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 정당, 독자적인 합법 정당을 추구하다.(3) 이상호(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우리는 역사적 전통으로 발전 계몽되어 온 보수의 정신을 지키고 현실화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보수 정신의 뿌리와 원칙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진보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지피지기의 정신이며 삶의 원칙입니다.****
지금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이 한국 근대화의 ‘발판이 역할’을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당시 민주화의 기치를 내걸고 전개되는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은 처절했습니다. 당시의 노동자와 농민의 삶은 정말 척박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며 근대화라는 기치를 내건 정부와 기업은 그들의 희생을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희생은 일시적으로는 통하지만, 지속적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은 그런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기만 했습니다, 국민을 향해서는 그들의 분규가 근대화를 저해하는 것으로 색깔론을 강하게 덧씌워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포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관행화된 일종의 폭력이며 착취입니다. 말 그대로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했던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 것이지요. 이는 더 강한 시위와 분규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그 분규에 대한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와 농민의 목소리를 외면하였습니다. 당시는 법적으로도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단체 행동권을 그리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부와 기업은 불법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하여 국제 노동기구 등에서도 한국 정부에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의 분규와 시위는 탄압할수록 점점 거세게 들불처럼 번져 갔으며 성난 불길처럼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정부와 기업은 겸허하게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앞서 말한 관행화된 폭력성으로 그들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고 심지어는 직장 폐쇄 조치라는 초강경 수단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호의호식한다’는 말도 돌았지요. 어쨌든 정부는 기업의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부의 홍보 노름에 국민의 상당수도 그렇게 믿었지요. 그렇게 될수록 노동자와 농민의 분규와 시위는 더 거세졌습니다. 유신 정부에서는 그들의 분규가 미묘하고 산발적이었지만 그때의 중심 과제는 유신 철폐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절박한 민주화의 기치가 있었기에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과 목소리는 그리 크게 반영되지 않았으며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 26사태’로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80년대의 봄’을 맞이하여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전국적으로 거세지고 그 뒤를 이어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와 인권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그들을 그 이전보다 더 처절하게 탄압했지요. 그래도 그들의 분규와 요구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노동자와 농민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권리를 쟁취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같은 수법 이를테면 당시 신군부 정권이 자주 사용한 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들을 탄압하고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것이었습니다.(‘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라는 이 말은 매우 위험하며 처참한 말입니다. 물론 정치적결단의 단호함을 내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국민에 대한 폭력적 위협이며 시위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죽이겠다는 공포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사실 당시에 신군부에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것은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상처이며 아픔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전태일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분신 자살을 하고 그 여파로 분규와 시위는 더욱 거세졌으며 정부에서는 그들의 탄압에 대한 명분을 점점 잃어갔습니다. 한국의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와 인권, 노동법과 관련한 각종 법안은 이런 처참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쟁취였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좀 더 크게 눈을 뜨고 귀를 열고 그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런 처참한 희생과 국력 낭비는 방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도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런 일련의 민주화의 요구와 노동자와 농민의 인권 운동은 정치와 연결되어 진보 정당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진보 정당이 탄생하기까지도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지요. 노동자와 농민들은 노동 운동의 초기에 유신 정권에서부터 정치적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던 김영삼, 김대중 등을 중심으로 뭉쳤으나, 양김(兩金)을 구축으로 한 민주화 운동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노동 인권의 획득이라는 차원에서의 시각과 운동 현실의 한계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지야 인사들이 합세하기에 이르렀지요. <다음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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