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장복(天命長福) ① 양성보명(養性保命)-성품을 기르고 목숨을 잘 보전한다(1)
사람이 명을 재촉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첫째가 성품이 강박(剛薄)하여 자기가 자신을 해치고 타인의 원망을 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품이 강박한 사람은 사고를 저지르기 쉬우며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쉽다. 따라서 양성보명(養性保命-성품을 기르고 목숨을 잘 보전한다)은 천명장복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양성보명(養性保命)에서 양성(養性)은 순후하고 덕성 있는 성품을 기르는 것이다. 순후하다는 것은 성급하지 않고 매사에 신중하며 함부로 화를 내지 않으며 내면을 평온하게 다스릴 줄 아는 것이고, 덕성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으며 타인에게 마음으로나 물적으로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보명(保命)한다는 것은 수명(壽命)을 잘 보전한다는 것인데 수명은 원래 탄생부터 하늘이 부여한 것이므로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늘이 부여한 수명을 훼손하지 말고 그 수명만큼 잘 사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리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며 몸을 근면하게 움직이고 절제하여야 한다. 또 세상사에서 타인과 잘못된 관계로 인해 수명을 해치는 일도 많기 때문에 남과 원수지는 삶을 살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일이다. 당시는 왕권 시대이므로 정치적으로 매사에 신중하여 탄핵이나 척살(刺殺)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정치적으로 잘못되면 자기 명을 보전할 수 없음은 물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신중하여야 한다. 그러면 홍만종이 순오지에서 제시하는 양성보명(養性保命)의 방법을 알아보자 첫째, 사람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정신과 기운을 소모시킨다. 따라서 그것을 막기 위해선 면벽(面壁)과 좌한(坐閑)에 힘써야 한다. 면벽이란 불가(佛家)에서 벽을 마주 대하고 좌선에 몰입하는 것이다. 달마 대사가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이 수행법으로 9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여기서 생겨난 말이 면벽좌선(面壁坐禪)으로 이는 목표를 세우고 오랫동안 갈고 닦으면 높고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다. 좌한(坐閑)이란 좌(坐)는 앉을 좌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있는 것을 말하며 한(閑)은 막을 한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상태이므로 좌한이란 사방이 막힌 상태에서 고요히 앉아있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말한다. 불가(佛家)나 선가(仙家)에서는 인간의 모든 질병과 죄악은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되므로 이를 버리는 것이 수행의 시작과 끝이며 수행을 하면 신선과 같은 지경에 이르러 장생(長生)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청성(淸性)에 힘써야 한다. 청(淸)은 ‘맑을 청’으로 맑고 빛이 청명하여 사념과 탐욕이 없는 것을 말한다. 성(性)은 성품이다. 청명에 힘쓰는 방법은 사나운 것과 노여운 것을 버리고 자기의 성품을 길러야 하며, 생각을 적게 하여 그 정신을 길러야 하고 말을 조금만 해야 그 기운을 길러낼 수 있다. 성품에 사나운 것과 노여운 것은 자기를 상하게 할 뿐 아니라 타인을 상하게도 한다. 사람은 욕심이 많으면 생각도 많으므로 생각을 적게 하라는 것은 욕심을 적게 가지라는 뜻이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 역시 욕심과 오만에 기반한 것이므로 말을 조금만 해야 한다는 것은 겸허함을 배우고 타인을 존중하라는 듯이 된다. 그렇게 하여야 밝고 바른 정신을 길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도학자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길과 같이 느껴진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매우 바쁜 시대이다. 따라서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시대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의 시대에 삶을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쫓다 보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소진(小盡-바닥이 나는 일)되는 것조차 모른다. 그래서일까? 현대는 정신적인 질환이나 우울증 환자가 늘어난다. 곳곳에 명상원이 늘어나고 어떤 이들은 엄청난 돈을 주고 그 명상수행을 배우려 하기도 한다. 산업사회의 이러한 현대인을 일컬어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즈먼(David Riesman 1909〜2002)은 〈고독한 군중 The Lonely Crowd〉이라 하였다. 그는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시민들의 심리와 생활상을 분석하고 사람들의 삶의 유형에 따른 인간형을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타인지향형 등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수많은 미국 시민들이 산업화의 물결에 자아를 잃고 욕망을 향해 끝없이 타인을 쫓는 타인 지향형의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전통지향형 인간은 고도성장을 지속하는 사회에서 전통적인 도덕과 인습을 자신의 행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미국 사회에서는 많이 나타나지 않는 형태지만 이들도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타인 지향형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였다. 내부지향형은 과도기적 인구 성장기 사회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특히 급속한 공업화와 함께 형성된 가족 내에서 학습된 도덕과 가치관을 행동 기준으로 삼은 인간형이다. 이들은 유아기에 형성된 가치 기준을 바탕으로 대체로 사회적 순응을 중심 가치로 삼는다. 타인 지향형은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자기 자신이나 전통적 가치가 아닌 타인과 매스미디어 등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남들과 분리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바로 자아가 상실된 오늘날 현대인으로 〈고독한 군중 The Lonely Crowd〉이다. 이 타인 지향형의 인간형은 무한히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며 따르고 소설, 영화 등의 등장인물, 유명 연예인에 열광하며 유행에 민감하여 정체불명의 대중문화 소비양식을 양산한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하며 왜곡된 인간관과 도덕관을 인격의 기준으로 삼으려 하며 강요된 고립화에 빠지기도 한다. 이들은 더 자극적인 오락과 게임 등에 몰입하며 자아를 상실해 간다. 이것은 어쩌면 고도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병리 현상이다. 이들은 산업과 상업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자신이 소진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몰입하고 탐닉하면서 욕망의 늪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들은 자기 충전에 힘쓰지 않으며 끝없이 자신을 소모하다 탈진에 빠지기도 한다. 오늘날 정신 질환자가 늘고 마약 등에 빠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그러한 병리 현상의 한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자아를 성찰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아 상실과 소외의 연속이다. 리즈먼이 말하는 〈고독한 군중 The Lonely Crowd〉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넘쳐난다. 한국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 끝없이 욕망과 물질, 향락과 소비를 쫓고 있는 사회인지 모른다. 전통지향 인간형의 급격한 붕괴와 타인 지향형 인간형이 급속하게 출현하였다.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해도 고급 외제차를 타고 연인과 바캉스를 떠나야 한다. 벤츠 S클래스 판매율이 세계 1위이다. 그러한 현상은 청소년뿐 아니라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타난다.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타인 지향형의 정치인들이 넘쳐난다.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철학을 상실하고 끝없이 정당과 집단의 정치적 견해에 몰입한다. 물론 정당정치라는 것이 정당의 견해에 동조하여야 하지만 한국은 지나치게 집단화되어 자기 정치를 하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현상은 유권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정치인의 도덕이나 능력보다 진영 논리에 빠져 집단화 되어 있다. 이런 현상들 또한 타인 지향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고도의 경쟁 사회는 그러한 타인 지향성 인간형을 양산하고 있다. 정치에서도 상당수는 살아남기 위해 자기 주체성을 집단에 저당 잡힌다. 어쨌든 한국의 현대인들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더 많은 욕망과 향락 그리고 소비에 노출되며 더 많은 상처와 유혹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이념과 유행 등에서도 나타나는 타인 지향성은 상당히 팬덤화되어 많은 사람이 그 팬덤의 무덤에 갇히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더 소외되고 더 자아를 상실하고 더 소외되기 쉽다. 자신만의 소신을 지키고 정체성을 확립하여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이들을 올바른 삶의 길로 인도할까? 올바른 삶의 길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들이 자아 중심의 삶을 사는 길이다. 그것을 리즈먼은 주체적인 삶이라고 한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합리적 보편적인 도덕률을 존중하면서 자기에 몰입하고 자기를 충전하며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합리적인 자기 삶의 방식을 구축하고 개선하며 또 창조해 간다. 오늘날 소외된 많은 사람이 자기 삶을 회복하기 위해 ‘워라벨’을 강조한다. ‘워라벨’은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줄여 이르는 말로 일과 개인의 삶 사이의 균형을 지향한다는 뜻을 지닌다. 직장 생활에서나 일상에서도 “나를 위한 투자”를 하겠다는 것인데 ‘워라벨’ 역시 타인 지향성인 경우가 드러난다. 진정한 ‘워라벨’은 개인적으로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충전하면서 가족과 삶의 행복을 추구하고 사회적으로는 정의와 공정에 노력하는 일이다. 진정한 나를 위한 투자는 물질적인 면이나 향락적인 면이 아닌 정신과 생활의 건강을 위한 성찰과 모색, 절제와 겸허가 있는 주체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절대 필요한 것이 바로 성찰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한 월빙, 웰다잉, 워라벨 등의 단어는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물질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물질문명의 굴레에서 성찰하면서 자신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그 성찰과 모색의 길이 바로 홍만종이 말하는 양성보명(養性保命)에 힘쓰는 일이며, 그 방법으로 면벽(面壁)과 좌한(坐閑), 청성(淸性)에 힘쓰는 일이다. 천명장복(天命長福-천명을 다하고 오랫동안 복을 누리며 산다) 하려면 양성보명(養性保命-성품을 기르고 목숨을 잘 보전한다)하여야 하고 양성보명(養性保命)하려면 면벽(面壁)과 좌한(坐閑), 청성(淸性)에 힘써야 한다. 성찰하는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다. 성찰이 있어야 모색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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