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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삼시세끼 성찬식의 효과인 영육건강>의 줄거리: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약하고 병들고 잠자게 되는 이유가 성찬식의 참 의미를 모르고 그르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약함과 병듦과 잠을 잠은 영육의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당시 성찬식은 지금처럼 예배당 건물 안에 모여서 오르간 반주가 들리는 중에 진행되는 예식이 아니라 실제 식사였습니다. 실제 식사를 성찬식으로 바꾸면 나타나는 효과가 바로 영육 건강입니다.
삼시세끼 성찬식의 효과인 영육건강
(고린도전서 11:17~34)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삼시 세끼 성찬식의 효과인 영육 건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삼시세끼 성찬식의 효과인 영육건강”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성만찬과 관계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시 세끼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 식사를 식사로만 하지 말고 성찬식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먹는 것은 똑같지만 단순한 식사가 아닌 성찬식으로 할 때 우리가 의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영과 육의 건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삼시 세끼를 성찬식으로 먹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살펴보겠습니다만 의도하지 않았지만 삼시 세끼를 성찬식으로 먹으면 영과 육이 아울러 건강해지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건강을 의도하면서 삼시 세끼를 성찬식으로 하든지 본래 의도를 따라 성찬식을 하든지 모르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식에 담겨있는 본래 의도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삼시 세끼를 성찬식으로 하면 영과 육의 건강은 뜻하지 않게 주어지게 됩니다. 뜻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는 것을 무엇 때문에 이야기하느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과 육의 건강이 사라진다는 느낌이 들면 삼시 세끼를 성찬식으로 먹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찬에 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와는 모습이 달랐습니다. 예배당 건물에 모이는 형태가 아닌 특정한 몇몇 사람의 집을 골라서 소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형태였습니다. 성찬식 또한 지금 예배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는 모습이 달랐습니다. 지금은 쌀을 튀겨서 만든 플라스틱 조각 같은 것과 포도주나 주스를 작은 플라스틱 잔에 받아서 먹고 마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해 주실 때의 모습을 보자면 성찬식은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식사 위에 당신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얹어놓으십니다. 식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성찬은 빵과 포도주여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예배당을 보면 성찬식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권사님들이 빵과 포도주의 대용품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다 아시는 대로 유대 땅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일상적 끼니를 위한 음식이었습니다. 물론 성찬식이 제정된 때는 유월절이라는 특수한 명절이었기에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사용했습니다만 빵과 포도주가 일상적 식사였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대인들이 유월절 명절에 먹는 빵을 먹으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성찬식이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 위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얹어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밥과 국 정도였습니다. 밥과 국을 먹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얹어놓으면 성찬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실 때는 예배당에서 오르간 반주가 나오는 동안 엄숙한 포즈를 취하면서 받아먹는 예식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보통 두 끼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하루에 세끼를 먹습니다. 이렇듯 일상적으로 해결해야 되는 끼니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찬식이란 일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먹지 않기에 먹는 음식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얹어놓으면 그 식사는 성찬식이 됩니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와 콜라를 먹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햄버거와 콜라 위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얹어놓을 수 있다면 그 식사는 성찬식이 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시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고 마시는 것이 성찬식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셨다면 그것은 단순한 식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먹는 식사에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서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시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식사에 감사기도를 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감사기도를 하면 그 식사는 끼니를 때우는 음식이 아닌 성찬식이 됩니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얹어서 성찬식으로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30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찬식의 효과가 사라진 식사를 할 때 약하고 병들고 잠자는 자들이 많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성찬식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는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약한 대신에 강하고, 병든 대신에 온전하고, 잠자는 대신에 깨어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 교회에는 성찬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도시 곳곳에 흩어져있던 몇몇 집에서 모임이 이루어지며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임이 이루어질 때는 공동으로 식사를 하는 시간이 생기기 마련이었습니다. 이 공동식사를 보통 애찬(愛餐)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는 애찬의 시간이 곧 성찬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성찬이란 본래 예배당에서 드려지는 예식 중 하나가 아닙니다. 실제로 식사를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얹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유월절 성만찬 제정 사건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특정한 예식을 정해주신 것이 아니라 일상적 식사에 죽음의 의미를 얹어놓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끼니를 위해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올려놓고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성찬의 의미이기에 성도들이 모여 식사를 할 때는 애찬과 성찬은 구분될 수 없었습니다. 애찬도 실제로 음식을 먹는 일이고 성찬도 실제로 먹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애찬과 성찬의 구분 없이 이루어지는 중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어떤 집에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면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대표 격인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같이 식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때 이루어지는 식사는 각자 집에서 가져온 음식들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여유 있는 집에서 가져오는 음식과 여유가 없는 집에서 가져오는 음식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여유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상태에서 먼저 식사가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대표 격인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식사를 내버려 두고 식사가 다 끝난 후에야 공식적 모임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자 빈궁하여 음식을 가져오지 못하거나 여유가 없어서 보잘것없는 음식을 가져온 사람들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여유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다 먹고 심지어 취해있기까지 하였습니다. 빈궁하고 여유 없는 교인들이 배고픔을 겪고 심리적으로 수치심까지 느껴야 하는 상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식사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올려놓는 성찬이라 할 수 없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의 애찬도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책망합니다. 배가 고프면 차라리 집에서 먹고 와야지 이런 일에 성찬이나 애찬이라는 말을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성찬식 사건을 통해 우리는 성찬식의 진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찬식은 절대로 예배당에서 오르간 소리가 나오는 중에 쌀을 튀겨서 만든 플라스틱 조각 같은 것과 플라스틱 잔에 담긴 포도즙을 마시는 행사가 아닙니다. 성찬(聖餐)은 말 그대로 거룩한 식사입니다. 이 거룩함을 예배당이라는 건물에 가두어 두려 해서는 삶은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거룩함의 사건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여야 일상이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곧 좋은 방면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궁극적이고 최고로 좋은 상태가 거룩함입니다. 이로부터 성찬의 의미 또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찬은 곧 가장 좋은 식사입니다.
밥을 간장이나 고추장에 비벼 먹는 보잘것없는 식사를 할 때라도 그 위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얹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구분되고 거룩한 식사인 성찬이 됩니다. 거룩하기에 내가 먹을 수 있는 식사 중에 가장 좋은 식사입니다. 이것이 성찬식의 본래 의미입니다. 음식이 무엇이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던 빵과 포도주는 왕이 먹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중동 땅의 왕이나 총독 같은 권력자와 부자들이 먹는 산해진미가 아니라 일상적인 음식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얹어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일상적 식사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빵을 먹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다. 지금 포도주를 마시지만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나의 먹거리이다.”라고 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성찬식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식사를 합니다. 이렇게 음식을 통하여 주님을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몸이 음식을 먹듯이 마음이 주님을 음식으로 먹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억하여 마음에 간직하는 기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먹는 방식으로 주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마음의 먹거리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5절을 보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마음의 음식이 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기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려면 하루에 한 끼든 두끼든 식사를 해야 합니다. 그 끼니를 이어갈 때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서 기억함으로써 육체가 음식을 먹듯이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입니다. 먹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기억하고 마음에 담는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한 가지 방식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찬식을 제정하신 예수님께서는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세상을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더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교통해야만 했고 만남을 지속해야만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먹는 방식으로만 예수님과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찬식의 의미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고 관계하고 싶으시다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내가 죄 사함을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나와 동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 우리 가정과 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더라도 이것이 예수님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예수님과의 관계는 시작도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같이 먹는 끼니에 예수님의 죽음을 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식사를 할 때마다 “주님! 지금 육체가 음식을 먹듯이 내 마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입니다. 성찬식은 반드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서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듯 마음이 예수님을 먹을 수 없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찬식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문제는 먹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둘째이고 그 음식에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에 예수님의 죽음을 얹는 일은 결코 어렵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습니다. 하면 되는 일인데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먹는 일을 육체로 음식을 먹는 일에 결부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먹은 음식의 기운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할 때 심하게 몸이 아픈 환우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면 예외 없이 5일 안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미 약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면 기운이 다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먹는 음식 위에 당신의 죽음을 얹어놓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먹는 일이 중단되면 우리의 마음은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것은 성찬의 의미가 사라져버린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발견되었던 일입니다. 30절에서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잠잔다는 표현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먹지 못하여 약해지고 병들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약하고 병들고 죽습니다.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마음이 약하다는 것은 세상에 먹히고 세상을 뿌리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의 양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우리가 음식으로 먹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이 죽어야 합니다. 소고기를 먹으려면 소가 죽어야 하고 돼지고기를 먹으려면 돼지가 죽어야 합니다. 심지어 김치를 먹어도 죽은 배추를 먹는 것이고, 밥을 먹어도 죽은 쌀을 먹는 것입니다. 죽어야 음식이 되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 마음의 음식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때에 그 기운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떨쳐버리게 만듭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야 직장에서 일도 하고 가정에서 가사를 돌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을 먹어야 그 기운으로 세상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운은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음식으로 먹을 때에만 생겨납니다. 육체가 배고파서 음식을 먹듯이 마음은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운이 떨어지면 당장에 나타나는 일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이 세상 것들이 마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우울함이 생기고 무력해집니다. 세상에 대해 무력해져서 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없이도 기쁘고, 세상없이도 만족하고, 세상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힘이 다 빠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할 수 있는 힘도 없어집니다. 몸에 병이 들면 신체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약하다는 것은 기운이 없다는 것이고 병든다는 것은 신체의 질서가 깨져서 약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손에 병이 나면 쥐고 펴는 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눈에 병이 생기면 보는 작용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작용이 있습니다. 마음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 작용과 좋음을 추구하는 욕구 작용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의 좋음을 욕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작용이 고장나 버렸기에 병든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함과 병듦이 계속되다 보면 마음은 잠들고 죽어버리게 됩니다.
한편 성찬식의 효과는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사도 바울조차도 몸에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생활화의 원조로서 십자가 생활화를 주창하였고 이론과 실제를 완성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도 사탄의 가시라고 별명을 붙일 정도로 괴로운 질병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이 병을 위해 기도하였으나 이윽고 이 병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타나실 수 있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주신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질병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루 세끼를 먹을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하며 살아갈 때 성찬식의 취지는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기운이 내 안에서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영적으로 강하고 온전한 기능을 행하고 하나님께 깨어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사람을 더 밀착시키기 위해 주시는 질병이 아닌 소위 말하는 신경성 질병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마음의 걱정, 근심, 염려, 두려움, 불안과 충격에서 발생하는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효과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현대인이 가진 70% 이상의 질병이 신경성이라고 하고 면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놓은 거룩한 식사가 성찬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매 끼니를 가장 최고로 좋은 식사를 해나간다면 육체에도 좋은 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약보가 식보를 못 따라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어도 음식을 맛있고 행복하게 먹는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고로 좋은 식사는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놓는 성찬입니다. “주님! 제가 음식을 먹듯이 제 마음이 주님을 먹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죽음의 기운이 제 마음에서 언제나 살아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음식의 기운이 떨어지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죽음의 기운이 떨어지면 또 다시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의 기운이 떨어질 날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감사하면서 먹는 식사는 성찬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성찬은 영혼과 육신에 약함 대신에 강함을 주고 병듦 대신에 온전함을 주고 하나님에 대해 잠자는 대신에 깨어있음을 허락해줍니다.
성도가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는 모든 시간은 성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해 주실 때의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던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얹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성찬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 위에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놓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혼자 밥을 먹어도 성찬식의 의미는 충족될 수 있습니다. 혼자 라면을 끓여 먹어도 최고로 좋은 식사로서의 성찬이 될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고 국물을 마시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먹고 마시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라면을 주신 것이 감사하듯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너무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라면 기운으로 다음 끼니까지 살 수 있듯이 주님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그 기운으로 이 세상을 이기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 원기 왕성함이 허락됩니다.
이렇게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마다 주님의 죽음의 의미를 얹어놓으면 그 식사는 성찬이 됩니다. 성찬은 내가 먹을 수 있는 최고로 좋은 식사입니다. 최고로 좋은 식사를 할 때 우리의 마음은 강하고 온전한 기능을 행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깨어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먹으면 기운이 나면서 하늘이 보이게 됩니다. 사무엘상 14장 27절을 보면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아무 음식물도 먹지 말라는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꿀이 요나단의 눈을 밝게 하였듯이 성찬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영적인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음식으로 많이 먹으면 영적인 기운이 생겨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이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강하고 온전한 기능을 하게 됩니다. 기운이 왕성해져서 하나님에 대해 깨어있게 됩니다. 그러면 심리적으로도 편안하고 온전한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육체의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제일 먼저 할 일은 삼시 세끼에 예수님의 죽음을 얹어서 성찬을 만드는 것입니다. 음식과 예수님의 죽음을 결합시킴으로써 몸이 음식을 먹을 때에 마음도 예수님의 죽음을 먹고, 몸이 음식의 기운으로 살 때 마음도 예수님의 죽음의 기운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이 그리던 온전한 성도의 모습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영육의 강건함이 부수적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운을 얻고 세상을 떨쳐버릴 수 있는 기운을 얻기 위해서 음식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결합시킬 뿐입니다. 음식을 먹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었을 뿐인데 의도치 않은 건강 또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육신이 아프고 약하고 병들 때 언제나 첫 번째로 취해야 될 방식은 성찬입니다. 음식을 먹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가를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이란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가장 좋은 상태입니다. 당장에 삼시 세끼를 거룩함의 식사인 성찬으로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일용할 양식에 주님의 죽음을 얹어놓으셔서 삼시 세끼를 성찬식으로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이렇게 받은 은혜를 활용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삼시 세끼를 성찬으로 먹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