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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진상용
전위예술 / 아방가르드 ( 前衛藝術 : Avant-garde Art )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예술운동이다. 전위(아방 가르드:avant-garde)란 본시 군대용어로, 전투할 때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부대의 뜻이다. 이것이 변하여 러시아혁명 전야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서 목적의식적으로 일관된 집단으로서의 정당과 그 당원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윽고 예술에 전용되어 끊임없이 미지의 문제와 대결하여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을 일변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예술경향 또는 그 운동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1912) 속에서 정신의 3각형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위미술의 선구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시대의 정신생활이 형성하는 3각형 속의 저변에는 광범위한 대중이 있고, 정점에는 고독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런데 이 3각형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앞으로, 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으며, 오늘 고독한 정점에 있는 예술가의 예감에 지나지 않던 것이 내일은 지식인의 관심사가 되고 모레는 대중의 취미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는 시대의 통념과 절연하여 정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름으로써 다음 시대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다다이즘은 여러 의미에서 예술의 한계를 타파하고 단순한 물체도 행동도 하나의 관념으로 일관할 때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여기에서 칸딘스키의 정신의 3각형은 역전하여 예술가는 기성의 통념을 파괴하고, 흔히 있는 물체나 우연한 행위와 구별할 수 없는 지점까지 개아(個我)를 추구하였을 때 비로소 미지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러시아․헝가리․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후 각국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정치혁명과 예술혁명의 관계가 끊임없이 논의되고 전위예술의 개념은 널리 퍼졌다. 다다․미래파․구성주의운동이 그 초점이 되면서 이윽고 추상예술과 초현실주의가 전위예술의 2대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기성예술에의 반항이나 혁명정신 그 자체가 대중사회의 다양한 풍속 속에 확산하여 전위예술은 특정 유파나 운동에 그치지 않고 첨단적인 경향의 총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미술에서 변혁적이며 급진적인 의욕과 운동으로 주도적․전위적 역할을 한 쉬르리얼리즘과 추상미술은 주로 전위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프랑스의 쉬르리얼리즘 운동은 그들의 기관지의 제명을 《초현실주의 혁명》, 《혁명에 봉사하는 쉬르레알리슴》등으로 붙여 좌경한 일도 있었다. 전위미술은 이와 같이 기성의 예술개념이나 전통적인 모든 가치와 결정적으로 대결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다다이즘적인 백지적 환원작용(白紙的還元作用)을 내포하고 항상 전진적․유동적인 것으로서 특정한 단일양식이 아닌 추상적․절대적․순수성․전체성․초현실적․기록적․경이성․ 의외성․도발성 등 갖가지 특징과 성격을 전개하면서 특히 기성 예술 장르의 구별을 초월하여 확대되어왔다.
전위라는 말의 기원과 그 사용은 포찌올리 (R.Poggioli)의 [ 전위의 이론] 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스페인 문화와 스페인-미국(Spanish-American)문화에서 아주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토레 (Guillermo de Torre) 가 이 말을 문학에서 일어난 전위적인 여러 운동들과 그 현상을 연구하는 책의 표제로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상당한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제트 (Ortegavy Gasset) 즉 전위 일반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논의하려 했던 아마도 최초의 사람인 가제트는 비록 특수한 관점에서 이기는 하지만 그 말을 피하고 대신 '비인간화 예술'. '추상예술'. 혹은 '젊은 또는 참신한 예술' 이라는 말을 더 즐겨 쓰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한편으로는 이 운동의 극단적 주지주의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운동이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일치되고 있는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보다 깊이 착근을 하게 되고, 보다 잘 적용되었던 풍토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불란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불란서인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예술과 문화를 특히 그 사회적 관점으로부터 바라보려는 경향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보다 생기를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경우는 이 말의 라틴어적 성격 때문에 '신낭만 (Neu-Romantik) 이라는 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었는데서도 그러한 사정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구라파 낭만주의의 극우로서 이 독일적인 대안이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전위의 역활을 떠맡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말의 사용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 명칭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채, 때로는 불어 그대로 ' avant-garde' 로, 때로는 'vanguard' 나 'advanced guard' 라는 영어로 쓰여지고 있다. 실제로 영-미 비평에서 이 말이 사용될 때라면 그것은 주로 불란서의 문학과 미술 자체에 국한되어 있거나 혹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어떤 국제적인 예술 현상에 대해서이다. 그런 중에 이 말은 불란서의 지성 곧 정신적인 갤리시즘 (Gallicism) 의 한 표본인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 영-미의 예술 속에서 전위적이라 할 것들이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재의 뉴욕은 그러한 예술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중임을 상기하면 좋을 일이다.
순전히 문자적이라든가, 언어적 입장에서 말할 때 '전위예술' 이라는 용어를 갤리시즘의 한 경우인 것처럼 다룬 이 말의 현대적 어법과 의미는 -비록 그 기원이 확인되기 쉬운 성질의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분명 불란서 인들의 소산이요 실제로는 파리쟝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시대의 예술을 특징적으로 규정하는 데 적용되기 훨씬 전에 그것이 다른 것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은 지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애초 이 말은 예술적이기 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색다른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곧 사회의 표현이며, 가장 진전된 사회의 경향을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예술이 시동자로서 그의 고유한 임무를 가치 있게 성취하고 있는지, 또한 예술가가 진정으로 '전위'의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성이 어디로 진행되고 있는 중인지, 또 인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찬미와 함께 음울하고 절망적인 송가를 불러라… 우리 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는 잔인함과 부패함을 폭로하자."
이 문맥 속에서 그는 이 '전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 중 마지막 두 구절은 라베르당의 글이 예언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심지어 예술계에 있어서 마저 전위의 상이 애초에는 예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급진주의 (Radicalism) 의 이상에 종속되고 있었던 것" 임을 보여 주는 '최초의 가장 중요한' 인용구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위'는 애초 예술적이 아닌 정치적 급진주의 이상에 종속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이 무정부적이고 극단적인 자유주의 사도들에 얼마만큼이나 친밀했었는가 하는 사실은 후에 [L'avant-garde] (1878)라는 표제의 정치적 선전을 위한 한 간행물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1870년대에 있어서 이 말이 정치적인 문학 밖에서 사용되는 경우를 찾기란 심히 힘드는 일이 되고 있으며, 아마도 그 전 1860년대에 있어서 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한 사례로서 보들레르 (Baudelaire)의 기록을 예시해 볼 수가 있다. [Mon coeur mis a' nu] (1862~1864) 라는 사적인 기록 속에서 그는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조롱조로 '전위적인 문학인들' 이라고 쓰고 있음을 주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군대식의 비유를 즐겨 쓰는 불란서 인들의 취향을 증명해 보일 목적으로 기술된 일련의 긴 사례들을 열거하는 과정의 마지막 대목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 같은 말을 조롱하고 있다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은 그것이 이미 기존의 용어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냉소적이었던 보들레르를 통해 보더라도 '전위적인 문학인들' 이란 말은 예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작가, 다시 말하면 급진주의적인 작가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들레르와 같은 시인이나 그 밖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그 자체가 잘못된 비유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에 함축된 의미 때문에 조롱적인 질책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프러시아 전쟁과 콤뮨 (Commune)의 대두와 그 진압으로 대변되는 국가적 위기와 사회적 동요를 극복한 듯한 1870년 이후의 몇 년간을 통해서 이 말은 서서히 예술적인 별도의 의미로서도 사용되고 있는 변화된 면모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사회적-정치적 전위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두 전위의 병행이라 할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 같은 병행이 가능했던 것은 잠시나마 두 전위들이 우연히 기존의 낭만주의적 사고와 1830년과 1848년 사이의 세대에 의해 확립된 전통을 새롭게 하는 입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세대는 문학적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이었다. 따라서 전세대의 보수주의 대신 이세대의 교리는 민주적 이상이 되어왔고, 심지어는 극좌의 이상이 되어 오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른바 세기 말의 문학-예술의 여러 운동들이 정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면서 -'소름 끼치는 해' 를 경험하고 , '해빙' 에 가담했던 세대에 게는 - 정치적 좌파와 문학적 좌파 간의 제휴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고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급진주의와 예술적 급진주의 간의 이 같은 제휴, 두 전위들간의 이 같은 연합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La revue indepe'ndent] 이라는 표제의 조그마한 현대 문학지의 첫 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이었다. 1880년경에 창간을 보았을 이 잡지는 정치와 예술의 두 방면에서 이른바 두 전위적인 대변자들을 동류의 관계로 결합시켜 놓고 있는 아마도 최후의 기관지이다.
그 이후 급작스레 두 전위들의 결별이라고 할 현상이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불란서 인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하는 '황금시기'의 출발과 더불어 결별은 더욱 촉진되어 갔다. 오랫동안 찾아온 평화와 번영과 예술적인 갈등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탄생으로 인도되는 이 황금의 시기란 1885년부터 비롯되는 약 30년간에 걸친 시기임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해 5월 , 낭만주의 거성이었던 위고 (V. Hugo)의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새로운 진행이 곧 전개될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 그처럼 짧은 시일 내에 그처럼 많은 주의(ism)와 유파와 그룹들의 대두와 몰락을 체험한 시기는 아마 다른 어느 역사적 시기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1885년을 전후로 해서 예술가들은 각기 한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감지하면서 마치도 신호등을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방향을 바꾸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1886년엔 인상주의자들의 마지막 그룹 전시가 있었고, 고갱과 반 고호는 아를르에서 함께 작업을 하는 가운데 인상주의를 떠난 새로운 회화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음악의 방면에서 바그너의 인기는 최소한 1900년대까지 상승세를 보이긴 했으나, 1883년에 있은 그의 죽음은 불란서의 음악을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주게 되었고, 샤브리에 (Chabrier)와 포레 (Faure')의 작품들이 곧 뒤를 잇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에서는 베르레느, 랭보, 특히 말라르메의 실험적인 작업이 마침내 상징주의라는 이름으로 귀결된 것 역시 그때쯤 이였다. 예술활동의 이와 같은 전개와 더불어 그 당시까지 예술현상에 단지 비우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전위'라는 말이 당시의 예술적 활동 바로 그것을 지시해 주는 말로서 전의케 된 것이다. 비로소 '전위'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이제까지의 제일의 의미가 그로부터 완전히 탈거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전위의 예술과 문학'이라는 표현이 그로부터 광범하게 유행되게 되었다. 이처럼 불란서 언어와 문화의 배경 속에서 잉태되어 물려진 이 말은 불란서 국경을 넘어, 서서히 사상의 국제시장에로 유입되면서 오늘날 보는 것 같은 현대 예술의 어떤 특징을 말하는 일반 용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위와 비슷한 내용과 의의가 있을 용어나 개념들이 사상의 역사 속에서 또 다시 발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인 것 같다. 형식적인 입장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고자 해도 기껏 낭만주의나 혹은 고전주의적 전통이 와해를 겪게 되는 전 낭만주의적 시기 이상으로까지 소급되기는 힘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전위예술에 있어서의 '전위'라는 말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참신함을 지니고 있는 말이며, 그러므로 예술사의 진행 속에서 진정으로 예외적인 현상을 가리켜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대예술은 곧 '전위예술'이요, 전위적인 성격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루카치, 아도르노, 뷔르거의 견해
아방가르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진 학자는 루카치(Georg Lukacs),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뷔르거(Peter Burger)를 꼽을 수 있다. 가장 극단적인 입장으로 루카치와 아도르노는 예술비평에서 크게 상반되는 두 흐름 즉,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축을 통하여 아방가르드를 조명하고 있으며, 또한 뷔르거는 이 양자를 지양하면서 나름대로는 객관적으로 가치 중립적으로 아방가르드 이론을 펼치고 있다.
루카치는 아방가르드 예술형태를 가장 타락한 것으로 가치 평가한다. 반면에 시민사회예술의 가장 진보한 형태로서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도르노이다. 뷔르거는 아방가르드 이론을 오늘날 다루어야 할 필수적 요소로 꼽고 있으나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고정시켜 판단하는데 반대한다.
아방가르드를 보는 시각이 그와 같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학문 체계내에서 아방가르드가 차지하는 위치와 상관된다. 루카치는 리얼리즘 미학 이론의 체계에 서있으며, 아도르노는 사회학적 미학의 입장에, 뷔르거는 비판적 문예학을 창조하려는 노력에서 각각 아방가르드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루카치(Georg Lukacs)
아방가르드 문학형태를 현대 문학의 본질적인 국면으로 보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이 루카치의 생각이다. 그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시민사회의 몰락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며 이는 1848년 이후 문학이 사실주의에서 멀어졌을 때 이미 예시된 것이었다. 그는 아방가르드 이념 비판을 통하여 아방가르드가 현대 예술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것은 저지하고자 한다. 그로써 그가 인간 의식의 실천 형식으로 규범화한 리얼리즘의 가능성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루카치가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은, 아방가르드가 인간의 존재를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아방가르드의 '존재론'이라 한다. 아방가르드의 존재론은 고독과 그로 인한 실존적 불안의식을 인간 본성으로 본다. 리얼리즘에서는 고독을, 인간이 그 성격이나 생활환경 때문에 처하게 되는 특정한 상황으로 설명하므로 개인의 고독은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운명일 뿐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에게 있어서 고독은 보편적인 인간 조건으로 작용하므로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사실로 고정되어 버린다. 고독이 모든 인간의 중심에 놓이게 됨에 따라 상호간의 의미있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터이고, 이로 인한 인간의 고립은 자신의 탄생 배경과 자신의 존재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이 탈사회적, 탈역사적 존재가 되는 인간에게서는 역사의 부정이 일어나게 되며 그 원인이 아방가르드의 존재론에 있다고 루카치는 생각한다.
리얼리즘은 '세계의 일관성'을 반영하며 '보편성과 특수성을 결합'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한다. 나아가 루카치에게 이러한 리얼리즘 예술의 본질은 곧 예술의 본질로 간주된다. 따라서 아방가르드가 리얼리즘의 해체로 파악되는 한 그것은 곧 예술의 해체라는 뜻이 된다. 루카치는 문학에 관하여 아방가르드가 "전통적 문학 형식을 파괴할 뿐 아니라 문학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 단언한다.
루카치에게 "예술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친 아방가르드 예술의 실재는 근원적으로 아방가르드의 이념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루카치의 아방가르드 비판은 아방가르드 이념 비판을 통하여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아방가르드의 이념이 인간을 본래 고독한 것이라 본다는 지점에 동의하면서도 루카치와는 달리 아방가르드를 옹호한 학자가 아도르노이다.
아도르노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가장 진보된 예술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루카치가 아방가르드를 리얼리즘의 해체로 본것과 정반대로 아도르노는 아방가르드가 '리얼리즘의 자진계를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방가르드를 역사적으로 이미 전개되었고 또 지금도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의 아방가르드 이론은 급진적 아방가르드로서의 쉔베르크를 가장 중심적인 위치로 부각시겼다.
"아무것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음렬 작곡가의 노고"라는 아도르노의 비유에는 고독한 자의 페이토스에 대한 칭찬이 들어있다. 루카치의 말처럼 그는 고독이 서로를 알지 못하는 도회인들의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속성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불안과 고독을 주관적인 의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매개된 것, 즉 객관적인 성격을 띤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형성된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현상'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고독을 극단적인 데 까지 추구'한 사람이 쉔베르크라고 아도르노는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먼저 쉔베르크가 고독을 잉태하여 분만한 12음기법에 그 가치가 있다. 12음기법은 그가 전통․조성음악의 가상에 도전하여 얻은 승리라 한다. 12음기법이란 재료를 조성의 가상에서 벗어나게하여 작곡가의 자유의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순수한 음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치를 두는 쉔베르크의 면모는 기법의 탄생이 전통음악의 상업적인 타락을 전적으로 거부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아도르노의 체계에서 아방가르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사회의 물화된 현상의 소외에 극명하게 항거하는 고독의 양식일뿐더러, 그 형식의 내재적 힘으로 인하여 인간의 역사 서술의 역할을 부담하고, 수용자에게 극도의 자유, 극도의 긴장을 요구함으로써 퇴행된 귀를 회생시켜줄 가능성까지 내포한다.
뷔르거(Peter Burger)
뷔르거는 아방가르드 이론을 오늘날 예술이론에서 다루어야 할 필수적 요소로 꼽는다. 아방가르드 이론은 뷔르거에게 시민사회 예술의 발전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적 처소가 되고 있다. "후기 시민사회가 문화적 가치영역으로서의 예술을 말살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고 판단하는 그의 현대적 관심은 후기 시민사회가 처한 위기를 '인식'하고자 하는데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인식생산을 사회적 실천의 일부라고 보았다. 그가 사회적 실천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태도는 학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학적 실천을 '인식'에 환원시키고 있는 자세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그는 인식을 주도해나가는 힘이 "이성적 형태에 대한 관심, 착취나 불필요한 억압이 없는 세계에 대한 관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심에 추구되는 학문을 일컬어 그는 '비판적 과학'이라 칭하였다.
그에게 인식적 실천의 장인 '비판적 과학'은 '전통적 과학'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제안된 것이다. "비판적 과학은 그것이 자신의 활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반성한다는 점에 있어서 전통적 과학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뷔르거의 입장은 학문의 연구대상에 대하여 학문하는 주체가 그 대상을 선택한 개인적인 동기를 이유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지적하는데에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어떠한 것이 중요한지를 규정해내는 일은 해석자의 정치적 입장과 깊은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학자들에게 대상과 문제를 선택할 때에 그 근거를 밝히는 일이 자명한 일로 되도록 하기 위하여 비판적 과학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뷔르거는 학문의 카테고리들과 대상의 전개 사이의 연관관계를 통찰하는 것을 '이론의 역사화'라고 하였는데, 학문의 카테고리들과 대상의 실제 발전은 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그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파악할 때만이 옳은 인식을 얻게 된다고 했다.
그는 루카치에 대하여 그의 아방가르드 비판이 헤겔미학의 낭만예술 비판과 닮아 있음을 지적한다. 루카치가 아방가르드를 리얼리즘의 해체로 파악하는 모델은 헤겔이 낭만예술을 고전주의의 해체로 파악하는 데 있었다. 헤겔은 고전주의적 예술을 정신과 감각성의 완전한 관철로 규정하며 루카치는 리얼리즘 예술을 인간과 외부세계 사건들 사이의 상관관계로 성격 지운다. 두 시기의 예술의 공통점은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라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뷔르거는 아도르노에 대하여는 루카치에게 보다 훨씬 더 호감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이론중 많은 부분을 암시받기도 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 이론에 대해서도 그는 역시 아방가르드 이론으로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뷔르거는 아방가르드의 의의를 '제도예술'에 대한 인식을 주었다는 점에서 찾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이 시민사회 예술의 발전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적인 지점이 되고 있음을 비판적 과학의 방법론을 통해서 통찰해냄으로써 "미학이론은 다만 이것의 대상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반성하는 정도에 따라서만 그 가치가 정해진다." 는 대전제를 만족시키고 있다.
위에 말한바와 같이 난해하고 독특한 특징의 아방가르드 작품들을 외국 사이트에서 찾아봤다. 우리가 자주 접한 그림도 있고, 생소한 작품도 있지만, 대체로 잘 알려진, 천재적인 작가들의 작품들을 나열하였다.
Amarillo, Rojo y Azul - Vasily Kandinsky 1925
(노랑, 빨강, 파랑)
Pintor a la Luna - Marc Chagal 1917
(달로 간 화가)
1921년 마드리드에 와서 달리는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에 의해 도입된 미술의 신경향을 잘 알 게 되었다. 그는 부엇보다도 입체주의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후안 그리의 회화에 큰 관심을 가졌다. 젊은 화가로서 아방가르드의 어머격한 훈련과 기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상해 할 일은 아니다. 아방가르드에 대한 충동은 마드리드 학생 기숙사에 있는 친구들과 공유하였다. 루이스 부뉴엘, 페르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그들인데 이들은 너무나 열정적이어서 혼란스러울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달리는 입체주의의 회화적 실험을 계속 하면서도 피카소의 유사한 형식의 육중한 인물들이 표현된 고전주의적 경향과 지중해적 풍경화풍 역시 포기하지 않는데 그는 1926년 첫 파리 여행 동안 존경하는 파카소를 방문하게 된다.
▲ 비너스와 어린 큐피드, 1925
불확실한 신화적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 시기 피카소에 의해 실행되었던 지중해적 고전주의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달리는 아직까지도 이런 종류의 주제를 큐비즘의 기법과 더 나아가 인상주의의 풍경화 기법으로 신중히 실험하고 대치시키고 있다.
▲ 입체주의적 자화상, 1926
이런 종류의 작품에서 달리가 사용한 모델들은 1910년 피카소에 의해서 그려진 칸바일러나 볼라르드의 초상 작품을 기억나게 한다.
▲ 알게르 항구, 1924
피카소의 작품으로부터 받은 뚜렷한 영향은 무엇보다도 사실성이 뛰어난 회화적 기법 습득과 세련된 표현 방법의 수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감과 공간, 형상과 색채의 질서정연하고 통제된 배치는 특정한 양식을 뛰어너머 매우 탁월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 비너스와 어부(살바트-파파세트에 대한 경의), 1926
▲ 바르셀로나의 인형, 1927
불과 일 년의 세월이 이 두 그림을 가르고 있다. 이 그림들 안에서 인간의 형상들은 큐비즘적 요소가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그림에서의 마네킹과 미래주의에서 유래된 기계-인물(형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미 초현시리주의에 감염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 화가의 아버지의 초상, 1925
"아름다운 형태란 둥근 모습의 수직적 평면이다. 아름다운 형태는 완고함과 충만함을 가지고 있는 그런 형태들로, 세부 묘사들이 커다란 덩어리의 양감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앵그르의 이 어구는 달리가 1925년 바르셀로나 달마우 화랑의 전시에서 이 작품을 비유로 나타내기 위하여 인용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