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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李基永 |
世界의 文化的 現實과韓國佛敎의理想 -元曉思想은 21世紀 世界를 향해 무엇을 줄수있는가- 李基永 (韓國佛敎硏究院長) I. 세계가 당면한문화적현실 나는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문화적 현실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로서 특징 지울 수 있지않을까생각한다. A.부정적측면 1.기독교의 dilemma 2. Marxism의 dilemma 3.무신론적쾌락주의의 dilemma B.긍정적측면 1.과학의발달 2.화해의 mood 3.동양의재발견 이 밖에도 우리가 열거할 수 있고 또 열거해야 할 다른 특징들을 꼽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 나는 主催者(주최자)의 머리 속에 있는 交叉文化(교차문화)의 현상들이 이러한 특징들 속에서 진전되고 있다는 생각에서 위의 諸事項(제사항)을 摘出(적출)해 본 것이다. 이제 그 各項(각항)에 대한 나의 見解(견해)를 다소 부연해두고자한다. A-1기독교의 dilemma에대하여 지금까지도 dogma의 信仰(신앙)에 熱烈(열열)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事項(사항)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잘못된 設定(설정)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구 어느 宗派(종파)를 막론하고 현실적으로 많이 變質(변질)되고 있고 또 많은 冷淡者(냉담자)들을 내고 있다. 變質(변질)의 代表的(대표적) 例(예)는 解放神學(해방신학)의 胎頭(태두)와 그 現實的(현실적) 社會(사회)투쟁의 激化(격화)이다. 客觀的(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의 눈에는 제아무리 견강부회를 시도한다 하더라도 그 神學(신학)이 聖書(성서)의 올바른 해석이며 기독교의 本質(본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욱이 맑스主義的(주의적) 鬪爭(투쟁)의 血氣(혈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感知(감지)할 수가 없다. 그것은 憎惡(증오)와 破壞(파괴)의 哲學(철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 冷淡(냉담) 의 代表的(대표적) 實例(실례)를 나는 수많은 修道院(수도원)과 神學校(신학교) 建物(건물)이 빈집으로 팔려가고 있는데서 본다. 프랑스의 카톨릭교도가 生涯(생애)에 세 번(태어났을 때, 결혼 할 때, 죽을 때) 밖에는 교회에 안가는 信徒(신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벌써 20여년전부터 잘 알려져 온 사실이며, 지금 그런 상황이 바뀌었다는 징조는 아무데서도 찾아볼수가없다. 나는 기독교의 dilemma는 科學(과학)이 發展(발전)하면 할수록 더욱 커질 것이고, 佛敎(불교), 특히 大乘佛敎(대승불교)의 불타관이 잘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지금까지의 고집스러운 獨善的(독선적) 絶對性(절대성) 主張(주장)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解放神學(해방신학)의 태두와 그 神學理論(신학이론)에 의한 社會革命(사회혁명)투쟁의 정당화 tlh등은 단적으로 기독교가 Marxism 앞에서 무릎을 꾼 實例(실례)라고 나는 본다. 하나님 보다는 사탄적 사람이, 사랑하는 自主的(자주적)마음보다는 强制的(강제적) 制度變革(제도변혁)이 더 效果的(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聖書的(성서적)으로 忠實(충실)한 해석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解釋神學(해석신학)을 내세운 사람들의 순수한 動機(동기)는 인정하지만, 더욱 더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그들이 겪어야 했을 敎理的(교리적)인 葛藤(갈등)이다. 나는 기독교계가 直面(직면)하고 있는 dilemma는 교리해석의 잘못에 있다고 생각한다. 西洋人(서양인)들, 기독교神學(신학)을 만들어 온 西洋人(서양인)들이 한결같이 anthropomorphic한 思考方式(사고방식)에 젖어 있다 보니, 그들은 단순한 비유거나 상징이었던 聖書(성서)속의 神話的(신화적) 사실들을 그냥 그대로 歷史的(역사적) 史實(사실)로서 믿으며 單一回的(단일회적)인 unique한 絶對性(절대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전통을 남겼고, 그것은 dogma化(화)되어 요지부동의 것으로 경색화되고말았던것이다. 기독교신학계는 오늘날 佛敎(불교)와의 對話(대화)를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것처럼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실례가 최근에(1987.10)구성된 Society for Buddhist Chistian Studies의創立(창립)이다. A-2 Marxism의 dilemma Marxism의 dilemma는 이 ideoloie를 정치理念(이념)으로 하는 나라들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人權尊重(인권존중)과 自由(자유)에 대한 渴望(갈망)등 諸現象(제현상)을 통해 나타나고 있고, 또한 計劃統制經濟(계획통제경제)의 非能率性(비능률성)을 통해 노출되고 있다. Marxism이 표방하는 階級(계급)투쟁 暴力革命(폭력혁명)의 실천과제 앞에서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無感覺(무감각)한 服從(복종)만을 계속하게끔 人間(인간)은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이른바 proletaiat 獨裁(독재)의 組織(조직)이 언제까지나 人間(인간)의 自主性(자주성)을 말살한 채 맹목적으로 끌고 갈 수 없다는 自覺(자각)은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소련과 鄧小平(등소평)이 이끄는 中共(중공)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經濟的(경제적) 實利(실리)와 社會福祉(사회복지) 向上(향상)이란 목표달성을 위해 資本主義(자본주의) 實例(실례)에서 무엇인가를 導入(도입)하려고 試圖(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資本主義制度(자본주의제도)와 精神(정신) 자체를 그대로 全的(전적)으로 수긍하는 立場(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오랜 Marxism들에게는 아직도 Marxism과 그 制度(제도)에 대한 일말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國內(국내)에는 당분간 아직도 많은 保守的(보수적) Marxism들이 남게 되겠지만, 人間(인간)은 統制(통제)의 해제라는 條件(조건)이 주어지면 쉽게 虛僞(허위)의 dogma나 ideologie로부터 벗어나 본능적 자유에로 무섭게 달려들게 될 것이다. 그들은 早晩間(조만간) 경제부흥을 이룩할 것이다. 그 다음에 Marxism지도자들은 人民(인민)을 어디로 어떤 哲學(철학)으로 끌고 가려할것인가? 그들이 지녔던 Stoic하기까지 했던 無神論的(무신론적) 生活(생활) discipline이 다시 쉽게 西方(서방) 생활패턴을 따르게 될 것 같지는 않은 그들 앞에는 여러 가지 선택적으로 수용할만한 미지의 세계, 미지의 철학들이 놓여 있다. 나는 그 중에 하나가 대승불교일 수있다고생각한다. 대승불교가 올바로 이해되기만 한다면 Marxist들이 자기네 경색된 이론을 보완 수정할 많은 긍정적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소련이나 중공이나 북한의 경우에 오히려 그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것은 불교가 한때 자기네들이 전통문화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어 왔다는 특수성 때문이다. 물론 그 특수성은 역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의 물결은 반드시 복고를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련이나 동구권제국은 기독교 국가이면서 그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배척해 온 국가성립의 배경을 갖고 있다. 그들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는 불교적 사고방식이 너무나 생소한 것으로받아들여질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여 Marxism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쉽게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그것이 시대착오적 낙후된 의식밖에 못 가진 대중들 사이에서는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Marxist militant였던 사람들이 자기 주의주장의 어떤 허위와 오류를 발견하였다면 그들은 다시 오늘날과 같은 덜 여과된 기독교 사상에 심취하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틀림없이 대승불교에서 안심입명의 경지를 발견하게될것이다. A-3무신론적쾌락주의의 dilemma 나는 현대산업사회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본능적 쾌락추구의 풍조를 무신론적 쾌락주의라는 말로 표현해 보았다. 이러한 풍조는 선진제국 미. 영. 불. 독. 일 등에서는 물론, 어떠한 종교적 금계를 스스로 갖지 않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생활태도이다. 나는 불교의 중생이라는 말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잘 표현한말이라고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잘못된 삶의 방식을 사는 존재들을 중생(sattva, sat "생명"을 -tva "지니고 있으나 " sat생명 자체가 못돼는 존재) 이라고 한다. 이 말은 Bodhi-sattva[菩薩(보살)], 깨달음을 향해 가는 중생(sattva 즉 보살)에 대비되는 말로서 불교적 삶의 분류에서 흔히 육도중생이라고 하여 地獄(지옥), 餓鬼(아귀), 丑生(축생), 修羅(수라), 人(인), 天(천)등으로 열거되는 생존양식(way of living)을 말한다. 이들의 공통적 결함은 그 마음가짐의 무지몽매성[愚痴(우치)/ 痴(치)또는 無明(무명)] 이기주의적 본능욕 [貪慾(탐욕) 또는 貪(탐)], 시기질투 및 忿怒(분노), 憎惡(증오)등의 심정[瞋?(진에)/瞋(진)]의 셋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것을 흔히 마음속의 貪(탐)/瞋(진)/痴(치) 三毒(삼독)이라고 하며, 이 탐/진/치 三毒(삼독)은 모든 惡(악)과 苦痛(고통)과 재액의 원인이라고 이해된다. 이 三毒(삼독)은 나아가 貪(탐)/瞋(진)/痴(치)/慢(만)/疑(의)/見(견)이라는 여섯 가지 마음의 타락상으로 확장 이해되기도 한다. 元曉(원효)는 이러한 마음의 타락성은 이기주의 아집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대승기신론의입장이다. 여기서 무신론적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기독교적 유신론을 전제로 하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세속"이라는 현실의 일면성밖에는 생각 못하는 그래서 전혀 다른 이 현실의 彼岸(피안), 초월적이건 부정적이건 현실 저편에 잇는 空(공)이랄까 無(무)랄까 하는 실상을 못 보는 그러한 태도를 무신론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세속주의(seculaism)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어도 좋다. 이러한 인간의 원천적 몽매성은 어느 누구에 있어서나 풀어야할수수께끼로남아있다. B-1과학의발달 오늘날 세계는 한편 B에 열거한 바와 같은 긍정적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는 과학의 발달이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대자연의 신비를 벗김으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대자연의 신비 앞에 더욱 경건해지게 하는 이익을 주었고,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한 지구의 마을로 좁혀 주었다. 이제 문화의 교차현상이 더욱 활발해진 것은 그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큰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불교적 우주관, 영원한 佛身觀(불신관) 이해에 긍정적 기여를 해왔다. 불교는 추호도 과학의 발달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가장 냉철한 합리주의자, 예컨대 물리학의 대가일수록 불교를 마음으로부터 좋아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아닐것이다. B-2和解(화해)의 mood 지구가 한 마을이 되면서부터 최근 40여년간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밀접해진 시대이다. 대전쟁과 국지적 분쟁등이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그런 일은 앞으로도 있을 터이지만 그것은 인간관계가 밀접해진 하나의 결과이기도 하다. 싸우다가 더욱 친해지는 경우도 있듯이, 이 지구상의 인간들은 점차 화해의 무드속에 있음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Teillard de Chardin이 Omeg point로의 converstion을 생각한 것은 그가 전혀 자기와 자기 문화와 이질적인 것이었던 중국대륙의 문화와 인간이 자기와 친숙해지게 되었을 때, 얻어진 직관일지도 모른다. 동서의 화해, 남북의 화해는 곧 이루어지고야말것이다. B-3동양의재발견 2차대전前(전)까지 근세사에 있어서 동양은 세계무대 위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2차대전후 50년대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동양인들은 구미의 대중들과 사회에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중국이 그들 서양인들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인민주의라는 Marxism의 변형에 뒷받침되는 동양 아닌 동양이었을 따름이다. 네루의 인도가 역시 동양을 알리는 구실을 했다. 한편 태평양전쟁으로 귀결된 일본군국주의와 일본인 economic animal이 동양을 무시할 수 없는 경지로까지 끌어 올려 놓았다. 지금 우리는 NIEC이라고 불리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세계에서 선망과 경계의 대상이되고있다. 오늘날 동양은 아직도 세계의 다른 나라들을 향해 다른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깊이 반성하며 천착하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준비하는 노력이 부족한 형편이다.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점에 공동의 관심을 표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가치있는일이다. II. 元曉思想(원효사상)이 줄 수있는것 나는 元曉(원효)의 사상에서 세계는 많은 것을 배우고 그 dilemma들을 해결하며, 오늘의 세계가 맞이하고 있는 희망적인 進運(진운)을 더욱 활발히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상적 측면의 기여 가능성을설명하고자한다. 나는 지금 구태여 한국불교라고 하지 않고 元曉思想(원효사상)이라고 제한하고 있는 이유를 먼저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60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에는 여러 가지 국면이 나타났었다. 지금 목전에 있는 한국불교만이 한국불교가 아니다. 출가 또는 재가의 僧侶(승려)들이 조직하고 주체가 되고 있는 한국의 宗團佛敎(종단불교)만이 한국불교의 참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排佛(배불) 500년 동안의 억울한 분위기속에서 살아온 餘習(여습)을 담고 있다.물론 그 속에서도 6세기에서 8세기에 걸친 신라시대의 찬란한 업적을 이룩한 圓光(원광), 元曉(원효), 義湘(의상) 등이 남긴 영광의 맥락이 있다. 이 한국불교의 훌륭한 전통은 시간이 흘러간다 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변함없는 광채를 발할 것이 틀림이 없다. 元曉(원효)는 그 세 사람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상가였다. 元曉(원효)는 오늘날 그 종교적 신앙이 무엇이든, 그 사상적 호적이 어디 이썬, 모든 한국 지성인의 스승됨에 異論(이론)을 품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 元曉(원효)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元曉(원효)를 세계에 널리 알리지 못한 책임을 나는 누구보다도 절실히 통감하고 있다. 나는 세계의 지성이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배우지 않아도 벌써 세계는 元曉(원효)가 말하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다고 할 몇몇 징조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元曉(원효)의 사상은 元曉(원효) 한 사람이 만들어낸 자기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상이 아니요, 누구든지 자기의 마음을 갈고 닦아 그 뿌리깊은 샘에서 솟아 나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꼭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I에서 앞서 지적한 dilemma 이 마음이 겪고 있는 dilemma요, I의 B에서 지적한 화해의 mood가 바로 꼭같은 마음의 성향이 아닐수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마음은 막연한 인상이나 경향으로 그치거나, 혹은 자칫 잘못하여 그 논리전개에 잘못이 있게되면 아주 다른 방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元曉(원효)와 같은이의 논리적 이론전개는 정확하게 따라갈 필요성이있다는것이다. 나는 이제 元曉思想(원효사상)을 지금의 우리말로 해석하면서 가능한 限(한), 고유한 술어들을 피하고, 오늘 우리 앞에 전개되는 諸問題(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얼마만큼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갈것이다. 지금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을 摘記(적기)한다 할지라도 元曉思想(원효사상)이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적 갈등들에 대해서 치유 내지는 해결의 원치과 방향을 提示(제시)해 줄 수 있는 分野(분야)에 다음과 같은것이있다. 1. 和諍(화쟁)의공동체로서의세계관.인생관 2. 緣起(연기)로서의 역사관,空(공).假(가).中(중)의현실인식 3. 法(법).報(보).化(화) 三身說(삼신설)에 立脚(입각)한神觀(신관).宇宙觀(우주관) 4. 무소유.布施(보시)의경제윤리 5.饒益衆生(요익중생)의정치철학 6.歸一心源(귀일심원)의교육 나는 이러한 元曉(원효)의 사상이 위의 I에서 말한 현대세계의 諸(제)dilemma를 극복하고, 바야흐로 일기 시작한 諸(제)긍정적 경향들에 힘입어 새로운 21세기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데에 크게 기여할 수있으리라고생각한다. 인간문화는 문화를 창조하고 영위하는 주체인 인간들 자신의 마음가짐여하에 따라 그 면모를 달리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이제 와서야 "交叉文化時代(교차문화시대)의 우리 불교사상의 역할"과 같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제기하는 불교적 주장들은 반드시 元曉(원효)가 주장한 그대로가 아니며, 때로는 오해와 경박한 피상적 이해도 끼어 있지만 이미 세계 여러나라의 선구적 학자, 사상가, 예술인등에 의해 상당히 심도 있게 주목되고 수용되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여기서는 사상의 문제에만 국한시켜 위의 여섯 가지 사항에 대한 元曉(원효)의 의견을 내가 본 대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려 한다. 현대문화의 다른 분야들, 즉 보다 세분된 문화의 제분야들, 예컨데 정치형태나 경제제도, 혹은 종교의 위상, 음악, 미술 등과 같은 세부적 문제들에 대하여는 언급을 피하려 한다. 그러한 문제들은 어떤 지역의 주민의 어떤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가져왔느냐] 하는데 따라 매번 검토되어야 할 문제를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논의되어야 할 많은 문제가 있게되기때문이다. 1. "和諍(화쟁)의 共同體(공동체)"로서의세계관.인생관 세계와 인생을 "화쟁의 공동체"로 보는 견해는 元曉(원효)에게 있어서 특히 현저하게 강조되는 사상이다. 和諍(화쟁)이라는 말은 하나의 당위를 말하는 어휘로서 사용된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또한 세계와 인생의 본래의 모습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그 낱말이 갖는 의미는 元曉(원효)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기본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수가없다.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게 될 佛身觀(불신관), 宇宙觀(우주관)과도 관련이 되는 것으로 우주자연의 본래의 모습이다. 元曉(원효)는 법화경의 사상을 정리한 法華宗要(법화종요)에서 이 經(경)의 宗旨(종지)가 "廣大甚深(광대심심)한 一乘(일승)의 實相(실상)을 밝히는데 있다" 고 하였다. 그러면서 "불교를 알건 모르건, 수행을 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모든 사람은 물론, 生命(생명)있는 모든 微物(미물)에 이르기까지 一切衆生(일체중생)[살아있는 것들]이 다 一乘(일승)[하나의 수레]을 타고 가는 佛子(불자)[부처의 아들]요, 菩薩(보살)[부처가 되기 전 단계의 생을 사는 자]이다." 라고 한다. 나는 여기 이 말씀가운데에서 元曉(원효)가 파악한 大乘佛敎(대승불교)의 平等觀(평등관) 普遍的(보편적) 大寬容(대관용)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어서 그 까닭을 이 一切衆生(일체중생)이 지금은 비록 표면상 행동과 思惟(사유)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고, 서로 대립하는 경우를 보이지만 " 그들이 모두다 佛性(불성)을 갖고 있어 마땅히 앞으로 佛位(불위)를 계승할 것이기 때문이며 지금 佛性(불성)이 없는 것 같은 有情(유정)들도 다 장차 作佛(작불)[부처가 되는 일] 이 확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여러 經典(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宣言(선언)이 비록 聖人(성인)의 말을 믿는 근거에서 왔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원효는 一乘(일승)을 타고 가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글 말미에 일승의 實相(실상)이 광대하고 심심하다고 한 뜻을 부연하여 다은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한 중생도 불자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광대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중생들이 있는 세계가 바로 涅槃(열반)의 세계다. 그러므로 심심하다고한것이다." 사람 아닌 어떤 微物(미물)에 이르기까지 라고 말했다. 그것은 불교의 "四生衆生(사생중생)"이라는 말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濕氣(습기)속에서 태어나는 것[濕生(습생)], 알에서 태어나는 것[卵生(난생)], 母胎(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胎生(태생) 그리고 끝으로 마음가짐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化生(화생)]의 네가지 생을 四生(사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이른바 無生物(무생물), 生命(생명)없는 物質(물질)에 대한 우리 통속관념이 오류라는 과학자들의 반증이 있음을 알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의 가치질서까지도 여기에는 일단 지적이 돼 있는 셈이다. 열거된 순서대로 濕生(습생)보다는 卵生(난생)이, 卵生(난생)보다는 胎生(태생)이, 胎生(태생)보다는 化生(화생)이, 生(생)의 능력과 내용에 있어서 그리고 또 그 의미에 있어서 차원이 높다고 할 수가 있다. 생의 질에 있어서 가치질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이 있는 곳, 아니 그 생자 자체가 佛性(불성)[成佛涅槃(성불열반)할 수 있는 性(성)]이라는 생각, 그래서 모든 중생이 불자라는 생각, 이런 사상이 현대의 諸(제)유행사조속에서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여기 비록 成佛(성불)이니 佛性(불성)이니 하는 "佛(불)"자가 있지만, 그것은 결코 특별한 宗派性(종파성)을 가진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華嚴經(화엄경)에서 강조 되는 事事無?(사사무애)한 緣起(연기)를 성취한 경지, 거기에 도달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일 따름이다. 그것을 또한 如如(여여)니 如來(여래)니 하였다. 如來(여래)란 如如(여여)한 경지에 왓다는 뜻이다. 또 그것은 "到彼岸(도피안)[彼岸(피안)에 이르렀다]라고도 이해되었다. 그 인도 원어가 Paramita[波羅密多(바라밀다)]이다. 의식과 행동의 근본적인 전환을 통해 달성하는 본원적 상태로의 복귀, 또는 往生(왕생), 그것을 ""到彼岸(도피안)"이라고 한 것이며 그것은 전기 四生中(사생중) 마지막 化生(화생)일 수 밖에 없다. 중생의 삶이 본연의 삶이 아니요, 그것은 변혁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새로운 삶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삶을 사는 존재를 "깨달은 중생".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역시 깨닫게 하려는 중생,보살(Bodhisattva)이라고한다. 菩薩(보살)만이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것이 우주자연의 실상이요 또 인간의 실상이다. 그 우주자연은 하나의 영원한 법 그 자체이다. 그것을 "一法界(일법계)" 또는 "法身(법신)"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元曉(원효)는 화엄경의 宗旨(종지)를 따라 "無?緣起(무애연기)로서의 法界(법계)"라고 본다.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우주자연은 그냥 그대로 법의 몸[法身(법신)]으로서 佛(불)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非人格的(비인격적), 超人格的(초인격적)인 "理(리)"로서 영원히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보고 기독교적인 排他的(배타적) 唯一神敎(유일신교)에 빠지거나 무신론적 유물론에 떨어져 배타적 정복욕을 불사른다. 이 "理(리)"가 사람들의 말로써 천명되어지면 그것은 하나의"理(리)"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唯一神(유일신)의 이름으로나 또는 유물론의 이름으로나 편협한 dogma와 ideolgie에 사로 잡혀 자기중심적인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어진다. 본래 하나인 진리를 못 본 장님들끼리 부질없는 싸움을 하게되는것이다. 元曉(원효)는 그의 모든 저서에서 歸一心願(귀일심원)하고 饒益衆生(요익중생)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 모든 중생은 근본적으로 一心(일심)을 공통의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그 일심동체성을 알지 못하는 根本無明(근본무명)을 이어받고 태어남으로 해서 我執(아집), 我慢(아만)등 잘못된 자아의식을 갖게 되고 나아가 본래 동체인 다른 중생들과 사물들을 貪慾(탐욕)과 시기 질투하는 마음으로 혹은 편협하게 애착하고 혹은 적대 증오하면서,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은 육도중생의 경지에 떨어져 파란고절을 일으키고잇다는것이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가 가까운 장래에 쉽게 달성되리라고 元曉(원효)가 장담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 길만이 옳은 길이므로 적어도 사회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들만이라도 이 길을 알고 이리로 중생을 인도하는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오늘날 이 시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인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언론 모든 분야의 일꾼들이 일심동체의식으로 사소한 소아적 이익을 버릴 때, 저 멀리 꿈꾸던 이상향은 여기 이 시간, 이 공간위에 실현될 수 있는 것 아니가 하는 것이元曉(원효)의염원이다. 2. "연기로서의 역사관,空(공)/假(가)/中(중)의현실의식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因緣(인연)따라 生起(생기)하는 것[因緣所起(인연소기)],緣起(연기)]으로 본다. 자연계의 것이건 인간계의 것이건, 모든 형상 사물들은 그 무수한 것들法(법)사이의 끊임없는 因緣(인연)관계의 생성, 유지, 소멸의 모습을 띤다. 하나 하나의 현상과 사물들은 매번 因(인)이 되었다가 또 緣(연)이 되고 또 果(과)를 나타내고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刹那刹那(찰라찰라)에 생겼다 사라지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한 현상을 " 生死(생사)" 니 "流轉(유전)"이니 하고불렀던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끊임없는 因緣所起(인연소기)로서 전개된다. 그것은 결코 一直線上(일직선상)에서 平面的(평면적)으로 어느 종점을 찾아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生死(생사)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循還(순환)하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존재가 皮相的(피상적)으로서만 인식되면 될수록, 그만큼 사람들은 皮相的(피상적)인 역사만을 인식하게 된다. 역사를 空(공)/假(가)/中(중)의 三諦(삼제)란 立體的(입체적) 深層的(심층적) 觀點(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인간의 生(생)/死(사)가 단 1회적인 현상으로만 이해될 경우, 다시 말해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서 생사를 초탈할 수 있는 가는성과 그 절대적 의의를 인식하지 못하고 生(생)/死(사)에만 집착하고 있는 동안 인간의 역사는 의미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生(생)/死(사)는 因緣所起(인연소기)로서 "假(가)"일 따름이다. 이때 "假(가)"는 가짜란 의미라기보다는 方便(방편)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 假(가)는 물론 一時的(일시적)이요 暫定的(잠정적)이요 실존적이다. 그 "假(가)"의 저편에 허무가 있다. 모든 현상이 사라진 곳, 거기가 공의 세계, 무의 세계이다. 모든 名色(명색)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原初的(원초적)인 세계, 명과 색이 없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不毛(불모)의 황무지가 아니라, 森羅萬象(삼라만상)이 그 곳으로부터 발생하는 만법의 근원이 그것이다. 이것을 元曉(원효)는 眞如(진여)니 如如(여여)니 心源(심원)이니 實體(실체)니 本體(본체)니 理源(이원)이니 하고불렀던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超歷史(초역사)인 하나의 本源(본원)과의 연결없이 그것 자체로 완결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그 초역사적인 본원이 바로 앞에서 말한 理源(이원)이요, 實際(실제)요 本際(본제)며 眞如(진여)등으로 표현된 空(공)의 세계이다. 이러한 " 本源(본원)의 의식"을 俗諦(속제)[samvrti-satya]라고 했다. 이 어느 한쪽만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어느 한쪽만을 사는 것, 그리고 그 어느 한쪽만을 사는 것을 元曉(원효)는 잘못된 삶이며, 잘못된 앎이라고 말한다. 眞諦(진제)에 입각해서 俗諦(속제)를 알고, 俗諦(속제)에 살기를 眞諦(진제)에 바탕을 두고 사는 것, 즉 元曉(원효)의 말을 빌리면 眞(진)/俗(속)이 不二(불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삶이 된다는 것, 元曉(원효)는 그 학문과 생활을 이렇게 이해하고 산 사람이다. 이것이 이른바中道第一義諦(중도제일의제)라는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결론은 因緣所起(인연소기)의 삶이 無?(무애)한 緣起(연기)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中道(중도)의 理致(이치)는 般若(반야)의 理致(이치)요, 無我(무아)의 이치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因緣(인연)으로 生起(생기)하는 諸事實(제사실)들이 無?(무애)한 것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철저하게 利己主義的(이기주의적) 自我意識(자아의식)을 버리고 利他的(이타적) 自己獻身(자기헌신) 의 願力(원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도 기업을 하는 사람도, 사회의 어떤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그들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러한 원칙에 부합할 때, 그들이 맺는 緣起(연기)는 無?(무애)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穢土(예토)의 현실이 淨土(정토)로 바뀌게된다는것이다. 元曉(원효)의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은 禪(선)의 理論書(이론서)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禪哲學(선철학)에는 中國起源(중국기원)의 禪宗諸派(선종제파) 특히 六祖慧能(육조혜능)의 禪(선)사상과 다소 경향을 달리한 바가 있다. 그것은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강조하는 점이다. 그는 理入(이입)만이 아니라 行入(행입)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境界(경계)[客觀的(객관적) 周圍環境(주위환경)]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두루 남김없이 一切衆生(일체중생)을 救度(구도)하라. 그리고 寂滅(적멸)이라는 부정적 관념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언제나 일체중생을 버리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사상에 있어서 주목 할 것은 華嚴經入法界品(화엄경입법계품)에 나오는 善財童子(선재동자)의 行脚(행각)을 매우 중시하고 그의 五十二位(오십이위) 善知識(선지식) 探訪巡禮(탐방순례)로 비유된 十信(십신), 十住(십주), 十行(십행), 十廻向(십회향), 十地(십지), 等覺(등각), 妙覺(묘각)의 보살행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모든 行(행)은 형식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중요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出入自在(출입자재)한 在家佛敎(재가불교)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의 종교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말 몇구절을소개하자. -入時(입시)에는靜守一如之境(정수일여지경)하고 出時(출시)에는不失一味之心(부실일미지심)하라. - 不取(불취)我他之相(아타지상)하고 不着(불착)好惡之境(호악지경)하면 不爲(불위) 天風(천풍)의 所鼓(소고)며入出(입출)을同忘(동망)하고 心事(심사)가 不二(불이)하리라.[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 3. 法(법)/報(보)/化(화) 三身說(삼신설)에입각한神觀(신관)/宇宙觀(우주관) 앞서 1 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元曉(원효)는 우주자연 그 전체를 부처님의 法身(법신)으로 보는 華嚴的(화엄적) 佛陀觀(불타관)에서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아직도 法身(법신)[부처님의 몸]을 法身(법신)과 報身(보신)/化身(화신)의 세 가지 측면에서 보는 깊은 洞察(통찰)의 언명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아직도 초기 Pali어 經典(경전)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스리랑카, 태국등의 불교에서는 元曉(원효)의 이와 같은 大乘的(대승적) 佛陀觀(불타관)을 모르고 있다. 그런 佛敎(불교)의 敎理(교리)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비교종교학자들은 불교를 단순히 무신론이라고 규정짓고 헛수고만 할가능성이있다. 元曉(원효)는 불신사상이 원숙한 발전을 본 그 성과들을 다 섭렵하고 하나의 종합적 會通(회통)을 이룩할 수 있는 좋은 시기에 살면서, 그것을 刻銘(각명)히 우리 앞에 체계 지워 이해시킨 위대한 思想家(사상가)이다. 그 자신은 전혀 예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중대한 결과가 오늘 기독교와의 交叉的(교차적) 접촉에서 그리고 無神論的(무신론적) 唯物主義者(유물주의자)들과의 접촉에서 의외의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보며 나는 적지 않은고무를받는다. 法(법)/報(보)/化(화) 三身說(삼신설)의 가장 원숙한 해설은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의 體(체)/相(상)/用(용) 三大(삼대)의 論理(논리)가 응용됨으로써 더욱선명하게부각된다. 이제 간략하게 그동안 다른 곳에서 많이 다루어진 바 있는 나늬 주장을 요약정리해본다. 元曉(원효)의 佛陀觀(불타관)은 古代(고대)인도의 성전 Upanisad의 Brahman론, Atman론, 그 둘이 둘이면서 하나라는 梵我一如論(범아일여론)등의 새로운 해석으로써 얻어지는 결론과 매우 흡사한 점을 갖고 있다. 만약에 불교 이해에 있어서 佛敎(불교)가 내린 바와같은 敎判(교판)에 의하지 않고 어떤 경론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했다면 佛身(불신)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얻기가 어렵고, 또 Upanisad의 Brahman론에 어두웠다면 元曉(원효)가 가지고 있는 바와 같은 불타관은 설명하기가어려울뻔했다. 法身(법신)이란 말로 元曉(원효)는 名相(명상)[또는 名色(명색)]을 떠난, 그래서 空(공)이요 無(무)인 그 自體(자체)를 이해했고 또 그렇다고 결코 부정적 의미의 空無(공무)가 아니라 모든 名相(명상)을 낳는 不空(불공)의 근원적 실재를이해하고있다. 그것은 Brahman을 설명할 때, 그 자체를 그 어떤 名相(명상)[nama-rupa, 개념이나 형태]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면서, 모든 名相(명상)이 그것으로부터 나와, 그것 안에 있으며, 사라질 때에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그것(ta-la-an, tajjalan)이라고 설명되는 것과 같은방식의설명이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것이지만 인격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 Isvara[God, 自在天(자재천)]가 되고, 그것은 만물의 살아있는 精氣(정기)내지 生氣(생기), 생명력으로서는 Hiranyagarbha(황금의 씨앗)가 되고, 그것은 만들어진 세계의 一切物(일체물)로서는 Viraj(the World 세계)가 된다고 보는 것이 Upanisad의 견해이다. 이와같은 견해는 불교에 적용될 때, Isvara는 인격적 불타 또는 보살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그리고 Hiranyagarbha는 如來藏(여래장)[Tathagatagarbha, 如來(여래)의 씨앗] 또는 佛性(불성)[Buddhatva, Buddha`n nature]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Viraj는 器世間(기세간)[loka, the world]으로서 대음되는 것이라고 볼수가있다. 元曉(원효)의 경우, 法身(법신)[Body of Law]은 다른 二身(이신) 즉 報身(보신)[果報身(과보신) Body of Reward]과 化身(화신)[또는 應化身(응화신), Body of Transformation]의 體(체)로서 言語道斷(언어도단)의 根本存在(근본존재)이며, 그것이 空(공)의 世界(세계), 眞如(진여)의 세계의 모습, 여래의 궁극적 현실(Ultimate Reality)이라면, 報身(보신)과 化身(화신)은 둘다 生死(생사)의 세계, 緣起(연기)의 세계에 들어 온 몸으로서 생성과 변화와 유지, 그리고 마침네 소멸의 모습을 나타내는 실존적 존재들이다. 그 둘 사이의 차별이 있다면, 報身(보신)은 정적으로 표현된 이상적 모델이며, 化身(화신)은 동적으로 작용하는 변화자재의 몸으로서 중생의 근기에 따로 중생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나타나 감화를일으키는존재이다. 나는 일찍이 법신을 아버지에 대응시키고 그로부터 나온 相(상), 인격적 모델인 報身(보신)을 아들에 그리고 역시 같은 아버지 體(체)로부터 나온 用(용). 사람들의 마음의 실존적 작용의 계기가 되어 주는 화신을 靈(영) 또는 神(신)에 대응시켜,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을 이해해 본일이있다. 나는 이러한 나의 견해에 대한 여러분의 고견을듣고자한다. 4. 無所有(무소유),布施(보시)의經濟倫理(경제윤리) 자본주의 경제사상은 "내것"이라는 근본 사상과 "나의 물질적 풍요" "나의 쾌락을 위한 재부축적" 이라는 인간의 욕심을 동기로 하여 수립된 사상이다. 그런가하면 맑스주의 경제사상은 "공산"을 부르짖고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계급의 이름을 내세워 폭력으로 남의 재산을 집단적으로 자기네 계급의 소유로 예속시키면서 전자와 꼭같은 貪(탐)/鎭(진)/痴(치)를 함부로 부리고 있다는데문제가있다. 불교의 경제윤리, 특히 元曉(원효)가 주장하는 보살도로서의 경제윤리가 앞으로도 默殺(묵살)되고 무시된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날 元始佛敎(원시불교)시대에는 단순히 戒(계)/定(정)/慧(혜) 세가지 공부가 강조되었고 出家修行者(출가수행자)들은 그 세가지 공부를 現世逃避的(현세도피적)인 안목에서 소극적으로 이행하는데 그쳤었다. 大乘(대승)의 보살도에서는 적극적으로 중생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삼고, 중생들을 그 고통에서 헤어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원하여 생사의 흐름속에 들어 온 "깨달은 중생"들이 바로 보살인 까닭에 大社會的(대사회적)인 실천덕목, 중생을 상대로 하는 실천덕목들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六(육)바라밀다 또는 十(십)바라밀다라는 보살이 제창되엇다. 布施(보시)바라밀다, 持戒(지계)바라밀다, 忍辱(인욕)바라밀다, 精進(정진)바라밀다, 禪定(선정)바라밀다, 智慧(지혜)바라밀다를 보살의 기본 실천강령으로 삼았다. 布施(보시)가 戒(계)보다도 앞에 그리고 禪定(선정)에 앞서 忍辱(인욕)과 精進(정진)의 실천이 강조적으로삽입된것이다. 布施(보시)는 주라는 것이다. 달라거나 빼앗지 말고 주라는 것이다. 무엇을 줄 것인가? 중생이 중생노릇 그만하도록 법을 가르쳐 주고[法施(법시)], 재물을 주고[財施(재시)], 恐怖(공포)와 불안을 말끔히 가시게 해주라[無畏施(무진시)는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경제윤리, 생산과 판매와 이윤추구와 분배와 확대재생산과 무역과 이 모든 경제행위의 의 원칙과 원리를 이 六(육)바라밀에서 찾아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은 평화의 달성, 疏外(소외)된 인간, 억울한 인간이 없이 모두 삶의 보람을 함께 누리게 하는 데에있다하겠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내것"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無所有(무소유), 無我(무아)의 自覺(자각)이 있을 때, 그런 사람만이 보살의 길에 들어선다. 이것은 중생에 대한 조건없는 사랑에 의해 보강되어야 한다. 그리고 참고 견디며 남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는 忍辱(인욕)의 힘으로 보강되어야 한다. 우리는 앞서 Paramita 즉 피안에 도달하는 일에 대해 말한 바가 있다. 이 施(시)/戒(계)/忍(인)/勤(근)/定(정)/慧(혜)의 육바라밀다가 바로 저 피안에 이르는 절대 필수불가결의 길이며, 거기에 도달하고 났을 때, 그 순간에 그가 서 있는 현실은 참으로 이른바 社會主義(사회주의) 樂園(낙원)보다도 福祉社會(복지사회)보다도 몇배 몇십배 더 나은 참된 淨土(정토)가된다는것이다. 5.饒益衆生(요익중생)의정치철학 6.歸一心源(귀일심원)의敎育(교육) 나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아울러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실 4. 5. 6 은 다 실천윤리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보살의 실천덕목, 6 바라밀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묶어 하나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다만 특정한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분리를 시켜 본것뿐이다. 元曉(원효)는 화엄경이나 菩薩纓絡本業經(보살영락본업경) 및 기타 如來藏思想(여래장사상)의 經典(경전)에 의거하여 6 바라밀다로 확대 해석한 것을 따른다. 추가된 네가지 바라밀다는 施(시)/戒(계)/忍(인)의 방편을 완성시키는 일, 勤(근)의 저력이 되는 願(원)을 확고히 하는 일, 定(정)의 기반이 되는 力(력)을 충분히 기르는 일, 慧(혜)의 기초가 되는 智(지)를 깊이 함양하는 일 등이다. 이것을 아래에 표기하면다음과같다. 利他(이타) 1) [布보]施(시)---法施(법시)--->財施(재시)--->無畏施(무진시) 2) [持(지)]戒(계)---攝律儀戒(섭률의계)--->攝善法戒(섭선법계) 3)忍(인)[辱(욕)]---耐怨害忍(내원해인)--->安受苦忍(안수고인)--->諦察法忍(제찰법인) 共通(공통) 4)精進(정진)---被甲精進(피갑정진) --->加行善法精進(가행선법정진)--->饒益衆生精進(요익중생정진) 自利(자리) 5)禪定(선정)---無分別定(무분별정)--->引發功德定(인발공덕정)--->饒益衆生定(요익중생정) 6)智慧(지혜)---俗諦慧(속체혜)--->眞諦慧(진체혜)--->中道第一義諦慧(중도제일의체혜) 7) 方便(방편)---1) 2) 3)을보완하는바라밀다 8) 願(원)---4)를보완하는바라밀다 9) 力(력)---5)를보완하는바라밀다 10) 智(지)---6)을보완하는바라밀다 위의 표는 元曉(원효)가 좋아하는 解深密經(해심밀경)의 十(십)바라밀다說(설)을 골간으로 보살영락본업경, 攝大乘論(섭대승론)등에 나오는 大同小異(대동소이)한 주장을 정리해본것이다. 위의 1)施(시) 2)戒(계) 3) 忍(인)의 세가지 바라밀다는 대사회적인 이타행의 덕목들이다. 그것은 각각 단계적으로 심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 단계나 둘째 단계의 실천은 아직도 원만한 보살행이 못됨을 표시하고 있다. 그 셋째 단계는 대체로 饒益衆生(요익중생)하라는 것으로결론지어져있다. 그것은 4) 精進(정진) 5) 禪定(선정) 6) 智慧(지혜)의 세가지 自利行(자리행)의 바라밀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4) 精進(정진)은 엄밀히 말하여 自利(자리)나 利他(이타)에 다 공통되는 실천덕목이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얼마만큼 많은 중생에게 이익을, 그들로 하여금 중생놀음을 안하게끔 하느냐 하는데에 있다. 饒益衆生(요익중생)이란 그 자체가 利他行(이타행)이다. 그런데 自利行(자리행)의 극치가 利他行(이타행)이라는 설명이니 이 얼마나 철저한 利他主義(이타주의)[altruism]이냐! 남이 잘되는 것은 곧 자기가 잘 되는 것이란 생각이 여기에깔려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인간생활 전체가 이런 입장에서 재고찰될 필요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정치라는 것을 구태여 경제/교육/사회/문화/언론등 제분야와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나라의 살림살이, 국민들의 안녕과 복지를 보장하고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地獄(지옥)/餓鬼(아귀)/畜生(축생)/修羅(수라)등의 고약한 중생이 없거나 적어야만 사람사는 세상과 같은 사회, 더 나아가 하늘나라같은 사회가 이룩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가 중생들 속에서 살면서, 조금도 중생놀음을 안하고, 중생이 깨닫고 利他行(이타행)을 기꺼이 하게 되도록精進(정진)하는菩薩(보살)[Bodhisattva]이다. 이미 10여년전에 Arnold Toynbee가 An Historian`s Approach to the Religions에서 앞으로 다가올 세기의 세계는 Bodhi-sattva같은 일꾼들이 나타나느냐, 안나타나느냐 하는데 따라 그 운명이 달려 잇다고 말했다. 벌써 세계의 지성들은 내가 말하고 있는 방향으로 궤도에 진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실제 정치생활에서, 경제기업체에서 교육계, 언론계, 대중문화의 세계에서 보다 정직하고 솔직하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느냐가문제일것이다. 위의 10바라밀다의 各項(각항)의 점진적 단계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네 정계,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언론계등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가 잘 드러나보일것이다. 정치는 무엇을 하는 일인가? 법을 알고 법을 따라 법대로 살게끔 보장해 주는 일이 아닐까? 그 법이란 宇宙自然(우주자연)의 법의 근간으로 한다. 그 법은 憲法(헌법), 民法(민법), 刑法(형법), 商法(상법)등 法學者(법학자)들에게 있어서 法律(법률)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법을 만드는 인간들이 항상 배우고 탐구하고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영원한 법을 말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正法(정법)이라고도 한다. 그 정법의 두가지 命題(명제)를 元曉(원효)는 "一心(일심)의 源泉(원천)으로 되돌아가 [歸一心源(귀일심원)] 널리 중생들을 위해 더 이상 중생놀음 안하게끔 利益(이익)을 주라[饒益衆生(요익중생)]"라고 하는 두가지로 이해한 것이다. 歸一心源(귀일심원)하지 않고서는 饒益衆生(요익중생)을 할 수가 없으며, 또한 饒益衆生(요익중생)이 竝行(병행)되지 않는 歸一心源(귀일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元曉(원효)의생각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그리고 세계각지에서의 교육은 歸一心源(귀일심원), 饒益衆生(요익중생)보다는 어떻게 생존경쟁에서 남을 누르고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利己主義(이기주의) 조장의 교육으로 시종하고 있다. 전도된 가치관이 팽배해진 사회속에서 利他的(이타적) 분위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오직 緣木求魚(연목구어)일 따름이다. 교육의 혁명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예수님의 교육이 힘을 쓰던 시대가 잇었다. 부처님의 교육이 올바로 전세계의 사람들 뇌리를 사로잡아 그 의식을 360도로 바꿔 볼 찬스가오고있다. 법은 가르쳐야 한다. 올바른 영원한 법을 ......... 아무것도 내것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나와 인연맺은 모든 것과의 관계가 걸림이 없고 원융무애할 때 비로서 존재가치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끔 하여야 한다는 것이 元曉(원효)의 지혜로운 진리관이다. 세속의 인연소기관계를 알고[俗諦(속제)], 나아가 그 실상의 허깨비같음을 알고[眞諦(진제)], 오로지 잠깐동안 "나"라는 임시적 존재에게 맡겨진 영원한 부처님 능력(또는 하나님 능력)을 고통중의 중생들 행복을 위해 바치는 일, 그것을 정치인도, 기업가도, 교사도, 연기자도, 신문기자도, 방송PD도, 코미디언도, 근로자도, 상인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것이다. 악을 하지 않는 것은 계율이나 관습, 예의작법등 Tribal Ethics를 범하는 것이냐? 元曉(원효)는 그것보다 더 중한 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선행을 찾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선의 극치는 무엇이냐? 일체중생으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이익 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것이 戒(계)바라밀다의 내용이다. 지구상의 제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폐쇄적 Tribalism과 Formalism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 元曉(원효)의 주장이다. 세계는 점차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하여 진정한 국제간의 평화가 이룩되어 숱한 가지가지의 장벽이 무너지는 날이 오게될것이다. 보살은 참고 용서하고 기쁜 마음으로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달게 받는 자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는 忍辱(인욕)밖에는 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이 세상을 "사바세계"(Saha-loka)라고 한 것이다. "耐忍(내인)의 세계"라는 뜻이다. 중생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보살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자니 먼저 갑옷이라도 입은 듯 精進(정진) 精進(정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被甲精進(피갑정진)]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소극적이요 독선적 수행자란 이름밖에는 얻을 것이 없다. 그리하여 선한 법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늘어나도록 노력을 집중해야한다[加行(가행)]는것이다. 歸一心源(귀일심원)의 최선의 공부방법을 參禪(참선)이라고 한다. 三昧(삼매)에 들어 일체의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속에 일어난 풍파를 잠자게 하는 것이다. 분별하는 감각기관들을 쉬게하는 것이다. 無分別禪定(무분별선정)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분별의식이 극도로 요구되고 있는 산업사회에서 정신적인 각종 질환에 걸리지 않기 위한 최선의길은참선이다. 參禪(참선)의 방법은 다양하고 일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 원리만은 언제나 같다. 모든 분별을 끊어보는 "止(지)"와 사리를 고요히 관찰하는 "觀(관)"이 병행되어야한다는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보살이 가야하는 실천의 길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이것은 이 장의 맨위에 열거한 여섯가지 항목중 첫 세가지 이론적인 면의 기여할만한 어떤 요소들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앞에서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진행중인 것들이 있음을 유념하면서 일반 대승불교의 가르침 그대로가 아닐 수 있는 元曉(원효)의 견지를 부연하는데 많은 말을 한 것같아 송구한 마음도없지가않다. 앞으로의 시대는 어떤 특정한 이름과 형태[名相(명상)]가 그 배타적 절대성만을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각자가 독자적 특성만을 강조하며 서로 융해하지 못하는 개별적인 다원성이 강조 될 시대도 물론 아닐 것이다. 一中一切 一切一中(일중일체 일체중일), 一卽一切(일즉일체) 一切卽一(일체즉일)이란 元曉(원효)의 和諍(화쟁), 歸源(귀원)의 이상은 반드시 그 빛을 발하고야말것이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깊은감사를드린다. |
첫댓글 검색해보니 원효성사전서라는 시리즈로 1987년에 6권이 출간되었더군요. 언젠가 원효스님의 사상을 공부해보고 싶네요. 그런데 저런 불서들은 재출간이 잘 안되어서 아쉽습니다. 불교서적도 판매량을 따지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좀 더 다양하면서도 전문적인 불서들이 많이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원효사상의 대가이신 이기영박사의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좋는자료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무소유 무아의 자각이 있을때 보살의 길에 들어선다. 귀일심원하지 않고서는 요익중생을 할 수가 없으며 또한 요익중생이 병행되지 않는 귀일심원이란 있을수 없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감사합니다.
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_()()()_
일심 광명 화신
귀명합니다 찬탄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