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흩어진 사람들의 승차감 신앙의 괴력>의 줄거리:
똑같은 힘 역(力)자가 들어가도 능력과 위력과 괴력은 의미가 다르지요. 능력 위에 위력, 위력 위에 괴력이라 해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박해를 받아 모든 터전을 잃고 흩어진 예루살렘 교인들. 이들에게서 이 세상을 이기는 괴력이 나타납니다. 인자 예수님 안에서 보이는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 관계 안에 올라탄 승차감에서 나오는 괴력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의 승차감 신앙의 괴력
(사도행전 8장 3절~8절)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흩어진 사람들의 승차감 신앙의 괴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흩어진 사람들의 승차감 신앙의 괴력’
힘을 표현하는 어휘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능력, 위력, 괴력과 같은 말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괴력은 이상할 정도로 강한 힘을 의미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어감에 따라 차등을 두자면 능력보다 더 큰 것이 위력이고, 위력보다 더 큰 것이 괴력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승차감 신앙인들이 바로 이러한 괴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승차감 신앙과 하차감 신앙을 비유로 말씀드렸습니다. 사울을 필두로 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하차감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승차감 신앙을 가진 스데반 집사님을 미워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에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승차감 신앙을 가졌던 교인들은 이제 흩어져서 삶의 터전을 등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교인들에게서 신앙의 괴력이 나타납니다. 교인들이 보인 힘은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큰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힘이기에 능력이나 위력이 아닌 괴력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승차감 신앙과 하차감 신앙이라는 표현은 참 유익한 비유입니다. 자동차는 삶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피부에 닿는 비유라고 여겨집니다. 어제에 이어서 승차감과 하차감이라는 비유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차감이라는 말은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쓰이는 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고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하차감(下車感)은 “승차감에서 파생된 말로, 차에서 내릴 때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에서 받는 느낌을 이른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승차감(乘車感)은 나를 향한 다른 사람의 시선이 끊어진 상태에서 오로지 자동차 안에 올라탄 채로 받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단어의 정의를 신앙에 대입해본다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데 유효하고 아주 요긴한 비유적 단어들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하기입니다. 관계하기는 내 마음이 상대방을 바라봄이 유지될 때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를 상대방의 마음에 올라타는 일이라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계는 비단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사이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즉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승차하여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사람들의 눈에는 포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우선시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온전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승차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볼 때에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승차감 신앙이라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채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을 하차감 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과 특히 바리새인들은 승차감 신앙을 하차감 신앙으로 바꿔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관계는 곧 상대를 바라봄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라보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사울 같은 경우를 보면 젊은 시절부터 장래를 인정받던 인재였습니다. 사울은 당시 유대교의 가장 큰 과제였던 교회 탄압에 앞장서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유대교적 배경과 특히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사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들의 신앙과 사상은 한 마디로 하차감 신앙이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차한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나님을 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상황에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승차감 신앙이란 마음이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관계에 승차하는 것입니다. 승차감 신앙은 찬란한 하나님과 그림자 세상을 느낍니다. 반면 하차감 신앙은 찬란한 세상과 빛바랜 하나님을 느낍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차감 신앙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에 마음을 둔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기를 원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와 특히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사상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하차감 신앙은 신앙에 있어서 큰 위협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차감 신앙에 찌들어 있었던 때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마음의 초점은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결과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적어도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는 분들께서는 그러한 일들을 과거의 일로 회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마음에 하차감 신앙의 잔재가 남아있어서 고민하고 계신 분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하차감 신앙의 문제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그만큼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이러한 하차감 신앙과는 대비되는 승차감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들은 능력이나 위력으로는 부족하여 굳이 괴력이라는 표현을 붙여볼만 합니다. 4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는 무척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가해지자 교인들은 흩어지게 됩니다. 이들은 북쪽으로 사마리아를 넘어서 지중해 연안의 항구인 베니게 지방과 구브로 섬과 안디옥까지 퍼져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디옥은 팔레스타인 북단에 있는 수리아 지역의 안디옥으로써 터키의 안디옥과는 구분되는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이렇게 흩어져서 예수님을 전하게 되는데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그저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교인들의 처한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고 낯선 타향으로 내몰리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누가가 기록한 것은 이들의 고생스러운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이 복음을 전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흩어진 예루살렘 교인들이 열중한 일은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복음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심으로 나와 동일시해야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 시선에는 확인되지 않을지라도 영화로운 광채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보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올라타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에서 느끼는 승차감은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승차감, 자녀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승차감, 돈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승차감, 국가와 민족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승차감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기쁨과 만족과 평강의 승차감이 주어지게 됩니다. 흩어진 예루살렘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복음을 전파하며 다녔던 것입니다.
이러한 승차감 신앙은 이들의 삶을 통해 증거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박해를 받아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먹을 것도 없는 참담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이 가진 것은 바로 승차감 신앙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라탔을 때 나타나는 승차감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담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들의 마음에서는 평강과 만족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온전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일가친지 중에서 나 홀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으레 비난을 걱정하게 됩니다. 특히 경제사정이 안 좋기라도 하면 “예수를 믿더니만 저렇게 망했다.”라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모습이 이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재정적으로도 튼튼해지고 가족구성원들의 삶은 형통하며 자녀들 중에 의사나 판검사가 나오고 적어도 대기업에는 취직을 해야 권위 있게 예수를 믿으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인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어떨까요? 적어도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박해를 받아서 삶의 터전을 버리고 흩어진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살렘 교인들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예수를 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예수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이긴 자들이었습니다.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에 평강이 있고 기쁨과 만족이 있었습니다. 세상 것이 있어야만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고 청년 사울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가치들을 얻기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 계시면서 능력만 허락해주시면 되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능력을 얻고자 열정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유대교를 믿던 바리새인들과 사울의 하차감 신앙 기준에서는 예루살렘 교인들은 저주에 던져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주에 던져졌다고 여겨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주는 변화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아닙니다. 자동차를 탔을 때의 승차감은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올라탔을 때 그 관계가 주는 은혜와 기쁨은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목적에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일들을 마음에서 붙잡았고 보고자 하였습니다. 하차감 신앙으로 빠져들어 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흩어진 예루살렘 교인들이 보여주는 승차감 신앙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이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조금도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기를 목적으로 하는 복음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이 인자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올라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직 나와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든지 승차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승차감이야말로 신앙이고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오로지 인자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소원하는 관계에 올라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후자의 상태에 있다면 세상과의 관계를 올라타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차를 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니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세상 사람들아 나를 봐라.”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름없는 하차감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박해를 받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도 이들을 칭찬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우습게 여기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올라탄 상태에서 승차감의 위력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한 일을 이루게 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괴력을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 5절 이후를 보면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 성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이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성은 유대종교와 바리새인들의 하차감 신앙을 기준으로 볼 때 저주받은 곳이었습니다. 물론 사마리아 사람들 또한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이방인들과의 혼혈이 있었고 잡신들에 대한 신앙 또한 존재하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마리아에 살던 사람들을 개 취급하며 이방인 혹은 저주의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종교와 바리새인들의 마음에서 영화로운 광채를 받고 있었던 것은 나라와 민족의 찬란한 미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과 나라들 위에 우뚝 서게 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마음에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닌 나라와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차감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끝나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로운 광채의 대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나라와 민족의 찬란한 미래를 보면서 마음이 세상과의 관계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준에서 볼 때 혼혈이고 잡신을 섬기는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찬란한 미래가 주어지지 않아야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써 유대종교의 기준과 바리새인들의 기준을 알았기에 자신들이 개 취급을 받고 은혜 밖에 놓인 자들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고 하였습니다. 빌립 집사님이 전파한 복음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면서도 반가운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찬란한 미래가 찾아올 것을 바랄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바라보는 관계의 대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찬란한 이 세상의 미래를 바라보고 세상과의 관계에 올라탔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으로 들어가면 세상 대신 하나님을 찬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더는 저주받은 자라고 비난받을 이유도 없어집니다. 오히려 세상을 찬란하게 여기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저주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빌립 집사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기사와 표적을 행하면서 이러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심을 보았다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대종교의 시선을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올라타서 놀랍고도 경이로운 승차감을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늘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비난받아 온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빌립 집사님이 전한 복음은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하차감 신앙으로는 교회의 박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선봉장 사울이 돌이켜 사도 바울이 되었다는 것부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주도한 박해로 인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이 집사들을 세워서 교회에서 조직화가 이루어지려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박해로 인해 집사들은 행정적 임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어졌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박해로 인해 오히려 복음은 놀라운 파급효과를 가지고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은 의도치 않게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일에 강력하게 참여한 셈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돌이켜 사도 바울이 되어서 직접 복음을 들고 온 세상을 뛰어다니게 됩니다. 사도가 되기 전에도 복음이 퍼져나가는 원인을 제공하더니만 사도가 된 후에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런 드라마틱한 인생의 변화는 달리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박해도 수준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차감 신앙인들의 박해에는 실효성이 없습니다. 하차감 신앙인들의 기준에서 볼 때 박해를 통해 가하고자 하는 것은 손해와 피해입니다. 그런데 정작 교인들은 승차감 신앙인들이기에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의 확신을 갖고 소원하는 대상은 세상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차하지 않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차감 신앙인들이 주는 손해와 피해의 내용이란 전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승차감 신앙인들은 세상을 그림자 속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마음에서 찬란하게 보고 있는 대상이 전혀 다르기에 손해나 피해를 끼친다고 생각해도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차감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찬란하게 보고 있는 대상이 세상이기에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지만, 승차감 신앙인들이 찬란하게 보고 있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올라타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박해가 가해진다고 할지라도 효과적인 실효성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저더러 사울의 입장이 되어서 교회를 박해하라고 했다면 이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제가 사울이라면 “모든 산헤드린공회원들을 설득시켜서 이 예루살렘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압박을 가한다고 해서 이 열정을 절대로 잠재울 수가 없다. 오히려 아무 박해도 하지 말라. 예루살렘에서 너무나 편안하고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자. 장애도 없고 변수도 없고 방해도 없게 만들어 주자. 이 사람들의 마음이 철저하게 안정된 삶의 조건에 밀착되도록 하자. 그러면 무늬만 교회이던 시간이 지나고 점차적으로 교회는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정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쩌면 복음은 예루살렘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차감 신앙인들의 무지함조차 복음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기준에서는 승차감 신앙인들의 마음에서 세상이 그림자 속에 묻힐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을 때는 교인들의 삶이 모든 면에서 순탄할 때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체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어느덧 세상을 있음으로 느끼고 세상의 좋음을 확신하게 되면 세상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죄의 체질을 방치해서 마음이 세상과의 밀착이 이루어지게 되면 하나님은 어둠 속에 묻히시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완전히 이러한 상태에 찌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해서도 이 세상의 삶이 내세까지 이어져나가는 식으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질 때 승차감 신앙은 힘을 잃고 교인도 교회도 없어지게 됩니다.
하차감 신앙인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식의 박해는 진정한 승차감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를 더욱더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올라탄 승차감을 더욱더 강화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이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시장에서든 하나님만을 소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 관계에 올라탄 승차감으로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기쁠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하는 하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승차감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이기는 힘이 능력의 차원인지 위력의 차원인지 괴력의 차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이 지속적으로 기억함으로 하차감 신앙인에서 승차감 신앙인으로 바뀌게 해주시옵소서.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고 위력이 나타나게 하시고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괴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게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