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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조춘숙
말 씀 사무엘하 2장 12-23절
제 목 축복 받았을 때 조심하라[3]
배신이라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보면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인간이 인간을 믿는 믿음은 얼마 만큼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지켜야 하는 의리는 어디까지일까요.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부모의 뜻과 다른 길로 갔을 때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을 합니다.
자녀는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부모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배신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배신감은 내 뜻과 다를 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내가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다른 생각을 할 때 배신감을 느끼며, 상대로 하여금 내 기쁨을 얻기 원할 때 그 배신감은 더욱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있는 것을 아무 대가없이 나누어 주고, 그로부터 돌려 받을 생각이 없을 때 사람들은 상대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배신감은 기대할 것이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인 것 같습니다.
내 이기심과 자존심만 버리면 기회가 많은 길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부모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아서 서운하게 해 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인간은 모든 기준이 자신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였습니다.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사랑과 말씀과 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바라보지 못하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만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강한 책망을 받았고 그는 수제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과 은혜를 배신해도 사는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신하면 영원한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배신할 수밖에 없는 악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기시고, 회개라는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요압이 어떻게 다윗을 배신했는지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요압을 본다면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요압은 수리야의 세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형제는 싸움을 잘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삼형제는 다윗에게는 그 누구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추종했습니다.
훗날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하지 말라는 간청을 드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도 잘 아는 능력의 사람 같습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며 다윗과 함께 고생을 했지만 요압은 철저하게 다윗을 지켜냈습니다.다윗과 함께 전쟁을 치루며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그를 위해서라면 적진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었습니다.
다윗이 나라를 평안히 다스릴 수 있도록 요압은 에돔과 암몬과 수리아등을 무너뜨리며 큰 공헌도 하였습니다.정말 요압이 다윗을 위해 일한 것을 보면 요압 없이는 다윗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요압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다윗을 돕고 따르지만 다윗이 왕이 되면 받을
상급만 바라보며 자기 주관적인 충성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윗을 도왔고, 내가 전쟁에 나가서 승리했기 때문에 지금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지금은 고난의 길을 걷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을 기대하며 충성했다면 축복을 받은 지금 그는 더욱 큰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자기 주관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한 요압은 결국 다윗과 상관없이 전쟁을 했고 그로 인해 동생을 잃는 아픔과 복수심을 얻은 것입니다.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것처럼, 요압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먼저 보았고, 자기를 통해 왕의 권세를 얻은 다윗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이런 충성은 결국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기 보다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주관적인 삶을 토대로 하나님께 충성하기 때문입니다.요압이 다윗에게 충성하고 유다가 통일왕국을 이룰 수 있도록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압의 최후는 아주 비참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의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모든 판단을 자기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다윗을 버린 것입니다.
요압과 같은 이런 실수는 성도들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보다는 내가 드리는 헌신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내가 드리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에 결국 썩은 열매가 되고 만 것입니다.하나님의 일을 전체적으로 보고 일을 해야만 충성을 하고도 죽임을 당한 요압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었고 사울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과 요압이 해야 하는 일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 더욱 힘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연단의 끝에 왕의 자리를 허락하시고 높이 세워주신 것에 감사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왕에게 복종하도록 자기가 먼저 겸손함을 보여야 하는데 요압은 하나님과 다윗보다 자신의 힘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유다왕이 되었을 때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갔습니다.헤브론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이스라엘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땅에 왕이 두명 세워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한반도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작은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고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사단은 그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사단이 왕노릇하며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끌고 가고 있습니다.이처럼 다윗이 왕이듯 이스보셋이 왕이 되어 이 땅에는 항상 두 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도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계시겠지만 사단은 그 마음을 차지하여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요압과 같이 교만하여 사단을 왕으로 섬길 것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길 것인지 잘 판단하셔야 합니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이 기브온 못가에 나오고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신복들이 못가로 나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아브넬이 요압에게 신복들로 하여금 겨루게 하자고 요압에게 말하자 양쪽편에서 열두명씩 내 보내어 싸움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넬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아마도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분한 마음에 제안했을 것입니다.
열두명의 군사들은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서로 찌르며 일제히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서로 머리를 잡고 죽인 것처럼 기록되었지만 자기를 칼로 찌르는데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치열하게 싸웠지만 팽팽했기 때문에 모두 죽고 만 것입니다.
앞선 군사들이 모두 죽자 이제는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다윗의 신복은 아사헬을 비롯해 열 아홉명이 죽었습니다.
아브넬의 군사들은 삼백육십명이 죽고 만 것입니다.
항상 전쟁은 다윗의 상대가 먼저 시작하지만 결과는 다윗이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이 선이고 아브넬이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는 것이고, 다윗이 선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넬과 그의 군사들은 패배하여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기 시작한 것입니다.
패해서 도망하는 아브넬을 아사헬이 쫓아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브넬이 아사헬보다 훨씬 싸움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나를 쫓지 말고 다른 군사를 잡아 그의 옷을 벗기면 네 체면이 서지 않겠느냐고 달랬습니다.
하지만 아사헬은 다윗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없었고, 또 이스라엘이 도망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리를 분별하지 못한 아사헬이 끝까지 쫓아오자 그만 죽이고 만 것입니다.
이 작은 사건이 요압으로 하여금 다윗을 배신하게 했고, 다윗이 아끼던 압살롬과 아마사와 아브넬까지 죽이는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 잘못하기 어렵지만 지은 죄를 반복하는 것은 쉽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죽자 오직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다윗까지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전체적인 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요압처럼 다윗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나서 스스로 멸망의 길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가룟유다와 제자들 역시 하나님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고 믿어야 하는데 기적과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결국 배신하고 만 것입니다.
성도들은 요압을 거울 삼아 믿음의 길을 곧장 가야만 합니다.
내 생각대로 하는 충성은 결국 자신이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죄는 뱀과 같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뱀처럼 죄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온전히 다윗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는 아브넬을 죽이는데 마음을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요압이 지금까지 고생해서 다윗을 왕으로 세웠고 이제 그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아주 중대한 일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모할 정도로 자기의 복수만을 위해서 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14절을 보면 지혜없는 요압이 아브넬에게 속은 것입니다.
군사들의 싸움은 아브넬이 제안한 것입니다.
여기서 소년들로 일어나서 장난하게 하자는 말은 비웃다 조롱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말로 시작한 싸움이 결국 생명을 빼앗는 엄청난 전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의미없는 전쟁은 다윗이 원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아마 다윗이라면 아브넬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은 이 싸움을 통해 그동안 쌓아 놓았던 신의와 동생 아사헬을 잃었고, 다윗에 대한 배신과 불타는 복수심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게 속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가야 하는 성도들이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은 것처럼 생각되면 긴장을 풀고 사람을 보면서 실망하기도 하고, 믿음의 열매를 잃기도 합니다.
요압은 지금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왕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온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요압이 충성한 시간과 열정과 기쁨을 자기 생각안에 가두자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 헌신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긴장을 풀리면서 자신이 크게 보이고, 사람이 보이며, 그동안 누르고 있던 감정이나 혈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쌓아 놓았던 공로가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알고, 내가 성장했고, 내가 무엇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요압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여러분은 사단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압의 결정이 다윗의 생각이 아닌 것처럼 여러분의 판단과 결정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길을 벗어나 한발을 잘못 들어서게 되면 종착역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뵙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충성을 다하시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 더욱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안에서 결정하고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