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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에 선배를 논할 때에 문채가 아름답고 빛나는 이로는 반드시 고(故) 대사성 이공을 으뜸으로 친다. 공의 휘는 현기(玄紀)이고 자는 원방(元方)이다. 공의 증조부 지봉(芝峯) 선생부터 조부 분사공(分沙公) 및 선고 혼천공(混泉公)은 다 글 잘하는 것으로 이름난 분들이었다. 공의 대에 이르러서도 집안의 가르침을 익혀 아름다운 명성과 칭찬이 쇠하지 않았다.
나는 외람되게도 공의 적손 계주(啓胄)와는 혼인을 맺은 사돈 사이이다. 그래서 공의 훌륭한 행적을 더욱 익히 알고 있었다. 이미 외람되게도 혼천공의 묘표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이 지었는데, 지금 또 공의 묘지명을 부탁받았다.
그 가장을 살펴보면, 공의 계보는 선원(璿源)에서 나왔으니, 태종(太宗)의 별자 경녕군(敬寧君) 비(裶)가 바로 시조이다. 5대를 전하면 병조 판서를 지낸 휘 희검(希儉)에 이른다. 이분이 이조 판서를 지내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은 휘 수광(睟光)을 낳았으니, 지봉이 바로 그분이다. 이분이 영의정을 지내고 정숙(貞肅)이라는 시호를 받은 휘 성구(聖求)를 낳았으니, 분사가 바로 그분이다. 이분이 좌승지를 지낸 휘 동규(同揆)를 낳았으니, 혼천이 바로 그분이다. 선비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영의정을 지내고 강정(康定)이라는 시호를 받은 휘 철(轍)의 현손이며, 안원군(安原君) 휘 완(𡷗)의 딸이다.
공은 우리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사직을 바로잡은 지 25년인 정해년(1647) 2월 4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 등에 업혀서 뜰에서 놀다가 꽃을 꺾어 달라고 하였는데, 유모가 별 생각 없이 담장 밖에 있는 가지 하나를 꺾어서 주자 물리치고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우리 것이 아니다.” 하였다.
겨우 취학할 나이에 사람들과 논란하며 ‘순 임금이 구차하게 살아남은 것이 어버이의 뜻을 어긴 것인지’를 의심하니 모두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며 기이하게 여겼다. 계축년(1673, 현종14)에 생원시에 수석으로 입격하였고, 병진년(1676, 숙종2)에 문과에 급제하여 추천으로 승정원 주서로 들어갔다. 다음 해 부친상을 당했다. 상기가 끝나고 또 사국(史局)에 들어가서 한림이 되었다. 전적으로 승진했다가 병조 낭관으로 옮겼으며, 지방관으로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다.
임술년(1682)에 명을 받들어 왜사(倭使)의 접위관(接慰官)이 되었다. 왜사가 완상하기 좋은 여러 물품을 매우 많이 주었는데 단지 벼루 하나만 남겨 두었다. 후에 관서와 경기의 도사를 거쳐 을축년(1685)에 과천 현감(果川縣監)에 제수되었다. 송사하는 이들이 모두 공에게 와서 일 년 만에 수백 건의 옥사를 처리했으나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다음 해 가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뽑혔다. 이전에 이미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는데 당인들이 저지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은 인혐(引嫌)하고 끝내 사직하였다. 얼마 후에 중시(重試)에 등제하여 규례대로 사복시 정에 제수되었다. 연이어 관직(館職)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그만두고 물러났다.
정묘년(1687, 숙종13)에 해서 암행 어사(海西暗行御史)에 차임되었다. 다음 해 사간, 사성, 검상, 사인을 역임했다. 기사년(1689) 봄에 사헌부의 아장(亞長)을 거쳐서 등급을 뛰어넘어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졌다. 병조 참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예조 참의를 역임했다. 경오년(1690)에 형조 참의, 도승지로 옮겨졌다가 지방관으로 나가 전라 감사가 되었다.
다음 해 겨울 또 대사간이 되어 조정에 돌아와 다시 병조와 승정원의 관직을 거쳤다. 임신년(1692)에 지방관으로 나가 경상 감사가 되었다. 그때 영남에는 크게 흉년이 들어 오직 공이 촉망을 받았다. 일 년 만에 해직되어 돌아왔다.
갑술년(1694)에 환국이 일어나 조정의 상황이 변하자, 집권자가 허위로 공의 죄를 날조하여 5월에 북청(北靑)으로 귀양 갔다. 6월에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되었으니, 집권자가 혐원이 있어서 해친 것이다. 공은 귀양지에 있으면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나서 분향하고 시초(蓍草) 가지를 가지고 부모님의 안부를 점쳐 보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무인년(1698) 가을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 윤리 기강을 허무는 자가 있어 임금에게 아뢰어, 영전에 곡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상례가 아니었다. 기묘년(1699)에 방환되어 돌아왔다. 공은 먼저 묘소에 가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다가 삼으로 묶고 웃옷의 왼쪽 소매를 벗어 처음 상을 당한 것처럼 한 연후에 돌아가 영전에 곡하였으니, 예였다.
5년이 지난 계미년(1703) 가을에 영남의 안동(安東)으로 이사하였다. 영남은 산천이 맑고 아름다우며 풍속이 질박함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숭하여 오히려 예전 선현의 유풍이 남아 있었다. 공이 즐거워하며 살 곳으로 나아가니, 또한 일찍이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민정을 살피며 베풀어 주었던 은혜가 남아 있어 서리와 백성이 다투어 와서 생활필수품을 도와주었으나,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그곳의 유신(儒紳) 중에 학업을 청하는 이는 재주의 고하에 따라 이끌어 성취시켜 주니, 이에 한 지역의 인사들이 몰려와서 배웠다. 3년 만에 돌아와 서호(西湖) 가에 살았다. 신묘년(1711, 숙종37)에 직첩을 돌려주라는 명이 있었다.
갑오년(1714) 가을 8월 13일에 고종하니, 향년 68세였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명랑하고 온화하였으며 평소에도 덕성을 함양하였다.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 모든 경(經)과 제자서(諸子書), 고금의 치란득실에 두루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한 시대에 글 잘 짓는 문장가들이 공손하게 우위를 양보하였다.
그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 원자(元子)의 위호를 바르게 하는 때를 당해서, 한마디 말로 저지하는 이들의 뜻을 꺾어 버렸다. 중궁이 출궁당하자 언론의 직책을 맡고 있지는 않았지만 상소를 초하여 간절히 간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성인은 인륜의 귀감이 되는 분이니 어찌 일시의 기쁨과 노여움으로 인하여 비상한 거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사저로 돌아가게 했으니, 한나라 광무제(光武帝)나 송나라 인종(仁宗)도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후세에 전하를 일러 무어라 하겠습니까.” 하였다. 네 번 올렸으나 승정원에서 임금이 알까 두려워하여 아뢰지 않았다.
공이 호서에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어 벼나 보리를 수확할 수 없었다. 공이 곡식 옮기는 일을 헤아려 처리하여 많은 곡식을 얻어 온 마음을 다해 진휼하니 병들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소송하는 문서가 가득 차 넘치자 서리들을 신칙하여 붓에 먹을 묻히게 하고, 이리저리 듣고 판결하여 순식간에 모두 다 처리하였는데, 사람들이 각기 만족해하였다.
공이 영남 관찰사로 재직할 때 좌도에 기근이 심했다. 공이 조정에 아뢰어 우도에서 받은 곡식 중 감영에 소속된 것을 가지고 좌도가 내야 할 세금을 충당하고, 좌도에 있는 곡식을 헤아려 백성들을 구활하니, 일이 편리하면서 효과도 매우 빠르게 나타났다.
공은 평소에 가산을 경영하지 않았으니, 두 번 관찰사를 맡은 동안에도 척촌의 땅도 늘리지 않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을 때에는 농촌에서 섞여 지내며 형제간에 대부분 식사를 함께하며 네 것 내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맛있는 것을 같이 나누었다. 조카들을 정성껏 길러 때에 맞추어 시집보내고 장가보냈으며, 가난하여 살기 어려운 이에게는 땅을 나누어 주었다.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금하였으며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는 법도가 정연하였으니, 자부 및 딸들이 조석으로 문안할 때면 반드시 관디를 바르게 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글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늘그막에 마음이 청정해졌다. 젊었을 때 책을 보면 마음속으로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는데, 과욕(寡欲)이 마음을 잡는 급선무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글 짓는 요결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하였다. 공의 성대한 재주로 벼슬길이 열렸건만 곤액으로 말살되었으니, 문자가 빌미가 된 것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다. 이에 오회시(五悔詩)를 짓고는 ‘회(悔)’로 헌(軒)의 이름을 지어 뜻을 나타냈다.
공에게는 또한 현부인이 있는데, 배우자로서 어진 덕을 갖추고 있어 종족들이 모두 여사(女士)라고 불렀다. 시부모님을 효도로 섬기며 집안사람들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고, 손아래 동서와 어린 시누이들 사이에 처신할 때는 은의가 넉넉하였으며, 곤궁한 이를 도와주고 보살펴 주되 재물이 있고 없고는 따지지 않았다. 성품은 검소하였다. 남쪽 감영에 있을 때 사위를 맞이하였는데, 신방이 너무 검소하여 사람들이 혹 해괴한 풍속이라 의심하니, 말하기를, “내가 꾸며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니다. 이래야만 마음이 편안하다.” 하였다.
부인은 수양 정씨(首陽鄭氏)로 처사 휘 동직(東稷)의 딸이요, 대사간 황공(黃公) 휘 호(㦿)의 외손녀이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향년 8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묘소는 남양(南陽)의 치소 서쪽 사강촌(沙岡村) 유좌(酉坐)의 산 선영에 있으니, 공과 같은 묘혈이다.
5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정언 한종(漢宗)이고, 둘째 아들은 진사 한조(漢朝)이고, 셋째 아들은 한장(漢章)이고, 넷째 아들은 생원 한중(漢重)이고, 다섯째 아들은 생원 한도(漢導)이다. 큰딸은 지평 채응만(蔡膺萬)에게 시집갔고, 작은딸은 심수관(沈受觀)에게 시집갔다.
한종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흥주(興胄)와 흥효(興孝)인데 모두 요절하여 종자 계주(啓胄)로 후사를 삼았다. 한조는 아들 둘을 두었으니 영주(永胄)는 진사이고, 계주는 백부의 후사로 갔다. 한장은 딸 하나를 두었으니, 홍계원(洪啓源)에게 시집갔다. 한중은 숙부의 후사로 갔으며, 태주(泰胄)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한도는 종질 항주(恒胄)를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정언신(鄭彥愼)에게 시집갔다. 채응만의 아들은 채치공(蔡致恭)이고, 딸은 좌랑 오대관(吳大觀)에게 시집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왕가의 자손으로 명성이 드높았고 / 璿派遹駿
선행을 쌓은 선세의 유택을 이었다네 / 慶餘善積
공경이 되기도 하고 경상이 되기도 하여 / 載公載卿
대를 이어 고관을 지냈다네 / 載嬗車服
조상의 덕을 이어 공이 탄생하니 / 載誕夫公
밝고 진실하며 명덕을 지녔다네 / 顯允名德
우문과 사정 같은 가문에서 / 于門謝庭
우뚝이 빼어나 두각을 나타내었다네 / 嶄見頭角
입에 화려한 문장을 머금었으니 / 口含斐章
그 복심에서 연달아 나온 것이라네 / 綸繹厥腹
규벽과 패옥으로 위의를 갖추고서 / 璜步珩趨
일찍부터 조정에 이름을 드러내었고 / 夙揚王國
부절을 나누어 관찰사로 나가서는 / 履臬剖銅
백성들에게 은택을 두루 베풀었다네 / 旁霈濡澤
상황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 事與時遷
올라갔다 내려갔다 서로 바뀐다네 / 乘除互剝
저들은 깐깐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 彼其索性
앞에선 비난하고 뒤에서는 축하한다네 / 前咀後祝
공은 차분하고 여유 있게 / 公則于徐
운명에 맡길 뿐 공격하지 않았다네 / 處命不射
시의를 따라 자취를 거두고서 / 遵養斂手
밭두둑 사이에서 노닐었다네 / 矦隴矦陌
공의 집에서 공의 글 읽었으니 / 台廬台書
연세가 들수록 더욱 독실히 하였다네 / 耈壽冞篤
효도와 우애로 가정을 다스려 / 孝友爲政
예의와 규범이 법도에 맞았다네 / 軌儀維則
후손들이 밝게 선조의 자취를 계승하여 / 來許昭玆
바야흐로 길하게 되고 복되게 되리라 / 方祺方福
지금 이후로는 / 匪今伊後
지석이 징험할 것이로다 / 逝徵樂石
[주-D001] 공의 …… 사이이다 : 이현기(李玄紀)의 큰아들 이한종(李漢宗)은 둘째 아들 이한조(李漢朝)의 아들 이계주(李啓胄)를 후사로 삼았고, 이계주의 아들 이극성(李克誠)은 성호의 사위이다.[주-D002] 공은 …… 태어났다 : 대본에는 ‘公生於我仁祖大王靖社之十五年丁亥二月初四日’로 되어 있으나, 인조 15년(1637)은 정축년이고, 정해년은 인조 25년(1647)이다. 이현기(李玄紀)의 묘지명에 1714년(숙종40)에 향년 68세로 졸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문과방목》에, “생년은 1647년 정해년이고, 문과 합격은 숙종 2년(1676)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에 의거하여 ‘十’을 ‘二十’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3] 한나라 …… 일입니다 :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와 송 인종(宋仁宗)은 모두 황후를 폐하였으나 서인(庶人)으로 삼거나 출궁(出宮)시키지는 않았다. 광무제는, 황후 곽씨(郭氏)가 황제의 총애가 식은 것을 원망하자 황후 곽씨를 폐하여 중산왕태후(中山王太后)로 삼고 귀인(貴人) 음씨(陰氏)를 황후로 삼았다. 《後漢書 卷10 皇后紀 光武郭皇后》 인종은 곽 황후를 박대하고 상 미인(尙美人)을 총애하였다. 하루는 상 미인이 곽 황후를 범하는 말을 하자 곽 황후가 분을 참지 못하고 상 미인의 뺨을 치려다 잘못하여 인종의 목에 상처를 냈다. 이를 빌미로 곽 황후를 폐하여 정비(淨妃)로 삼고 장락궁(長樂宮)에 거처하게 하였다. 《宋史 卷242 后妃列傳 仁宗郭皇后》[주-D004] 우문(于門) : 자손들이 잘된 집안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때 우공(于公)이 옥송(獄訟)을 공평히 처리하기로 이름났는데,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문려(門閭)를 높여서 사마(駟馬)의 높은 거개(車蓋)가 드나들 수 있게 해야겠다. 내가 평소 옥사를 다스리면서 음덕을 많이 베풀었으니, 내 자손 가운데 반드시 크게 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더니, 과연 뒤에 그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丞相)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71 于定國傳》[주-D005] 사정(謝庭) : 사씨(謝氏)의 뜰이라는 말로 훌륭한 자제가 많은 것을 이른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자질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물으니,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庭〕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