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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서 문제인 점>의 줄거리:
복음 신앙에 최대의 난제는 바로 하필 그 누구도 아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천국에 계시던 독생자가 내려와서 그리스도가 되시고 또 천국의 당신 자리로 곧바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에 있어서 최대 걸림돌이 됩니다. 하늘 아버지가 제일 좋음을 익히 아신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서 문제인 점
(요한복음 6:52~71)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서 문제인 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서 문제인 점”
하필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가 되셨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복음신앙에 있어서 최대 난제 중에 하나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가장 큰 방해가 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정의를 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의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고 구원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정의를 다르게 내려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영인 마음의 공백이 영원토록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그리스도는 마음을 정말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가장 좋다고 느끼시는 것을 사람들의 마음 채움 거리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데에 가장 큰 방해가 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산더나 칭기즈칸같이 왕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권력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여겨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왕이 된 사람이 어떠한 계기를 통해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그리스도로서 자기가 최고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사람들에게도 주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최고로 좋다고 느껴지는 것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해주고, 그것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워주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의 권력이 최고로 좋다고 느끼는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왕의 특권을 주고자 할 것입니다. 돈을 최고로 좋다고 느끼는 재벌 회장이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돈을 많이 벌게 해주고자 할 것입니다. 먹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날마다 맛있는 것을 먹는 사람들이 되게 해줄 것입니다. 옷을 잘 입는 것을 최고로 좋은 것이라 느끼는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그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 모든 사람은 모델처럼 옷을 잘 입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좋다고 느끼는 마음의 채움 거리가 문제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주는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제일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공짜로 주는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좋다고 여기는 것과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 맞아떨어질 경우에 이보다 더 큰 대박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만이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난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천국에 계시던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리고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최고로 좋다고 느끼시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따라서 유일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주시려는 것도 당신께서 최고로 좋다고 느끼시는 바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다시는 함께하지 않게 된 이유이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입니다.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이나 유대종교인들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최고로 좋은 것을 주시려 할 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었다면,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하나 되어 아버지의 좋으심을 느끼시는 분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는 훨씬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에게 좋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당신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거저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좋다고 여기시는 것과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60절을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어렵다고 한 말씀은 54~56절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신 부분입니다. “어렵도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콜레로스(σκληρος)는 “마음이 불편하여 껄끄럽게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껄끄럽게 여겨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6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말씀을 껄끄러워 하는 것에 대해 “걸림이 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걸리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스캔들(scandal)의 어원이 된 표현으로써 “걸림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수준에서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은 알아들은 내용이 너무나 껄끄러워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사셨듯이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와 사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먹으면 예수님이 최고로 좋게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지듯이 우리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최고로 좋게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에 대해 껄끄럽게 여겼던 것은 마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갖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최고로 좋게 여기셨지만 제자들에게 최고로 좋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말씀 시작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서 문제인 점에 대해 말씀드린 것입니다.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같은 왕이 그리스도여서 왕의 권력을 나눠주고자 하였다면 사람들은 껄끄럽게 여기지 않고 환영했을 것입니다. 돈의 좋음을 아는 재벌 회장들이 그리스도였다면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좋음을 아는 분이셨습니다. 하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셨기에 우리는 곤란한 입장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렵다고 느낀 내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안에서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에 대한 포부를 밝히지 않으신 대신에 자꾸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에서 최종적으로 이루실 일은 나라의 독립이나 부강한 나라의 건설이 아니었고 인생의 난제 해결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보아도 이 세상 안에서 최종목표로 삼으신 것은 자신의 죽음이었으니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혁명적 변혁을 기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자꾸 자발적으로 이루실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바랐던 것은 세상을 정복하고 바꾸고 번영을 성취하려는 기백과 의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니 예수님의 지상목표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답답하게도 죽음과 관련하여 영생을 말씀하십니다. 54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셨고, 58절에서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인 영생은 당연히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생보다는 지금이었습니다. 영생보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풀어야 될 당면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영생을 싫어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영생도 중요하지만 아직은 육체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절박한 세상의 필요와 문제들이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영생보다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이고,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건강 문제가 급하고, 돈 문제가 급하고 취직 문제가 급합니다.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이 세상의 문제들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 죽음을 말씀하시고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영생을 이야기하고 계실 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영생을 거부하거나 싫어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많은 문제들을 놔두고 영생을 미리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어렵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모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예고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를지라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목표로 삼으시고 죽음을 토대로 영생을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것 정도는 제자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이 “자발적으로 이 세상 삶을 죽음으로 끝내고 그 죽음을 토대로 영생을 향하자.”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배려가 없는 분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하여 기대에 가득 찬 마음으로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죽음과 영생에 대해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세상의 문제 해결을 관심하던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예수님의 말씀은 갑작스러웠습니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가져왔던 기대와 바람을 포기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생각하셨다면 좀 더 따듯하고 배려 깊은 마음에서 서서히 가르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껄끄러워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박차를 가하십니다. 62~63절을 보면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자꾸 죽음과 영생을 이야기하니까 이 세상에 대해 왜 관심을 갖지 않느냐며 불평을 하는구나.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한마디를 더 하겠다. 나의 최종목표는 이 세상에서 죽어서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서 너희에게 주려는 것 안에는 이 세상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향하시는 최종목적지가 세상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다윗 왕국의 재현 따위가 아님을 명백히 드러내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건강 문제, 돈 문제, 먹거리 문제, 정치적 문제가 전혀 없는 나라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의 최종목적은 이 세상에서 몸과 연관된 영역에서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육체와 연관된 부분에서는 그리스도로서 주실 것도 없고 유익이 될 것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마치 제자들을 내쫓으시며 “나로부터 떠나가라!”고 외치시는 것같아 보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로서 살리려고 하는 것은 영인 너희의 마음이다. 너희의 마음에 영원토록 좋음이 유지될 수 있는 채움 거리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주려고 한다. 그렇기에 내가 그리스도로서 하는 사역 중에는 너희 육체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하나도 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인 나를 그리스도로 믿어서 육체와 관련된 부분에서 유익을 얻으려 생각한다면 떠나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육십 평생을 살았지만 이렇게 냉정한 분이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대상은 예수님을 해코지하거나 비난하고자 했던 자들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고는 하나 본래 인간관계란 기브 앤 테이크가 기반입니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도 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관계방식입니다. 이것을 모를 리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도 그러려니 하시고 제자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죽음을 목표로 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이 육체를 중심으로 육체와 관련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육체와 관련된 삶에 대해 아무런 유익도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을 공언하시면 예수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배려는 염두에도 두시지 않은 채 믿거나 말거나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65절에서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다 쫓아버리시고는 “내가 아무리 너희를 쫓아버려도 아버지께서 내게 오도록 이끄시는 사람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사역을 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전부 예수님에게서 쫓아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오지 못하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이끄심을 따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되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목회의 방향과도 달라 보입니다. 목회를 할 때 성도들이 많이 오기를 바란다면 성도들이 좋아하는 것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것과 말씀에서 제공하는 좋아하는 것이 맞아떨어질 때 찾아옵니다. 이것은 비단 목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싶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제공해주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와 연관된 영역에서 유익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육체와의 연관성에서 어떤 유익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쫓아내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올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끊임없이 발생시키시면서 쫓아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이 사건들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으리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기적을 베푸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들을 표적으로 삼아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하셨습니다.
경전의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 본문 말씀은 참 어울리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 경전의 내용을 한 몸에 담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오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쫓아내심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오게 하시는 사람만 걸러내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아버지께서 속삭이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 “너는 내 자녀다. 내가 너를 자녀로 택했다.”라고 속삭이십니다. 무의식 속에서 속삭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속삭임을 직접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죽음이 좋다면 하나님께서 속삭이신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속삭이시지 않았다면 본문에서 많은 제자들이 떠났던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싫어하며 떠나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죽음이 싫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무의식에서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은 사람들은 이 세상 전체 안에서 수많은 신분과 자리가 있지만 십자가를 자기의 자리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 아들이 인생의 마지막으로 이루신 자리가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설 자리 또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육체를 위해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그 자리가 좋게 여겨진다면 우리 의식이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너는 내 자녀다.”라고 속삭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이끄심입니다. 본문 46절에서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의식중에 속삭이고 계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속삭임을 들은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살자”가 아닌 “이 세상에서 죽자”는 의미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좋은 분으로 느끼는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당신께서 최고로 좋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육체의 연관성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할 수 없는 일은 당신에게 최고로 좋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최고로 좋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것이 여러분의 감사의 제목이고 기쁨의 이유라면 하나님께서 속삭이셨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여서 십자가 생활화에 문제를 느끼고 계시다면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이 더 좋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것과 내가 가지려는 것이 다르다면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십자가 생활화하기를 진즉에 밀쳐버리고 간과하고 망각의 주머니 속에 넣어버린 지 오래된 것입니다. 부디 십자가를 찾아내시기를 바랍니다.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이유는 예수님에게 최고로 좋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을 공짜로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인한 삶을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올바르게 믿을 때 삶은 방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은 전부 아버지의 사랑과 주권 안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 육체의 삶도 대박이 납니다. 본래의 주인이신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주권 안으로 삶이 돌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인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의 유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날마다 생각하며 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로 가는 일에만 주력하는 진정한 제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이 천만다행이고 감사에 감사를 더할 사건임을 고백합니다. 이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아버지가 최고로 좋으심을 믿게 하여주시고 이 믿음 안에서 이미 앞당겨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