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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 2023년 7월 9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도행전 7:51-60
사람은 얼마든지 자신을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십자가의 대속에 대한 정보와 과거에 자신이 받고 경험한 은혜와 현재 몸으로 행하는 종교적인 행위들 즉 예배, 기도, 구제, 선교, 봉사, 교제 그리고 직분 등으로 나는 믿음이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하는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이라는 그 말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최상호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다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누군데? 내가 뭐라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까지 버리십니까? 나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며 하나님의 원수인데 벌레보다 못한 나를 살리려고 아들을 주십니까? 그 아들에게 내가 지은 그 더럽고 흉악한 죄를 다 전가시켜 아들을 죄인이 되게 하여 나를 대신하여 그 아들을 심판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대속해주신 그 아들을 믿고 회개할 때에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의롭다하시고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건져내어 천국에서 완전한 기쁨으로 영생하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게 정말 마음과 영으로 믿어지십니까?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이 놀라운 복음이 마음과 영으로 믿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기가 막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믿어지는 사람들이 많은 게 아닙니다. 지식과 머리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 마음과 영으로 회개하고 믿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격과 삶은 그대로 인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이기에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고 나를 낮추어 남을 높이고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순종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인 겁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아멘 아멘 하고 심지어 말씀을 들으며 눈물까지 흘리니 믿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그 모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 속사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정말 변화되었는지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변화되겠습니까? 죄를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자신도 죽는 사람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고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타락한 교만한 나가 죽는 사람만이 즉 회개한 사람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만나 마음과 영으로 회개한 자들은 육체와 세상을 즉 죄를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을 박은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며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좁은 길만을 가는 것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를 만난다는 것은 곧 회개와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주인인 타락한 죄인이기에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즉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 앞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회개와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스라엘 교회의 성도들에게 증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이며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을 사랑하셔서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셨는데 그 분이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파한 것입니다. 그 예수가 너희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말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인들이라고 할 때 그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말씀합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포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이 시대의 교회 안에서 정말 회개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왜 성도들이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줄 알까요? 그것은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죄를 드러냅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다 내가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주인 됨과 타락한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는 교만한 자아숭배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나와 십자가를 만나고도 십자가의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신의 주인 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끊어내지 못하고 그 죄와 싸우지도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목이 곧고 뻣뻣한 것입니다. 아주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으로 함께 섬기는 영적인 간음이 익숙해지고 그 불의가 자연스럽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처럼 변질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기 위해 온 자들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의심치 않던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 그리고 스데반이 성도라고 일컫는 자들에게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입니다. 너희들이 진짜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이냐는 겁니다. 네 죄를 대속하고 죽으신 십자가의 그 거울 앞에서 네가 어떤 자인 줄 보라는 겁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니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겠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 회개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내 모습을 슬쩍 보았더니 흉측한 괴물이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에 멀찍이 떨어져 자신을 보았을 때에는 아주 괜찮은 믿음이었습니다. 의인처럼 보였습니다. 당연히 구원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거울을 내 앞으로 가까이 들이대자 그 거울 앞에 드러난 나는 징그럽고 역겹고 흉측한 괴물인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 십자가의 거울을 내 앞으로 들이 댄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결국에 죽여 버린 것입니다. 거울도 깨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십자가를 전할 때 마음이 찔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스데반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스데반도 그렇게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까? 스데반이 불신자들에게 죽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 종교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교회마다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인 이 종교인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교회에서 거룩하게 앉아있는 그 괴물들에게 감히 십자가의 거울을 들이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 자신도 이미 자신을 보지 못하는 괴물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와 회개의 복음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구원은 당연히 받는 것으로 안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십자가와 회개의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에게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미가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아합은 듣기 싫은 말만 하는 미가야를 미워했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가는 아합의 사신이 뭐라고 말합니까?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왕이 기뻐하는 말을 해달라고 압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야에게는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말은 우리 하나님이 죽었니?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죽었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스데반은 교인들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를 죽인 이 죄인들이여!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입니다. 아합이 미가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스데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겠습니까?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회개는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과 함께 나도 그 십자가에 죽는 겁니다. 육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죽는 게 쉽습니까? 그래서 타락한 인간에게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게 회개입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는 겁니다.
먹을 게 없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식을 잡아먹었습니다. 그 부모들이 평소에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악해도 자식은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먹을 게 없어 굶어죽을 때 나를 먹으라고 누가 자기 팔을 잘라내겠습니까? 자식을 잡아서라도 나의 배고픈 고통을 없애려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위해 살던 죄인인데 범죄한 눈과 손과 발을 내 손으로 잘라버리는 것이 이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내 믿음은 옳고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의심하지 않는데 그 믿음을 인정받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합니까? 부자 청년이 회개하였습니까? 열심과 행위를 의지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회개하였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자신의 믿음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내가 구원을 못 받았냐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믿었는데 내 믿음이 잘 못되었구나. 내가 잘 못된 길로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서 애통하며 회개하는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며 주구장창 교회는 다니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는 해도 회개한 자들은 적은 것입니다. 항상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내 마음과 뜻대로 살았는데 종의 자리로 내려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되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은 뻔뻔스럽게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주인으로 그대로 있으면서 종인 척하는 것입니다. 믿는 흉내를 내는 것이지 회개하고 거듭난 게 아닙니다. 입으로 하는 말을 보면 하나님을 아주 대단하게 만난 것 같지만 자기의 뜻과 감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순간이 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증거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내가 주님과 함께 죽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너무 많은 것입니다.
야생에서 제 마음대로 살던 말에 고삐를 채워놓으면 그 말이 그때부터 가만히 순종합니까? 어떤 말이 스스로 원해서 고삐를 채워달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누구의 종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까? 저는 복음성가 중에 ‘내가 주를 처음 만났을 때’ 그 가사가 꼭 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주를 처음 만났을 때가 있었고, 다시 주를 만났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죄인임을 회개하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고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주님을 만났을 때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큰 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육신도 그렇고 영적으로도 깊은 병이 들어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드러난 제 모습은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옷은 다 찢어지고 부끄러운 곳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옷을 벗어 주시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니 나는 흉측한 괴물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지만 내 안에 정욕과 탐심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얼마나 음란하지, 얼마나 욕심은 많은지, 얼마나 교만한지, 얼마나 미련한지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 빛으로 내 안에 있는 그 괴물이 드러나고 그 괴물을 십자가에 못을 박을 때 그것은 귀신이 나갈 때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만들고 나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누구나 다 괴롭습니다. 그 밝은 빛 앞에 어둠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에 익숙해진 자들은 빛으로 오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자신의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 맑고 깨끗한 십자가의 거울 앞에 내 영혼의 티끌만한 죄악도 다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거울을 자신 앞에 들이대는 사람도 미워하고 당장 치우라고 이를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빛과 거울 앞에서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이 됩니다. 거기서 회개하느냐 못하느냐가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을 보며 마음에 찔려 괴롭고 고통스러워 울며 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자신을 못을 박고 나는 죄인이고 어찌 해야 하냐고 회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과 귀에 할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드러난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에 마음이 찔릴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분고하고 증오하며 이를 갈고 십자가를 부셔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깨뜨리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그 죄인이라고 전할 때 그때에도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괴물 됨을 인정하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와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자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밝은 빛 앞으로 그 맑고 깨끗한 거울 앞으로 가까이 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모습 그대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까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십자가에 가까이 갈 때마다 드러나는 자신의 죄인 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며 갑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간 세리가 그래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운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괴물 같은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도 깜짝 놀라는 겁니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흉측한 괴물인 겁니다.
아주 끔찍한 벌레인 겁니다. 세상에 뭐 이런 게 있나 싶은 겁니다. 아주 음란하고 탐욕스럽고 간교하고 교활한 죄인의 괴수인 겁니다. 징그러운 괴물인 겁니다. 내 자신이 끔찍한 겁니다. 어떻게 주님이 나의 이 더러운 죄를 대속하셨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지금까지 참으셨는지 기가 막힌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나의 실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십자가 앞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마음과 영으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교회는 오래 다녀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주제를 모르니 교회에서도 교만하게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고 목사와 맞먹는 게 아니라 목사를 우습게 알고 제 밑으로 아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월급을 주고 고용한 종으로 아는 겁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이상해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겁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마귀가 되가는 것입니다. 그 육체로 행하는 종교적인 행위는 늘어나는데 말입니다.
그전에 섬기던 우상도 버리고 교회에 나와 주여 주여 하며 직분도 받고 하나님과 십자가에 은혜에 대한 지식도 많아지고 예배도드리고 헌금도하고 기도도하고 봉사와 헌신도 하고 전도도하고 또 은사도 받고 방언도하고 환상도보고 음성을 듣고 신비한 영적인 것을 체험하니 자신이 틀림없이 믿음이 있는 것 같고 특별한 사람 같고 괜찮은 사람 같고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설프게 십자가를 만나고 적당히 회개하니 오히려 교만해지고 십자가를 이용하여 주인노릇을 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고 아주 꼴값을 떠는 겁니다. 바울이 나보다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못나서 나는 날마다 십자가에 죽어야 하고,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이며, 사도라 칭함을 받을 수 없는 가장 작은 자이며,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겠습니까?
사울이 십자가를 만나기 전에는 얼마나 잘난 사람이었습니까?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였습니다.
사울의 그 자랑이 십자가를 만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자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 주인노릇 하고 목이 곧고 뻣뻣하고 교만한 내가 죽고 겸손하고 거룩하고 온유하고 사랑이 많으신 진짜 주인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로 회개하고 거듭났을까요? 정말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까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을까요?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어떤 길을 가는지 나의 실체가 무엇인지 발견하셨습니까? 지금 입고 있는 그 육체를 벗으면 과연 내 안에 무엇이 나올까요?
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뱀에 물리게 하셨습니까?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광야라는 교회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길에서 불평하는 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이 교회에서 뱀, 마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불러와 그 뱀에 물려 고통을 받게 하셔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장대에 걸린 놋뱀을 보는 자들은 자기 죄를 대속하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장대에 달린 놋뱀 앞에서 자신의 뱀 됨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광야로 나와 영원한 소망을 이루어가는 그 길에서 자신의 뱀 됨이 나온 것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자들은 그래서 뱀같이, 마귀같이 타락한 자신의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징그러운 뱀과 끔직한 마귀로 타락한 내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신 그 십자가를 마음과 영으로 만나는 자들은 그래서 자신의 주인 됨 즉 마귀와 뱀 같은 자아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는 회개와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못하면 교회는 다니며 믿는 척 흉내는 내도 여전히 뱀 같은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죽은 다음에 심판대 앞에서 징그러운 뱀으로 드러날 때 그 마귀와 함께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로 들어가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그 실체를 깨닫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고 회개하고 거듭나서 나는 날마다 죽고 오직 내 안에 주님이 사는 십자가의 그 좁은 길만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