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본다. 하나는 현미경이고 다른 하나는 망원경이다.
인간이 자주 불행감에 빠지는 것은 렌즈를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때 사용하는 렌즈는 망원경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내밀한 가정사는 타인이 접근하기 어렵다. 먼발치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다. 모범 부부라던 빌게이츠 부부도
"이 결혼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며 27년만에 이혼한 것을 보면 외부인이 아는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이다. 수면 아래에서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다.
겉모습만 보는 남의 가정과는 달리 자기 집은 현미경으로 보듯 내부를 들여다본다. 아침 햇살이 창으로 들어오면 거실 바닥의 세세한 먼지까지 눈에 띈다. 식사 후에 싱크대에 지저분한 접시가 놓여있고 침대 위에는 방금 벗은 옷가지들이 나뒹군다. 우리가 일상으로 접하는 집안 풍경이다. 이런 일들은 남의 집안에선 거의 목격할 수 없다. 남의 집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언쟁이나 속상한 일들도 내가 눈치채기는 어렵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이처럼 비교 불가능한 타자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남의 행복한 겉모습만 보게 되니 남들은 나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남들은 다 앞서 가는데 나만 뒤처진 것 같다.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도 똑같이 열패감을 느끼고 종종 우울감에 젖는다.
‘이솝 우화’에 ‘산 당나귀와 집 당나귀’ 이야기가 나온다. 먼 옛날에 야산에 당나귀 한 마리가 살았다. 산 당나귀는 숲 속에서 맹수를 피해가면서 거친 풀을 뜯어 먹었다. 추위와 비바람에 시달린 당나귀는 마른 나뭇잎이나 뜯어 먹고 사는 자신의 신세가 한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산 당나귀는 마을로 내려왔다가 외양간에서 한가롭게 기름진 먹이를 먹고 있는 집 당나귀 한 마리를 보았다. 거센 바람도 맞지 않고 푹신한 건초에 앉은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신세타령이 절로 나왔다.
'저 당나귀는 무슨 운명을 타고 났기에 먹을 것 걱정 없이 행복하고, 나는 풀 한포기를 뜯기 위해 이 산 저 산을 고달프게 떠돌아다녀야 하나?’
우리는 살면서 산 당나귀처럼 자신의 불편하고 힘든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그러한 증거물은 차고 넘친다. 자신의 현미경으로 확인했으니 오류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인에게도 내가 모르는 걱정과 고민이 많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왜냐하면 그 고민은 나의 현미경으로 볼 수 없고 멀리 망원경으로 어렴풋이 지켜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솝 우화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다. 얼마 후 마을로 다시 내려온 산 당나귀는 짐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는 집 당나귀를 발견했다. 집 당나귀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죽어라 수레를 끌고 있었다. 주인은 집 당나귀의 등과 엉덩이를 사정없이 회초리로 때렸다.
“이놈! 갈 길이 바쁜데 왜 이렇게 꾀를 부려?”
그것을 본 산 당나귀는 자신의 삶이야말로 더없이 행복한 삶으로 여기게 되었다.
‘정말 가엾은 일이다. 이런 걸 모르고 괜히 집 당나귀를 부러워했네. 배가 고프지만 자유로운 내가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은가.’
현미경으로 자기 삶을 보면 진실이 왜곡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불행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불행이 바다처럼 확대될 수밖에 없다. 결국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때 절실한 것이 ‘망원경 정신’이다. 고통의 출구는 조금 떨어져 관찰자의 시각으로 볼 때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현미경을 갖다 대는 습관은 좋지 않다. 한 발 물러나서 봐야 객관적인 관찰이 가능하다. 그것이 인생을 희극으로 보는 관람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