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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인 수녀님의 시 ◑
이해인 수녀님의 시 모음 1편입니다.
- 차 례 -
1. 6월엔 내가
2. 가위질
3. 가을노래 .1
4. 가을노래 .2
5. 가을편지
6. 가을편지(시간의 얼굴)
7. 기도
8. 길
9. 꽃집에서
10. 나를 부르는 당신
11. 나무의 마음으로
12. 나비의 연가
13. 나의 하늘은
14. 낡은 구두
15. 내일
16. 너에게 띄우는 글
17. 너와 나는
18. 누군가 내 안에서
19. 당신 앞에 나는
20. 듣게 하소서
21. 마더 테레사께
22. 말을 위한 기도
23. 먼지가 정다운 것은
24. 민들레
25. 민들레의 영토
26. 바다새
27. 반지
28. 별을 보며
29. 봄 아침
30. 봄 편지
6월엔 내가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유월
6월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생명을 향해
하얗게 쏟아 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6월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산기슭에 엎드려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가위질
예쁜 색지도
무늬 고운 헝겊도
쏙닥쏙닥 오리길 좋아했었네
기인 머리채도
결 고운 비단도
나를 자르듯
잘라낼 수 있었지만
칼끝 같은 가위로도
도려낼 수 없는
아득하고 아득한
너를 향해
펼쳐진 마음
가을노래 .1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가을노래 .2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이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있는 친구가 보고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시간 아껴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때마다
한 웅큼의 시들을 쏟아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가네
가을 편지
1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
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
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
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
은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마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강물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
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
로 살고 싶습니다.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씨만한 일상
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
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이 가을엔 나
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
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 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
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
로 찍혀 있는 한 장의 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
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
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시이 그리울때마다 내 마음은 열
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
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있는 것 - 이것이 때로는 기쁘
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 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
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
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13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4
숲 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느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아무도 그이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해 본 적이 있
습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
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15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
럼 쏟아지는 빗소리 - 마지막으로 아껴 두었던 이별의 인사
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16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
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
오.
17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 주십시오.
18
당신은 내 生에 그어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線. 그리고 내 生
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 개의 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19
당신이 안 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본 하늘 위에 착
한 새 한 마리 날으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無言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20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
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
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21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합니다. 詩
도 못 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을날, 초승달에서 차
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22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 냅
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월은 떠나가도 갈
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23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화
빛 새옷 입고, 석류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들과 함
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 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 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24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
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께 모든 걸 드렸
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25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로
피워 올리는 나의 기도 - 나의 사랑이 티없이 단순하게 하
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게 하십시
오.
26
오늘은 모짜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어
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쓸함조
차 실컷 맛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대
룰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에 평온히 쉬
고 싶습니다.
27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지 않
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겨도 그저
은혜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는 목숨 또한 아
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28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핼쓱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데도 업
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
여삐 여기시던 당신 - 한 켤레의 고독을 신고 정갈한 마음
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29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버리는 나의 마음을
창 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는 아닌데
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3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
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
처럼 높고 깊은 당신 사랑의 秘法을 들려 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1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흰 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2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집 앞마당. 대추나무 꼭대
기에서 몇 마리의 참새가 올리는 명랑한 아침기도. 바람이 불
어와도 흩어지지 않는 새들의 고운 음색. 나도 그 소리에 맞추
어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
3
한 포기의 난(蘭)을 정성껏 키우듯이 언제나 정성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기도이지요? 물만 마시고도 꽃대
와 잎새를 싱싱하게 피워 올리는 한 포기의 난과도 같이, 나 또
한 매일 매일 당신이 사랑의 분무기로 뿜어 주시는 물을, 생명
의 물을 받아 마신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요?
4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 잎들. 작년에 끼
워 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
잎을 보면 잊었던 시어(時語)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정답게 내
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5
급히 할 일도 접어두고 어디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가을. 정
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당신의 모습, 이
웃의 모습. 떠나서야 모두가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
은 그런 마음. 그러나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오늘을 더 알뜰히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6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이의 눈 속에 출렁이는 그림
한 점, 샤갈의 <푸른 장미>.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의 목
소리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선율, . 내게 이
런 모든 것을 느끼도록 해 주신 당신의 크신 얼굴이 더 크게
살아오는 가을. 루오의 그림마다에서 당신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부릅니다.
7
오늘은 길을 떠나는 친구와 한 잔의 레몬차를 나누었습니다.
이별의 서운함은 침묵의 향기로 차(茶) 안에 녹아 내리고 우
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서로의 평화를 빌어 주고 있
었습니다. 정든 벗을 떠나 보낼 때는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립
니다. 헤어질 때면 더욱 커 보이는 그의 얼굴. 손 흔들 때면 더
욱 작아 보이는 나의 얼굴.
8
새벽에 성당 가는 길엔 푸른 색 나팔꽃 한 송이와 꼭 마주치
게 됩니다. 그 꽃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그 꽃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유순하고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9
귀뚜라미 노래소리에 깊어 가는 가을밤. 내 피곤한 육신을 맨
땅에 눕히듯이 작은 나무 침대 위에 눕히면, 오랜만에 달고 싱
싱한 사탕수수 같은 나의 꿈과 잠. 꿈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
니다. 당신과 긴 여행을 합니다. 꿈꾸는 것조차도 당신 안에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10
보름달 속에 비치는 당신의 빛나는 모습. 달처럼 차고 또 기우
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달빛에게 세례받
은 하얀 박꽃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며 살고 싶
습니다. 나 또한 당신의 넓은 하늘에서 하나의 달이 되어 뜰
때까지.
11
가을엔 가장 작은 들꽃의 웃음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남 몰래 앓고 있는 내 이웃의 작은 아픔까지도 깊이 이해하며
그를 위한 나의 눈물이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2
15년 전부터 내가 아껴 쓰던 열두 빛깔의 색연필을 깍아 이
글을 씁니다. 이 연필들이 나의 손에 길들어져 조금씩 닳아 가
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길들어지며 담백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13
가을엔 내가 잠을 자는 시간조차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좀더
참을 걸 그랬지, 유순할 걸 그랬지.' 남을 언짢게 만든 사소한
잘못들도 더 깊이 뉘우치면서 춧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만,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가을밤. 당신 안에 만남을 이룬 이들의
착한 얼굴들을 착한 마음으로 그려 봅니다.
14
가을 길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처럼 내 마음 길에 수없이 한들
대는 시심(時心)의 꽃잎들. '따지 말고 그냥 두면 더한 아름다
움일 것을' - 이러한 생각이 시 쓰는 나를 괴롭힐 때가 있음
을 헤아려 주십시오.
15
가을엔 지는 노을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조심스런 눈빛으로 매
일을 살아갑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저 노을처럼 짧게 스쳐 가
는 황홀한 순간과, 보다 더 긴 안타까움의 순간들을 남겨 놓고
떠납니다. 그러나 오십시오. 아름다운 당신은 오늘도 저 노을
처럼 오십시오.
16
때로는 이해할 수 업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뜨겁게 사
랑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이 가을엔 꼭 찾아 얻게 하소서.
꽃이 죽어서 키워낸 열매, 당신이 죽어서 살려낸 나, 가을엔
이것만 생각해도 넉넉합니다.
17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우산도 채 받지 않고 길을 가는 이들의
적막한 얼굴 속에서 나는 당신 모습을 떠올렸습니다.「삶은 비
애를 긋고 가는 한 줄기 가을비일까」 혼자서 나직히 뇌어보며
오늘은 더욱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을 닮고 싶었습니다.
18
언제나 한(恨)과 눈물이 서린 듯한, 그러나 나를 낳아 준 모국
의 정든 산천. 하루도 근심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쓸쓸한 이마
를 보면 눈물이 핑 돕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예기치 않은 죽음
으로 인해 살아서도 이미 죽음의 순간을 맛보는 나의 이웃들
을 지금은 그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그토
록 힘이 없어 보입니까.
19
오늘은 빨갛게 익은 동백 열매 하나 따 들고 언덕을 오르며,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 또한 이 작은 열매처럼 하도 잘 익
어서 '툭'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20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내 하얀 머리수건 위에 올려 놓은 바람.
그리고 손에 쥐어 보는 유리빛 가을 햇살. 잠자리 날개의 무늬
처럼 고운 설레임으로 삶을 더욱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당신
의 가을 햇살 - 잊지 못합니다.
21
사랑할 때 우리 모두는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기다림에 깊
이 물들지 않고는 어쩌지 못하는 빨간 별, 별과 같은 가슴의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22
버리기 아까워 여름 내내 말린 채로 꽃아 둔 장미꽃 몇 송이
가 말을 건네 옵니다. "우린 아직 죽은 게 아니어요." 그래서
시든 꽃을 버리는 일에도 용기가 필료함을 깨닫는 아름다운
가을의 소심증.
23
세수를 하다 말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놀라워서 들
여다보는 대야 속의 물거울. '오늘은 더욱 사랑하며 살리라'는
맑은 결심을 합니다. 그 언제가 될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세수도 미리 기억해 보며, 차갑고 투명한 가을 물에 가
장 기쁜 세수를 합니다.
24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
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
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 보듯이 -
25
노을을 휘감고 묵도하는 11월의 나무 앞에 서면 나를 부르는
당신의 음성이 그대로 음악입니다.
이별과 죽음의 얼굴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 가을의 끝.
주여, 이제는 나도 당신처럼 어질고 아프게 스스로를 비우
는 겸손의 나무이게 하소서. 아낌없이 비워 냈기에 가슴 속엔
지혜의 불을 지닌 당신의 나무로 서게 하소서.
26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
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
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27
가을이 파 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을 긷습니다. 두레박
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 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
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28
여름의 꽃들이 조용히 무너져 내린 잔디밭에 작은 새 한 마리
가 하늘을 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새도 즐기는 이른 새벽의 침
묵의 향기 - 새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비켜 갔습니다.
29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을 쉬게 하고 싶습니다. 피곤에 지친
당신을 가을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눕히고, 나는 당신의 혼(魂)
속으로 깊이 들어가 오래오래 당신을 잠재우는 가을바람이고
싶습니다.
30
가을엔 언제나 수많은 낙엽과 단풍의 이야기를 즐겨 듣습니다.
페이지마다 금빛 지문(指紋)이 찍혀 있는 당신의 그 길고 긴
편지들을 가을 내내 읽고 또 읽듯이 -
31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깨는 가을밤. 머리맡에 놓인 성서를 펼쳐
들면 귀에 익어 더 반가운 당신의 음성.
오직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푸성귀처럼 푸르고 싱싱해진 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은 어서 주인으로 오십시오.
32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빗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당
신의 그 낮은 목소리.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고 내 이름을 부
르는 그 따뜻한 목소리. 그보다 더한 음악이 아직은 내게 없습
니다.
33
바람 부는 들녘, 저마다의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꽃들이 일
어섰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불길을 지나 더욱 단단해진 믿음
의 보석 하나 빛나는 첫 선물로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연한 눈빛으로 일어서야겠습니다.
34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감꽃의 그 얼굴도 떠올리면서, 조그만 불덩이 하나 입에 넣듯
이 감을 먹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가시 박힌 아픔을 잘 익은
말로 삭혀 주던 어느 사제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뜨거운 마음
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기도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 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꽃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깨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길
아무래도
혼자서는
숨이 찬 세월
가는 길
마음 길
둘 다 좁아서
발걸음이
생각보단
무척 더디네
갈수록
힘에 겨워
내가 무거워
어느 숲에 머물다가
내가 찾은새
무늬 고운 새를 이고
먼 길을 가네
꽃집에서
"어느 꽃을 사겠니?"
"..............."
"어느 꽃을 사겠냐니까?."
"..............."
꽃집에서 들어 가서
꽃을 사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꽃들은 다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이
너무 아름답거든요
향기가 좋거든요
모두 다
내 마음에 들거든요
꼭 한 가지만
골라서 산다는 일은
어쩐지 미안하고
어쩐지 슬퍼 집니다
그래서
꽃집을 슬며시
그냥 나와 버립니다
나를 부르는 당신
오를 때는 몰랐는데
내려와 올려다 보면
퍽도 높은 산을 내가 넘었구나
건널 때는 몰랐는데
되건너와 다시 보면
퍽도 긴 강을 건넜구나
이제는 편히 쉬고만 싶어
다시는
떠나지 않으렸더니
아아, 당신
그래도
움직이는 산
굽이치는 강
나를 부르는
당신
나무의 마음으로
참회의 눈물로 뿌리를 내려
하늘과 화해하는
나무의 마음으로 선다
천만 번을 가져도 내가 늘 목마를 당신
보고 싶으면
미류나무 끝에 앉은
겨울 바람으로 내가 운다
당신이 빛일수록
더 짙은 어둠의 나
이 세상 누구와도 닮은 일 없는
폭풍 같은 당신을 알아 편할 길 없다
오늘은 엇갈리는 만남의 비극 속에
내일은 열리는가
땅 위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내 존재의 끝은 당신
편히 잠들 날 없는
가장 정직한 나무의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선다
나비의 연가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향해 날으는
한 마리 순한 나비인 것을
가볍게 춤추는 나에게도
슬픔의 노란 가루가
남몰래 묻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눈멀 듯 부신 햇살에
차라리 날개를 접고 싶은
황홀한 은총으로 살아온 나날
빛나는 하늘이
훨훨 날으는
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가난한 마음임을 가르치는
풀잎들의 합창
나의 하늘은
그 푸른 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하늘은
희망을 고인
푸른 호수
나는 날마다
희망을 긷고 싶어
땅에서 긴 두레박을
하늘까지 낸다
내가 물을 많이 퍼가도
늘 말이 없는
하늘
낡은 구두
내가 걸어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 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켤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 버릴 수가 없다
몇년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 준
고마운 그를
내일
부르지 않아도
이미
와 있는 너
이승의 어느 끝엘 가면
네 모습
안 보일까
물 같은 그리움을
아직은 우리
아껴 써야 하리
내가 바람이면
끝도 없는 파도로
밀리는 너
너에게 띄우는 글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이상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너와 나는
돌아도 끝없는
둥근 세상
너와 나는
밤낮을 같이하는
두개의 시계바늘
네가 길면
나는 짧고
네가 짧으면
나는 길고
사랑으로 못박히면
돌이킬 수 없네
서로를 받쳐 주는 원 안에
빛을 향해 눈뜨는
宿命의 반려
누군가 내 안에서
누군가 내 안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쓸쓸하고
정직한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목 쉰 채로
나를 부르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못 해
하늘만 보는 막막함이여
내가 그를
외롭게 한 것일까
그가 나를
아프게 한 것일까
겸허한 그 사람은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고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막막함이여
당신 앞에 나는
당신 앞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항아리에요
비켜 설 땅도 없는 이 자리에서
당신만 생각하는 길고 긴 밤 낮
나는 처음부터 뚜껑없는 몸이었어요
햇빛을 담고,바람을 담고,구름을 담고
아직도 남아있는 비인 자리
당신만이 채우실 자리
당신 앞에 나는 늘 얼굴없는 항아리
기다림에 가슴이 크는 항아리에요
듣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이웃의 말과 행동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하루의 작은 여정에서
내가 만나는 이의 말과 행동을
건성으로 들어 치우거나
귀찮아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가로막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이웃을 잘 듣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임을
내가 성숙하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듣고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무심함에서
나를 구해주소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못 들은 척 귀막아버리고
그러면서도 '시간이 없으니까'
'잘 몰랐으니까' 하며 핑게를 둘러대는 적당한
편리주의, 얄미운 합리주의를 견책하여 주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과 사건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앉아야 할 자리에 앉고
서야 할 자리에 서고
울어야 할 때에 웃고
웃어야 할 때에 웃을 수 있는
민감하게 듣고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듣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자신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를 잘 듣는 사람만이
남을 잘 들을 수 있음을
당신을 잘 듣을 수 있음을
거듭 깨우치게 하소서
선한 것을 지향하는 마음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침묵과 고독속에
자신을 조용히 숨길 줄도 알게 하소서
나는 두귀를 가졌지만
형편없는 귀머거리임을 몰랐습니다.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만 많이 했음을 용서하소서
들으려는 노력으도 아니하면서
당신과 이웃과 세상에 대해
멋대로 의심하고 불평했음을
지금은 뉘우칩니다.
매일매일의 내 작은 여정에서
내 생애의 큰 여정에서
잘 듣고 잘 말하는 이가 되도록
밝고 큰 귀와 입을 갖고 싶습니다.
언제나 이웃을 위해
마음의 귀가 크게 열려 있는
성인들의 사랑을 본받고 싶습니다.
말소리만 커지는 현대의 소음과
언어의 공해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겸손히 듣고 또 듣는
들어서 지혜를 깨우치는
삶의 구도자 되게 하소서.
마더 테레사께
당신의 눈 속에 들어있는
높고 푸른 하늘을
가까이에서 본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반세기 동안 쏟아부은
당신의 사랑은
캘커타를 넘어 세계로
흘러가고
이제 당신은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순례의 어머니가 되어
먼길을 가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당신의 두 손을 잡고 싶어할 때마다
괴로운듯 나직이 말씀하셨지요.
"오 나는 성녀가 아닙니다.
나를 보고 싶거든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세요"
맨발로 빈 손으로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던
사랑의 어머니여
흠도 티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이제 편히 쉬십시요.
아직 어머니를 닮지 못하고
서성이는 저희에게
"오직 사랑만이 전부다"라고
하늘의 별이되어
말씀하여 주십시요.
말을 위한 기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내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는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해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르는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 가게 하소서. 아멘.
먼지가 정다운 것은
날마다 나도 모르게
먼지를 마시며 살고
날마다 일어나서
먼지를 쓸며사네.
어디서 오는지
분명치 않은 먼지와 먼지
하얀 민들레 솜털처럼,
먼지가 정다운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지
어느날
나도 한줌
가벼운 먼지로 남게 됨을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지
민들레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란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민들레의 영토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싶은 얼굴이여.
바다새
땅에 어느 곳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수 없어
바다로 온 거야
너무 많은 것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예까지 온 거야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온 거야
아아,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이 작은 가슴의 불길
물 위에 앉아
조용히 삭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미역처럼 싱싱한 슬픔
파도에 씻으며 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반지
약속의 사슬로
나를 묶는다
조금씩 신음하며
닳아 가는 너
난초 같은 나의 세월
몰래 넘겨 보며
가늘게 한숨 쉬는
사랑의 무게
말없이 인사 건네며
시간을 감는다
나의 반려는
잠든 넋을 깨우는
약속의 사슬
별을 보며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 일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봄 아침
창틈으로 쏟아진
천상 햇살의
눈부신 색실 타래
하얀 손 위에 무지개로 흔들릴 때
눈물로 빛어 내는
영혼의 맑은 가락
바람에 헝클어진 빛의 올을
정성껏 빗질하는 당신의 손이
노을을 쓸어 내는 아침입니다
초라해도 봄이 오는 나의 안뜰에
당신을 모시면
기쁨 터뜨리는 매화 꽃망울
文身 같은 그리움을
이 가슴에 찍어 논
당신은 이상한 나라의 주인
지울 수 없는 슬픔도
당신 앞엔
축복입니다
봄 편지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 오는 봄
진달래 꽃망을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