안입니다. 약용선생의 형인 정약전이 조선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과 동갑내기 절친 이었을 정도로요. 성균관스캔들의 배경이 되는 정조 15년은 아직까지 천주교가 큰 문제가 되기 전이었으니까 아직은 괜찮겠지만, 역시나 저런 위험한 멘트를 아무데나 던지다니, 약용선생 참말로 간도 크십니다. 그만큼 윤희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크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자, 그럼 이런 위태위태한 비밀을 간직하던 약용선생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조가 죽은 다음해,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대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대적인 천주교도 탄압이었습니다. 정조가 그렇게 이뻐라 했던 약용선생이 그렇잖아도 미워죽겠는데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었지요. 게다가 다른 천주교도들도 약용선생 친구들, 즉 청에서 들여온 실학에 호의적이던 남인 지식인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거기에다 천주교도 중에는 정순대비가 가장 죽이고 싶었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입니다. 드라마 이산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순대비의 오빠인 김귀주는 정조에게 유배당한 뒤,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 뒤로 정순대비는 '내 오빠를 죽였으니 네 동생도 죽어야지?' 하면서 정조의 동생들을 하나씩 죽입니다. 은언군은 정조가 단식투쟁까지 벌이면서 필사적으로 구해낸,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생이었습니다.
1801년, 정순대비는 즐거운 마음으로 은언군을 사형시킵니다. 정약용의 형 정약종도 이때 사형당합니다. 정약용은 또 다른 형인 정약전과 함께 유배형을 당했고, 조선후기 최고의 천재라 불렸던 그의 재능도 함께 묻히게 됩니다. 아, 덕분에 수많은 책을 쓰셨으니 그건 전화위복이었던 걸까요?
어쨌건 간에, 성균관 스캔들 12회에 나왔던 짧은 말 한마디에는 그의 인생을 뒤바꾸게 될 엄청난 속뜻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어제 그 대사를 듣는데, 갑자기 울컥 슬퍼졌더랬습니다!
좌상은 정말 나쁜 놈일까?
성균관 스캔들은 정조와 잘금 사인방, 그리고 좌상과 노론벽파가 선악의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조=선, 노론=악 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럴까요? 정말 노론은 쳐 죽여 마땅한 나쁜 놈들의 집합이었던 것일까요?
일부 사학자들은 정조가 조선멸망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우리 정조전하가 왜? 어디가 어때서?
즉위 초부터 정권의 실세인 노론들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정조는 통치기간 대부분을 왕권확립에 올인 합니다. 그가 꿈꾸는 개혁을 단시간에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처이긴 했습니다만, 일종의 '코드인사'와 '친위기구 설립의 남발' 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정조전하가 오랫동안 생존하셔서 그 끝을 완전히 맺어주셨더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어중간한 개혁의 미완성 지점에서 갑자기 사망했던 겁니다. 그리고 왕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정치구조를 물려받은 사람은 11살 먹은 그의 아들 순조였습니다. 한자도 읽을 수 없는 수준의 학력과 편협한 정치관으로 가득한 정순대비와 함께 말이지요.
게다가 학문에만 너무 열중하셔서 여색을 게을리 한 우리의 정조전하는 달랑 아들 하나를 남겨놓았을 뿐이라서 조선왕가의 존속 자체가 어려워지게 됩니다. 결국 직계왕손은 곧 끊기게 되고 강화도로 귀양 가 있던,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왕?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하는 수준의 천진난만한 동네총각이 말이죠. 이분이 24대왕 철종에 올랐으니 조선의 멸망은 그야말로 명약관화한 처지가 되고 만 것이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내각제 국가로 프로그램 된 나라입니다. 왕의 권한을 최소화하고 신료들의 의결을 거쳐야만 국가가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모든 기초시스템을 계획한 희대의 천재, 정도전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자 야심가였던 이방원은 그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기껏 쿠데타 일으켜서 새 나라 세워놨더니, 죽 쒀서 개주게 생겼던 겁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 형, 기타 그들의 가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선 3대왕에 오릅니다. 그리고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정도전을 살해하고, 국왕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 이후,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미묘한 갈등구조 속에서 계속되게 됩니다. 왕이야 강한 왕권이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왕도 왕 나름이지 연산군 같은 애들이 왕이 되어서 제멋대로 굴면 곤란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들을 몇 중으로 설치해서, 혹시라도 망나니 왕이 나올 때를 대비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해제한 것이 바로 정조이고요. 덕분에 꼬꼬마 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벌어지는 엄청난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없었습니다. 정조가 만든 정치구조는 정조처럼 울트라 멋지고 부지런하며 근면성실하고 똑똑하기까지 한 그런 왕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정조보다 정치에 더 빠삭한 좌상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래서 정조의 독주를 불안하게 여기는 것이고요. 좌상 자체는 부패한 정치가라기보다는 정조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왕권국가의 나라가 아닌, 신권국가가 되어야 안전하게 국가가 운영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된 갈등관계에 대해 가장 잘 그려내고 있는 드라마가 바로 박진우 작가, 곽정한 감독의 ‘한성별곡-正’ 입니다. 한성별곡은 정조 시대에 대해 가장 날카롭고 정확한 해석을 내리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여기에서의 정순대비나 노론일파는 '惡'이 아니라 또 다른 '正'입니다. 다만 그들이 믿는 올바름의 가치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파멸적인 결말을 가져왔을 뿐인 것이지요.
참고로 여기서의 正은 ‘절대적인 올바름’이란 의미가 아니랍니다. ‘본인이 옳다고 믿는 가치’일 뿐이지요. 정순은 나쁜 짓을 하려던 게 아니라 자기 딴에는 옳다고 믿는 바를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노론의 가치관이 결국은 시대에 뒤떨어진 착오였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든 노론=사리사욕에 눈먼 탐관오리들 이라는 등식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그들이 믿고 있는 한계 내에 옳다고 여긴 것을 위해 행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현대의 가치관으로 그들 모두를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강조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조선은 당파싸움만 하다가 말아먹은 나라다.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당파'는 '붕당'이란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그 역기능만큼이나 순기능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으니. 정답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결국 누가 옳았던 것일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여러분이 믿는 '正'에 달려있습니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진실
이 이야기는 성균관 스캔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보여서, 한번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정조 하면 독살이니 죽음의 미스터리니 하는 말들이 꼭 따라다니는데요, 도대체 왜 정조의 죽음에만 유독 그런 걸까요?
자, 정조가 죽을 당시를 한번 살펴볼까요? 성스에 나오는 정조는 아직 노론벽파에 대응할만한 충분한 힘을 기르지 못한 상태이지만, 정조말년 즈음이 되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버립니다. 1795년, 정조는 6000여명의 대규모 행렬을 이끌고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을 찾아갑니다. 나의 왕권이 이 정도다, 덤빌 테면 덤벼봐라, 하는 정조의 세력과시였던 셈이지요.
그로부터 5년 뒤인 1800년, 정조는 몹시 심각한 '대국민 담화문' 비슷한 걸 발표합니다. 이것을 오회연교라고 하는데, 담화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사도세자 죽인 놈들, 응분의 대가 받아야…. 재상 경질하고, 내각 전면 개편……."
노론벽파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뉴스였습니다. 이거 잘하면 줄줄이 연행되어 콩밥을 먹거나 사약 먹게 생긴 겁니다. 게다가 노론 내쫓고 남인을 들이겠다 이런 얘기 아닙니까. 노론들이 발칵 뒤집힐 만한 충격발표였던 겁니다.
그리고 한 달 후, 정조는 급사합니다. 아니 대체 왜?
정조의 사인은 종기였습니다. 오회연교가 1800년 5월 30일이었는데, 6월 1일에 정조의 허리에 종기가 나더니 엄청난 속도로 번져가기 시작한 겁니다. 6월 24일에는 종기가 등을 뒤덮고 머리 뒤쪽까지 번진 데다가, 그 크기도 10cm나 되어서 정조는 편히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문제인 점은 왕의 몸에는 칼을 못 댄다는 거였습니다. 곪은 종기를 칼로 쭉 째서 고름을 빼내면 될 텐데, 그걸 못하니 미적미적 곪아가기만 하는 겁니다. 아 그냥 째라고!!! 그 때 심 환지란 신하가 '종기엔 이게 특효!' 하면서 새로운 치료법을 제안합니다. 연훈방이라 불리는 치료법이었는데, 이게 수은을 태워서 그 연기로 종기를 삭혀보겠다 뭐 이런 치료법이었습니다. 아니, 멀쩡한 사람을 수은중독으로 죽이자는 겐가! 이런 어이없는 치료를 계속하는 동안, 정조는 점점 쇠약해져갔고, 마침내 6월 28일에 사망하고 맙니다. 아니 이런 황당할 데가! 종기 나고 한 달 만에 급사라니 이 무슨 어이없는 경우랍니까?
그런데 정조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킨 사람이 그의 최대정적인 정순대비였습니다. 부득부득 정조를 따로 만나고 싶다고 우기더니, 탕약 들고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통곡을 하면서 정조가 죽었다는 겁니다. 옆에서 지켜본 사람 말로는 정조가 죽기 전에 “수정전….”이라고 한마디를 했다는데, 수정전은 정순대비가 사는 전각 이름입니다. 이쯤 되면 딱 견적이 나오지 말입니다. ‘정순대비가 독약을 들고 왔고 수은중독을 꾸민 심환지는 공범이다.’ 라는 거지요. 심환지는 노론벽파였고, 정조 즉위 때 반대한 놈이었으며 어의인 심인의 친척이었습니다.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충분한 그런 상황이었던 거지요.
정조가 죽은 후, 왕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쫙 퍼질 정도였습니다.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안타까움에, 정조 독살설은 점점 더 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진짜 독살당한 것일까요?
2009년, 정조의 친필편지가 발굴됩니다. “오오~ 정조님하의 친필편지~!!!” 하며 흥분했던 학자들은 편지를 본 뒤 대략난감에 빠지게 됩니다. 당시 정조관련 책을 쓰고 있던 해피도 "끼얏끼얏, 친필편지~~" 하다가 "헐… 도, 독자들의 꿈과 희망은 어쩌라고ㅠㅠ" 하면서 그냥 못 본 걸로 덮어버리기로 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에…그러니까… 이 편지들에 따르면, 정조는 성격이 더러웠으며, 신하들에게 진짜 4가지 없이 말하기로 유명했으며 무엇보다 심환지랑 친했습니다! 뭐, 뭐라고? 심환지랑???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환지 경, 나에겐 경뿐~♥ 노론벽파를 몰아낸다니, 그건 경들의 오해♥ 앞으로도 우리 친하게 지내~♥" 라는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현재 매우 중한 병을 앓고 있다는 고백이 들어 있었습니다. 정조 독살론자들이 대략 뻘쭘해지는 내용이었지요. 그러니까… 꼭 종기가 아니더라도, 정조는 이미 죽을병에 걸려 있었던 겁니다. 학자들은 워낙에 다혈질이었던 정조가 뇌혈관 질환을 앓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여기에 종기치료를 하면서 세균감염으로 인한 급성패혈증 같은 게 왔었을 거란 겁니다.
아 진짜… 독살설이 훨씬 두근두근한데…. 그냥 자연사는 낭만이 없잖아! ㅜㅜㅜㅜ
결국, 요즘 학계에서는 정조 자연사 가설이 더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이상하다니까! 독살일지도 모른다고! 진실규명 플리즈!!!” 하는 의견들도 많답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진실은 며느리도 모른답니다.
첫댓글 우우~ 지금보니.. 참으로 민망합니다 그려.. 웹용으로 쓴 건... 진짜 유치뽕짝이군요 ㅜㅜㅜ 부, 부끄러운거다ㅏ 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