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 도마가 잠든 산 토메 성당
마말라푸람에서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이번 인도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첸나이로 향했다. 거친 파도가 출렁이는 벵골해를 바라보며 첸나이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은 산 토메(San Thome) 성당이다.
산 토메 성당은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인 도마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첸나이에 가면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예수의 12제자가 인도까지 와서 순교를 했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최근 사도 도마는 우리나라에도 복음을 전파했다는 설이 주장되고 있어 교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 2리 왕유동(속칭 왕머리) 분처 바위에는 분처상(分處像)과 그 좌측에 암각된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88년 학계에 사도 도마가 한반도에 왔었다고 발표해 주목을 받은 도마박물관 조국현 박사는 "26년 동안 500여 명의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쳐 이제는 사도 도마가 한반도에 온 것이 확실하게 입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도마는 예수가 부활한 후 터키 지방 에뎃사로 선교를 떠나, 이후 인도 군다포러스 왕에게 가서 왕궁을 지어주고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을 지나 실크로드를 타고 땅 끝 나라인 한국에 들어왔고, 낙동강 하구인 김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가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고 철기문화를 일으킨 후 다시 배를 타고 인도에 건너왔다고 한다(출처: 2014.11.03자 뉴스천지, 한반도에 예수 제자 '도마'가 왔었다고?)
의심쟁이 도마
도마의 분처상이 있는 곳을 기회가 나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의 직업은 목수였다고 한다. 도마는 십자가에서 부활된 예수를 끝내 믿지 못했다고 한다. 성경에는 도마와 관련된 다음 구절이 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 한지라(요 20:24),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예수께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8~29)
상기 성경으로 보아 도마는 의심쟁이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믿으려고 했던 실증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옳을 것이다. 그 후 도마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평생 동안 먼 곳까지 순례를 하며 전도활동을 펼쳤다.
한반도에 기독교가 유입된 경로는 서행(西行)론과 동행(東行)론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이 로마를 거쳐 북미, 아시아로 유입되는 서행(西行) 과정이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의 선교여행이다. 바울은 소아시아 연안지방을 지나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를 거쳐 로마로 복음을 전파했다. 이후 복음은 구라파에서 북미로, 북미에서 아시아로, 19세기 말 한국 땅으로 전파됐다고 보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도마가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중매를 섰다?
그러나 동행(東行)론도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곧바로 복음이 전파됐다는 학설이다.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을 가리켜 ‘그 흩어진 사람들(행 8:4)’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중에 바로 예수의 제자 도마가 있었다는 것. 도마가 선교여행으로 시리아와 인도를 거쳐 중국에 왔고 우리나라까지 발길이 닿았다는 주장이다. 도마의 한반도 복음 전파설은 통일신라 때 것으로 밝혀진 ‘경교 돌십자가’ ‘마리아상’, 김해 수로왕릉의 ‘쌍어문’ 등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문화재가 발견됨에 따라 그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도마박물관 조 박사는 가야국에 온 도마가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혼인을 중매했고, 다시 인도 서남부와 미조람 등에서 선교하다가 인도 첸나이 지방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도마는 실증주의자답게 주님에 대한 신앙의 확신으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로부터 멀리 인도와 그 넘어 아시아 국가까지 선교를 하다가 이곳 남인도 첸나이 근교에서 순교를 하게 된 것이다.
빈민을 구제하다가 인도에서 순교한 도마
산 토메 성당은 사도 도마의 무덤 위에 포르투갈 인이 1504년에 걸립한 것을 1893년에 재건축한 것이다. 성당 뒤편에는 도마의 무덤이 보존되어 있고, 박물관에 도마의 유물로 보이는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얀 벽에 벽돌색 지붕을 이은 네오 고딕양식의 산 토메 성당이 퍽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고대 드라비다인들의 석조사원들과는 영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인도답지 않는 생뚱맞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지역 해변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홍해를 경유해 인도와 말레이반도 등 남 아시아와 국가들과 교역을 했다는 문헌기록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도마가 인도에 기독교를 전도한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13세기 시리아 교화사가(敎會史家) 바르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는 "주의 승천 2년 후 사도 도마가 동방, 즉 인도와 그 밖의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도마에 대한 문헌기록이나 전언과 함께 도마가 인도에서 전도한 사실을 실증해주는 몇 가지 유물도 발견되고 있다. 현 인도 남부 첸나이주 마말라푸람의 성 도마 교회 부근 고분에서 1543년에 인도의 한 왕이 도마 교회당 건립을 위해 대지를 희사했다는 내용이 적힌 동제 창이 출토되었다.
1547년에는 성 도마 교회 부근의 성 도마산에서 중앙에 십자가가 조각되고 그 위에 비둘기 모양이 그려져 있는 석비(石碑)가 발견되었는데, 좌우에는 팔라비(Pahlavi)어로 "메시아와 높으신 신과 성령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출처: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 창비).
그래서인지 성당 내부 예수님 상 밑에는 특이하게 새를 조각하여 놓아두고 있다. 첸나이 남쪽에는 '도마의 언덕'이라는 언덕이 있는데, 이 언덕에서 도마가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도마는 당시 첸나이 왕의 총애를 받아 궁전을 짓는 건설 책임자 지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왕궁을 짓는 경비의 일부를 빼돌려 빈민을 구제한 것이 발각되어 참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도마의 영향 탓인지 성 토메 성당에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참배객 중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도 있었다. 성당을 참배를 한 후 아이들은 계단에 앉아서 손으로 점심을 먹었다. 인솔자가 쟁반에 나누어 준 탈리를 손으로 집어먹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퍽 순진하게 다가왔다. 첸나이 근교 시골학교에서 성지 순례를 온 초등학교 학생들이라고 하는데, 신발을 신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고, 다 헤진 샌들을 신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이들이 모두 저마다 손에 스마트 폰을 들고 있을 텐데 인도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맨손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손으로 맛있게 밥을 집어먹는 아이들은 표정은 그 어떤 불만도 없어 보였다.
아이들의 헤진 샌들을 보자 나는 한 때 짚신을 신고 다녔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짚신을 신고 다니다가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검정 고무신을 신을 수 있었고, 운동화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신을 수 있었다. 짚신이든 고무신이든 운동화든 그 시절에는 다 헤져 떨어질 때까지 신고 다녔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불만 보다는 새로 만들어준 짚신을 신을 때마다 매우 행복했으며, 떨어진 고무신과 운동화를 새것으로 바꾸어 신을 때는 너무너무 행복했다. 저 인도의 아이들처럼 새끼 밥만 먹어도 행복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좋은 구두나 등산화를 신어도 그 때의 행복감은 느껴 볼 수가 없다. 저 인도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행복이란 결코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인생의 바닥을 확인케 하는 인도여행
15년 전 인도에 첫 발을 내디딘 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자꾸만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왜일까? 삶이 고단해지면 자꾸만 인도로 가고 싶으니 말이다. 아마 인도는 그 어디에서도 느껴볼 수 없는 자유스러움, 싼 물가, 신비한 문화와 종교…… 뭐 이런 것들이 나를 자꾸만 끌어당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도에 발을 내 딛는 순간 무더운 날씨와 더러운 거리, 물밀 듯이 몰려드는 인간의 홍수, 거지 떼, 파리와 모기…… 등으로 지독한 고행 길로 접어들게 된다. 처음 인도 땅을 밟았을 때는 어찌나 고통스럽던지 다시는 인도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자꾸만 다시 인도로 가고 싶어지니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도로의 여행을 다녀 올 때마다 나는 알게 모르게 내 영혼이 위안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인도 현지인들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나는 더 이상 내려 갈 수 없는 내 인생의 밑바닥을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 토메 성당은 마리나 해변과 연결되어 있다. 무려 13km에 이르는 해변에는 거친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 노인이 다 헤진 샌들을 집어 들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변에는 고깃배들이 통통거리며 돌아오고, 어부들이 바쁘게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손으로 밥을 먹는 인도의 아이들, 바쁘게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을 바라보며 나는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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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내와 함께 떠난 세계일주 원문보기 글쓴이: 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