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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7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7
설교 제목: 이스라엘과 교회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1~13
https://youtu.be/Rnv3xUT-vvM?si=Mggz3R8iUZWJhM34
설교를 위한 묵상:
이스라엘과 교회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질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교회의 관점이나 입장에 대한 이야기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다. 그들은 나중에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민족에서 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교회에게 좋은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죽였다. 그 이유로 서양에서는 대대로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있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된 데에는 사실 선교사들의 영향이 크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은 세대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가오는 천년왕국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시작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관점을 따르면 이스라엘은 종말의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시계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개신교회 신자들 중에는 이스라엘을 미국과 함께 우방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의 기원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이 전쟁에 대하여 국제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비난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마스를 비난하기도 한다. 국제정세를 바라보면서 판단을 할 때도 이스라엘에 대한 관점이 중요해진다.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이 동족인 유대인들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들이 잘린 가지가 되고 이방인들이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고 그 자리에 교회가 대신 들어온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명 대체신학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의 시대를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끼어든 세대로 이해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가지게 되어 분명한 입장을 갖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설교에서 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 이야기 전체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현재 이스라엘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은지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설교 개요:
1.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는 민족, 이스라엘
2.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3.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
***
1.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는 민족, 이스라엘
오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전쟁 중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은 사랑과 혐오의 대상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민족도 이 민족보다 세계인으로부터 더 광범위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민족도 이 민족보다 더 극심한 미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랑과 혐오의 대상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에는 그 민족의 기원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원 이야기는 물론 단군신화입니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야기는 출애굽 이야기입니다. 지도자 모세를 중심으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은 한 나라와 한 풍습을 가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입니다. 왼쪽으로는 이집트가 있고 위쪽으로는 히타이트문명을 일으킨 고대국가가 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앗시리아와 바벨론, 페르시아가 순차적으로 세력을 떨쳤습니다. 물론 그 후에 일어난 헬라제국과 로마제국도 동방정벌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징검다리처럼 딛고 갔습니다.
중동의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를 영어로 부를 때 코리아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 지금부터 천년 전에 이 땅에서 살던 나라인 고려를 가리킵니다. 북한은 나라 이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정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조선인이라고 부르거나 코리안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랜 역사가 남긴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도 그렇습니다.
세계에는 여러 민족이 있는데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 나라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온 세계에 전도를 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때, 처음에 기독교인은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무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도를 한 결과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통치자들까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양 세계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주류 종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이스라엘인들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한 후로 한 세대가 되지 않아서 완전히 근거지를 잃었습니다. 그들의 근거지에서 중심이 되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나서 이스라엘은 뿔뿔이 흩어져 유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나라 없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소수민족으로서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유대인은 자연스럽게 교회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양 세계에서 미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문학가들은 유대인을 매우 일그러진 죄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연극대본에서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유대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서양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이 확산될수록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했으며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커져서 십자군 전쟁 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마 유대인의 인종학살이 극에 도달한 것은 독일 나찌정권의 홀로코스트일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히틀러의 인종말살명령인 홀로코스트에 의해서 살해된 유대인들의 수가 육백만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미움과 박해를 받았으면 민족이 소멸되는 것이 당연한데 유대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재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그 수를 종합하면 약 천오백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사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서양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나 보다 하면서 그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인 생각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라는 그림보다는 그리스도를 낳은 민족이라는 그림으로 더 크게 다가오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 교회들에는 유대인 열풍이 불어 유대인의 자녀교육이나 쉐마교육, 그리고 유대인의 처세술 등 유대인을 배우자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1948년에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독립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하게 돌보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이 들어서면 그것이 주님의 재림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성경 예언이 얼마나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시계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현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 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지나간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죽이기도 했으며 흠모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저는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교회는 이스라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사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부르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 언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시려는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 결과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후에 복을 명하신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로 이 세상에는 죄가 가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세상이 다시 공허와 혼돈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을 선언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담 이후로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고 피조세계를 회복하실 것을 다시 시작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바로 이 피조세계의 회복을 위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하나님의 새 창조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이 세상을 위하여 계획하신 선한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글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부르신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로마서 8:28~30). 이것은 이 세상을 회복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려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예정하시고 소명하시며 칭의와 영화를 얻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바로 이를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들에게 나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땅을 주셨고 백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신 땅에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살 수 있도록 성막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할 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에게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담처럼 범죄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호세아 6:1, 6~7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은 아담처럼 하나님의 동산으로 인도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었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않고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여 진실과 자비를 행하는 대신에 자기 욕심을 따라 거짓과 사욕을 좇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열방을 향한 모델국가가 되어야 할 그들이 도리어 열방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일깨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그곳을 더럽힌 장사치들을 몰아내시고 성전의 지도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붙잡아 때리고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성전과 율법을 가진 백성이라고 자신을 자랑하면서 복음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2:28~29
사도 바울이 볼 때 유대인 동족이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이며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헛일이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인 정의와 인자를 행하는 것이 참된 유대인이며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참 이스라엘이라고 사도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새롭게 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므로 이제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계인들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1~13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인의 모임인 회당에서 쫓겨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이방인들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어갈 수 있는 새로운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회는 유대인의 공동체에서 쫓겨났지만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 되었고 참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소중히 여기고 그 경륜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는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3.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과 교회는 어떤 관계입니까? 중동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자신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유대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율법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 남자들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구별하신 이유는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열방의 빛이 되며 세상만국의 머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면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시고 그들을 세계 모든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입증된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나 민족에게 연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성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원 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셨는데 접붙인 가지를 아끼시겠느냐고 교회에 편지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이스라엘의 본보기를 보고 교훈을 받으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유대인들을 죽이고 박해하는 일에 동참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가 자신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소명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고 육적인 이스라엘을 흠모하고 동경한다면 이것 또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온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에게 편지하기를 그들이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고 할례 받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을 따라가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 되고 만다고 말했습니다(갈 2:21). 하물며 오늘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계승했다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진정한 계승자이며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임을 명심합시다. 도리어 우리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저버리고 사는 모습을 가엾게 여깁시다.
사실 현재 이스라엘 정부가 주변 민족들과 전쟁을 벌이는 모습은 인류를 공존과 상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비추어 볼 때 그릇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들이 로마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것도 사실 하나님의 경륜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 길을 주시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에게 내린 저주입니다.
옛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식사를 유월절에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유월절을 지킵니다.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는 식사인 성찬을 행합니다. 어느 식사가 더 좋은 것입니까? 유월절의 식사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성만찬입니까? 우리는 이제 분명히 깨닫습니다. 표면적 행위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 마음이 진실하고 언약의 의미에 합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전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 성찬을 행한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자신들만 특별한 민족이라는 우월의식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헛일이 되는 것처럼, 교회가 성찬식을 하면서 우리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안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헛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 부부를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을 맺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시면서 이것은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시고 마시라 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면서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언약을 맺으실 때 그들에게 무엇을 의도하셨겠습니까?
이 모든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실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사시고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위하여 언약의 백성들은 식사를 하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릅니다. 그 주님의 뜻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에 더욱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언약의 식사를 하면서 다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으니 주님이 그 뜻하신 바를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마찬가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복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다짐은 베드로 앞에서 로마 군인 고넬료가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언약의 식사를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을 기억하고 그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읍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말씀을 지키고 따를 것을 다짐합시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계명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그 뜻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진실되고 따뜻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미 6:8). 예수님을 본받고 살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의와 자비, 그리고 신앙을 따를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며, 양심을 일깨워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찬식이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은 것을 다시금 기억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그 언약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며, 참 유대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