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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목격자에서 증거와 증인으로의 변화>의 줄거리 :
성경의 기록상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이방인으로서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첫 번째 사람이 됩니다. 출애굽과 홍해 도하 등의 기적의 현장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소중한 영적인 원리가 등장합니다. 바로 '증언'입니다. 수많은 기적 사건의 현장에서 하나님 있음을 실감하게 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다 스스로 증거가 되어야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 목격자로부터 이제 이런 다양한 기적들은 증언되면서 하나님 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증언을 듣고 증거가 된 모든 사람은 또 다신 증인이 되는 선순환이 반복되면서 교회는 확장됩니다.
목격자에서 증거와 증인으로의 변화
(출애굽기 18:1~12)
5.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6. 그가 모세에게 말을 전하되 네 장인 나 이드로가 네 아내와 그와 함께 한 그의 두 아들과 더불어 네게 왔노라
7. 모세가 나가서 그의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8.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
9.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10.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1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본문에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그동안 헤어져 있던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방문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중심으로 ‘목격자에서 증거와 증인으로의 변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격했다면 목격한 사실에 대하여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200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지만 모두가 증인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증인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광야에서 다 죽어야만 했습니다. 200만 명 각자는 목격자에서 증거가 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목격자였을 뿐 스스로 증거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목격자는 스스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증거가 된 상태에서만 증언을 할 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퍼져나가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곧 증언 속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목격한 것과 같은 효과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목격했다면 증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증거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에 문제가 없으면 스스로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증거가 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저절로 증인이 됩니다.
본문의 특이한 점은 미디안 제사장이자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드로가 출애굽 이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갖게 된 최초의 이방인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드로는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 홍해 도하의 기적, 마라의 쓴물 사건, 만나 사건, 르비딤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과 반석에서 물이 나온 사건, 아말렉과의 전쟁 등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있음을 드러내시기 위한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 이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적 행위를 했습니다. 이드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증언의 효과 때문입니다.
8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드로에게 한 일은 증언입니다. 증언의 효과는 독특하고도 영적으로 매우 소중합니다. 증언은 쉽게 말해 하나님의 있음을 담아 보존하는 그릇입니다. 모세의 증언이라는 그릇에는 열 가지 재앙이라든지 홍해 도하 사건을 비롯한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있음을 드러내셨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은 노출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그대로 지나가면 하나님의 있음 또한 일회적 사건으로 묻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증언은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을 담고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드로를 만난 모세는 증언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던 하나님의 있음을 언어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들을 증언의 그릇에 담아서 이드로에게 먹으라고 제공한 셈입니다. 이드로는 기적의 현장에는 없었지만 증언을 통해 사건이 재현됨으로써 그 기적의 현장에 참여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이 증언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증언은 교회의 성립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에 대한 증언 위에 서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연관되어서 일어난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눈으로 본 사건들의 증언을 통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재현했습니다. 이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어를 통해 나타난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증언을 통해 재현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사상이나 철학, 심지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복음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증언에 바탕을 둡니다. 증언하는 가운데 재현되는 사건 안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갈 때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증언을 듣기 전까지는 자연스러움과 일상성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이 묻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알아도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강렬하게 드러낸 사건들이 재현됩니다. 이때 증언을 듣는 이의 마음은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부터 마음은 세상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차단되어 확실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증언을 듣는 모든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방식이 증인으로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의도적으로 드러내신 사건들을 증언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증언을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 증언을 통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재현할 때 그 언어를 듣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게 된다면 그는 예정하신 사람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정하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앞서 우리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 이드로가 모세의 증언을 받아들인 사건은 여호와 닛시로 표현되는 아말렉과의 전쟁이 전제 조건이 됩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이고, 깃발은 전쟁터에서 무조건 지켜야만 하는 군대의 상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마음에서 지켜내야만 합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여호와를 지켜내는 과정 이후에 증인이 되고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앞서 이스라엘 200만 명은 목격자였으나 이들 모두가 증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있음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증인이 되지 못한 채 광야에서 다 죽고 맙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여호와 닛시의 의미는 상실되었고 하나님의 간곡한 요청을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지켜내는 일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이들은 목격자에서 증인으로 바뀔 수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지켜내는 과정이 요구됩니다. 또 다시 아말렉 같은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있음을 지켜내는 과정이 있어야 증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나 스스로를 증인으로 만드는 증거가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9~1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육체를 입고 있는 나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 있음의 증거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하나가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가 역사하시듯이 예수님을 믿는 자 안에서도 아버지가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증거가 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 또한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증언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신 기적의 사건을 증언을 통해 마음으로 목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증인의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하나님의 있음이 강렬하게 드러난 기적의 사건들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드로는 마음에서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그 있음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드로 앞에서 증인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이라면 모세와 같은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증거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그동안 떨어져 있던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왔습니다. 앞서 우리는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받고 애굽으로 가는 도상에서 할례의 문제로 죽다 살아난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십보라가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포피를 잘라서 모세의 발에 던짐으로써 모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십보라는 처가로 돌아갔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드로에게 증언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가족들과 헤어져 있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6~38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란 자기 집안 식구 외에도 하나님보다 먼저 마음을 쓰게 하는 모든 대상을 죽이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식이 없습니다. 이미 부모가 돌아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십자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다른 대상을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보다 먼저 마음을 쓰게 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죽어야 함을 자기 십자가를 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떨어뜨려 놓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증인이 될 수 있도록 그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에 집중할 조건을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가족들을 동반했다면 아내의 있음, 두 아들의 있음이 끊임없이 모세의 마음에 존재감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할 마음을 할애해야 하고 빼앗아 가는 요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처럼 우리 마음을 빼앗는 존재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많이 빼앗아 간다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 드릴 수 없다면 하나님을 내 마음에서 얻을 수 없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내게서 지켜집니다. 가족들의 있음이 존재감으로 작용하여 내 마음을 침탈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소중한 대상이셔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빼앗아 가는 대상은 아말렉이자 원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음이 아직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주권적으로 가족과 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주권적으로 장인이 가족들을 데리고 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지켜낼 수 있는 일에 아내나 두 아들 앞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출애굽으로 시작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있음이 드러나는 기적들을 목격자의 차원을 넘어서 스스로 증거가 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 있음에 대해 증거 됨의 의미를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 자체로 하나님 있음의 증거가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 같은 증거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증거가 되지 못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증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인격적 존재이기에 증거 됨도 인격적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인격의 특징입니다. 인격이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이 존재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구장창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와 대화를 할 때도 마음에서 아내의 존재감이 큰 상태에서 말할 때와 하나님의 존재감이 큰 상태에서 말할 때 그 내용이 같을 수 없습니다.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마주할 때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이 충만해야만 할 수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있음의 증거가 된 상태입니다.
건강에 대한 생각이 충만한 사람은 건강이 제일 소중합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건강이 최고라는 증거로 나타납니다. 입만 열면 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돈이 마음에서 일등이라는 증거입니다. 입만 열면 자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 인격에서 자녀가 일등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있음의 증거가 되려면 내 마음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내 인격 자체가 하나님이 일등이시라는 증거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족들을 만나게 하신 이유는, 이제 모세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머물면서도 인격적 증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모세 안에서 허물어짐이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증거가 된 상태에서 가족을 만나게 하셨고, 모세는 스스로 증거가 되어 이드로를 변화시키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격이 증거가 되지 못한다면 올바른 전도도 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전도를 하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전도를 나갑니다. 전도가 이데올로기가 되고 명령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율법적 신념(dogma)이 되어버렸습니다. 전도를 해야만 한다고 세뇌당했습니다. 그렇기에 정작 마음에서는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도 상을 받고 싶은 생각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목사님이 그렇게 전도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의 목적이 예배당을 채우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세뇌된 전도를 받은 사람이 예배당 안에 들어와도 신앙인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증인이라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갖게 된 사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사건이 되려면 나 자신이 증거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충만하면 할 수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서 돈 문제를 관계하고, 건강 문제를 관계하고, 가족을 관계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마주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으로 충만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목격했다면 내가 목격한 내용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 증거 됨입니다.
나 스스로 증거가 될 수 없다면 증인도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증언을 받아들였다면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충만히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증거가 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증언을 통하여 목격하고도 증언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분명히 증언 속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목격했더라도 내 안에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이 충만치 않다면 스스로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증거가 되지 못했기에 다른 사람에게 목격한 사실에 대해 증언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증언을 받아들였다면 하나님 있음에 대해 나 스스로 증거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200만 명이 하나님의 있음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모든 기적을 목격하고도 증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증거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는 가나안 족속들의 존재감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티끌처럼 여겨져서 물리쳐 버리고, 사장되어 버리고, 쫓겨나 버리고, 몰려가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가나안 족속 있음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고 말았습니다. 본래 이들은 가나안 족속 앞에서 하나님 있음의 증거가 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 족속의 있음 앞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지켜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으로 충만했기에 다른 정탐꾼들과는 말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얼마든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들은 이러한 말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충만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들 앞에서 메뚜기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모든 기적의 목격자였던 200만 명 중에 60만 장정과 이들에 해당하는 여자 성인들까지 광야에서 다 죽게 됩니다.
증언을 받아들여 증언 속에서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유지하며 삶에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증인이 되지 못한 채 목격자에 머물 뿐입니다. 증인이 되지 못한 목격자들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증인이 될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증언과 증인 됨은 그 자체로 내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유지하면서 실시간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있음의 증거다.’라고 확신하며 배우자 앞에서, 부모 앞에서, 자녀 앞에서, 어떤 사람, 어떤 사건 앞에서든 스스로 증거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타이밍을 정하셔서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동서남북 교회가 지난해 4월부터 진행되어 9개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서남북 교회에 참여하시는 분들 중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목격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증언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또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참여하게 되어서 인원이 늘어난 교회가 있습니까? 서너 명이 출발했는데 다섯 명이 되고, 여섯 명이 되고, 일곱 명이 되면서 둘로 나뉘어야만 하는 상황을 경험한 교회가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이방인 이드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있음을 드러내신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속한 동서남북 교회에서 아직 한 사람도 그러한 경우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드로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겠다고 결단하는 사람을 만들지 못했다면 우리는 목격자의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가 삶에서 하나님 있음의 증거는 되고 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증언을 하더라도 듣는 모든 사람이 이드로처럼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체 동서남북 교회에서 단 한 사람도 새롭게 참여하는 자가 없다면 아무도 증거가 되지 못하고 증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내가 삶에서 얼마나 증거가 되고 있는가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충실한 증거가 되신다면 하나님께서 타이밍을 정하시며 우리를 증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왜 나를 그 직장에 보내셨을까요? 왜 나에게 그 일을 하게 하실까요? 그 모든 것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계기를 통해 증거가 된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증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시기 위해 그 직장에 보내시고, 그 일을 하게 하셨으며, 그 사람을 만나게 하셨으며, 그들과 가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증거가 되도록 준비하라. 그리고 내가 원하는 때에 증언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의식을 분명히 하게 해주시옵소서. 증언을 듣고 목격자가 된 우리들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삶에서 지켜낼 정도로 증거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증인으로 스피커로 이용하실 수 있는 기회를 붙잡을 수 있게 준비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