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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사이 몸이 으슬으슬하다 싶었더니, 감기에 걸렸다. 저번에 깜빡하고 창문을 열어놓고 잔 게 그 원인이었다.
요즘 들어 앞으로의 내 미래, 김민석과의 관계 뭐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해서 정신이 없어서 멍때리는 일이 많아졌는데, 그러다가 생긴 실수였다. 정수정 그년이 내 마음을 너무 들쑤셔놨어...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기침이 올라와 참지 않고 콜록댔다.
옆에서 운전을 하던 김민석이 날 힐끗 보며 ‘많이 아파?’하고 묻는다. 고개를 녀석 쪽으로 느리게 놀려 애써 웃어줬다.
“그냥 기침 좀 나오는 건데, 뭐.”
“오늘은 그냥 쉴래? 다시 집에 데려다줄까?”
녀석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바에 도착해 녀석이 주차를 끝내고 나도 차에서 내렸다.
추운 날씨에 몸을 살짝 떠는데, 김민석이 ‘여주야.’ 하고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목소리에 뒤로 돌았다.
내 앞으로 걸어온 녀석이 내 양손을 쥐어 잡고 내 팔을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하고 내 등을 끌어안는다.
날 끌어안는 녀석의 손에 녀석의 가슴에 내 머리를 기댔다. 내 온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녀석의 온기에 녀석의 품에 얼굴을 조금 더 묻었다.
“왜 감기에 걸리고 그래, 속상하게.”
“ㅋㅋ그럼 뽀뽀해서 내 감기 가져가시든가.”
“어? 진짜 그럴까?”
눈을 크게 뜨고 말하는 녀석이 어이없어서 킥킥 웃기만 했다. 내 머리에 턱을 기댄 김민석이 날 조금 더 꽉 안아준다.
“너무 아프면 나한테 말해. 사무실에 약 있으니까.”
“응.”
“집에 가고 싶어도 말하고.”
“알았어어.”
내가 무슨 앤가. 이럴 땐 이렇게 해. 하고 일러주는 녀석의 말을 대충 흘러들으며 눈을 감았다.
뭐, 애취급 당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애들은 이미 다 출근을 한 상태였다. 내 얼굴에서 아픈 게 티가 나는지 수지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왔다.
감기에 걸렸다는 내 대답에 변백현이 골골대는 게 병든 닭 같다고 낄낄대다가 김민석에게 한 대 얻어터졌다.
그래도 출근하기 전에 약을 먹고 와서 조금은 버틸만했었는데, 가게를 오픈하고 나서 오늘따라 더 몰리는 손님들에 정신이 없었다.
가게 안이 따뜻해서 으슬으슬한 느낌은 없어졌지만, 목이 칼칼한 것과 어지러움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한꺼번에 폭풍처럼 몰려들어왔던 손님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 여유가 생겨서 칵테일바 안쪽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멍한 표정으로 홀을 쳐다봤다. 커플들이 많네...
다들 좋아 죽겠나보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서로를 보는 눈에 애정이 넘쳐흐른다. 꼭 김민석과 내가 서로를 보는 눈과 같다.
“누나. 많이 힘들어요?”
“응? 아.. 뭐... 괜찮아ㅎㅎ”
“정 힘들면 약 먹어요. 민석이형한테 말해서.”
“ㅋㅋ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날 걱정해주는 오세훈이 기특해서 녀석의 등을 팡팡 내리치며 말하니 오세훈이 웃는다.
그때 또 다시 들어오는 손님들에 ‘어서오세요.’하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도 정신없이 한참을 주문만 받고 서빙만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테이블에 와인을 가져다놓고 다시 주방 쪽으로 걸어가는 길에 순간 어지러움에 휘청했다.
이런 상태로는 일하다가 분명히 실수를 할 것 같아서 정신을 가다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민석을 찾으려고 바 안을 둘러보는데, 김민석이 보이지 않는다. 치... 아프면 자기한테 말하라더니, 보이지도 않아.
쟁반을 주방 앞쪽 선반에 올려놓고 느린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아까 김민석이 사무실에 약 있다고 했으니까, 내가 알아서 찾아먹어야겠다.
“누구 전화길래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 받아?”
변백현의 목소리다. 사무실 문이 열려있는지 가까이 다가가자 변백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쟤는 일도 안하고 여기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저 변뺀질 저거.
“엄마.”
“존나 불효자세요? 엄마전화에 왜 짜증을 내.”
“자꾸 선보래.”
문 앞에 거의 다다라서 들린 김민석의 목소리에 저절로 걸음이 멎었다. 아니, 어쩌면 내 머리도 심장도 멎었을 지도 모른다.
선이라니..?
입구 옆쪽 벽에 몸을 숨겼다. 엿듣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김민석이 한 저 말이 무슨 소리인지 궁금했다.
“서언? 무슨ㅋㅋ형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
“뭐.. 엄마 지인이 아는 좋은 여자가 있다고 보채.”
아... 김민석 부모님이, 김민석에게 선을 보라고 자꾸만 녀석을 보채는 모양이다.
변백현에게 지친 목소리로 말을 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는 김민석.
벽을 붙잡은 내 손이 꼼지락댔다. 그 와중에 아파오는 머리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얼마나 좋은 여자길래 보채?”
“몰라. 뭐.. 아나운서라는데.”
“올~ 아나운서. 직업도 괜찮고. 아나운서면 얼굴은 보장됐네.ㅋㅋㅋ 나이는?”
“나이는 나랑 동갑이래.”
“좋은 여자 맞네~”
김민석의 입에서 들려오는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정보에 괜히 내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나랑 동갑인데 아나운서.. 변백현의 말대로 직업도 직업이니만큼 외모도 보장됐을 거고.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정말 내 자신이 저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만날 거야?”
“만나길 뭘 만나. 여주있는데.”
“어! 그럼 나 소개 좀ㅋㅋㅋ”
“까분다. 너 약 다 발랐으면 얼른 가서 일해라.”
“치. 자기가 안 받을 거면 착한 동생한테 소개 좀 시켜달라는데.”
“네가 직업이 있냐, 뭐가 있냐. 여자는 졸업이나 하고 만나.”
김민석은 분명히 변백현에게 하는 말이겠지만, 왜 내가 찔리는 건지 모르겠다.
김민석의 단호한 말에 너무하다고 삐친 목소리를 내는 변백현.
걸음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급하게 뒷걸음질 쳐 막 이곳으로 오는 척을 했다.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날 마주친 변백현이 깜짝 놀란다.
“어어? 누나!”
“..여주?”
변백현의 목소리에 김민석이 사무실에서 나온다.
애써 표정을 숨기고 ‘응? 왜?’하고 대답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방금 왔어?”
“어. 나 머리아파서 약 좀 먹으려고.”
“어..어.. 그럼 약 먹고 와. 우리 누나 아프다니까 속상하다.”
“아까는 병든 닭같다더니?”
“에헤이. 농담이지.”
그렇게 말한 변백현이 내 어깨를 톡톡 치고 저쪽으로 사라진다.
변백현의 뒷모습을 보다가 내 목을 감싸오는 두손에 몸을 작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온 건지 내 앞에 서있는 김민석이 내 목에 자신의 손을 두르고 심각한 표정으로 열을 잰다.
“아.. 됐어.”
“되긴 뭐가 돼. 너 목 뜨거운 거 봐.”
“약 먹을래.”
“그냥 가자 여주야. 응?”
“일 할 거야.”
“너 아프다니까 걱정돼서 그래.”
“싫다잖아!”
내 목에 닿아있는 녀석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김민석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본다.
..왜 애꿎은 김민석한테 화를 내, 왜. 네가 못난 거잖아. 김여주.
근데.. 민석아. 나 지금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있으면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할 것 같아.
이렇게 뭐라도, 이런 알바라도 하고 싶단 말이야. 지금 이 상황에서 뭐라도 안하면 나 너무 초라하잖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이를 악 물고 고개를 숙였다. 겨우 눈물을 참아내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민석아. ..너무 아파서 그래.”
“...그러니까 가자ㄴ, ..아..아니야. 그래. 약 먹자.”
김민석이 내 손을 잡고 사무실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내 손을 쥐고 있는 녀석의 손을 보는데, 방금 화를 낸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 등 요 며칠간 혼자 앓았던 모든 감정들이 밀려와서 울컥 눈물이 나왔다.
날 의자에 앉혀놓고 약을 찾는 김민석의 뒷모습을 보며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꽉 물었다.
“여주야. 이ㄱ,”
“.........”
“..김여주..너 울어?”
“......흐...”
작게 새어나간 울음소리를 애써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민석이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더니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걱정스런 얼굴로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막 닦아냈다.
“여주야. 왜.. 왜 울어. 어? 많이 아파?”
“..흑..민석아.”
“응. 여주야.”
“..아파...나..”
“진짜 집에 가자. 어? 일 안해도 돼.”
“아파... 나 아파.. 민석아..”
내 생각과 감정을 녀석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기 때문에, 아파서 우는 거라고 녀석에게 거짓말을 했다.
내 말에 김민석이 안절부절 못하며 내 손을 잡았다가 눈물을 닦아줬다가 한다.
“미안해... 미안해, 민석아..”
“아냐. 괜찮아. 그러니까, 말 듣자. 여주야. 집에 가자.”
내 손을 꽉 잡고 집에 가자고 말하는 김민석. 녀석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그저 눈물만 닦았다.
내가 괜히 너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다 미안해.. 나 같은 게 너 좋아해서 미안해..
-
“나 일 그만 둘까, 수정아.”
-“아..진짜. 지랄하소서. 또 울고불고 다시 돌아갈 거면서.”
“이번엔 진짜 취직준비 열심히 해서, 진짜 민석이 여자 친구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걔가 너 직업 없다고 달달 볶냐?”
“..아니?”
-“근데 왜 혼자 난리 법석이세요. 뭐, 만약에 결혼한다고 쳐. 근데 꼭 맞벌이를 해야 할 정도로 김민석이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자신이 더 한심하다고. 김민석이 선ㅂ,”
-“어? 뭐?”
“아니.. 아... 그니까! 일 관둘까?”
-“아!! 똑같은 말 또 하게 하네. 지랄 좀 작작해!!”
정수정이 답답한 듯 크게 소리친다. 정수정의 목소리에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기차화통을 삶아먹었나. 밖이라면서 뭘 저렇게 크게 소리를 질러. 쪽팔리지도 않나?
아, 그리고 김민석 선 얘기는 정수정에게는 비밀로 해야겠다. 알게 되면 지가 또 나서서 김민석한테 난리칠 게 뻔하니까.
정수정한테 말해봤자 욕만 얻어먹는 것 같아서 그냥 혼자 생각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정수정이 ‘어?’하더니 엄청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야. 김여주.”
“응?”
-“지금..뭐... 내 눈이 잘못된 건가?”
“뭐가?”
-“김민석.”
“민석이?”
-“응. 김민석 맞는데, 저거.”
“너 지금 어딘데?”
-“나 추워서 카페 들어왔는데. 아.. 뭔데, 저거.”
정수정이 혼자 중얼거린다.
민석이가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까 오늘 민석이에게서 연락이 한통도 오질 않았다.
뭐. 바쁜 일이 생겼겠지. 싶었는데 정수정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가 방금 지랄한 걸 봐서는 너 김민석이랑 헤어진 거 아니잖아.”
“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헤어져.”
-“그럼 저 새끼 바람피우는 거야?”
“...뭐?”
-“김민석 지금 카페에 여자랑 있어.”
정수정의 말에 부지런히 책장을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자세히 봐봐. 민석이 아닌 거 아니야?”
-“맞아. 김민석.”
“근데 왜 민석이가 여자랑 있어.”
-“그러니까, 시발. 쟤 뭐야?”
정수정이 멘붕이 온 듯 넋 나간 목소리로 떠들어댄다.
정수정이 김민석의 얼굴을 잘못본 건 아닐 테고. 아니 근데 말이 돼? 민석이가 왜 여자랑..
...아... 불현 듯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김민석과 변백현의 대화.
‘자꾸 선보래.’
‘서언? 무슨ㅋㅋ형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
‘뭐.. 엄마 지인이 아는 좋은 여자가 있다고 보채.’
설마 그 선자리...?
“그냥.. 그냥 아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아는 사람? 뭐.. 그..헐? 미친.”
“왜?”
-“그냥 아는 사람 아닌 듯. 방금 손깍지 꼈어. ..헐. 뭐야?”
정수정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겨우 나은 감기 덕에 잠잠했던 머리가 다시 깨질 듯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야. 저거 뭐 어떻게 해?”
“.......”
-“김여주. 가서 내가 깽판 쳐줄까? 어?”
“........”
-“여보세요? 여주야.”
전화기 너머로 정수정이 뭐라고 하는데, 그 말들이 하나도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만약에 김민석의 마음이 그 여자에게로 떠난다면, 나는... 나는 그 여자를 이길 자신이 없는데. 나는 아무 것도 없는데...
-“야! 여보세요!”
“..어..수정아.”
-“너 괜찮아?”
“어.. 괜찮아...”
-“어어? 야. 나간다, 쟤네. 나 따라갈까?”
“...아니.. 아니 됐어, 수정아..”
-“어?”
“너.. 너 볼일 봐...”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책상위에 올려놓는 내 손이 덜덜 떨렸다.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너무 놀라서 그런가. 아...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는다.
정말 선을 본 건가? 아니.. 손깍지를 낀 거면, 그래도 몇 번 만난 사이일 텐데.. 설마 전에 선을 봤으면서 날 속이고...
아니야. 수정이 말만 듣고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는 없지. 민석이를 믿어야하는데... 아... 그게 마음처럼 안 돼.
민석아.. 너 대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나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는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해...?
-
하루 종일 뭘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수정이와 통화를 끝낸 뒤로, 계획했던 모든 일은 제쳐두고 그냥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살아온 내 인생이 너무 한심해서 울고, 김민석과 헤어지면 어떻게 살아야하나 생각하면서 울고, 그냥 그것만 계속 반복했다.
그러다보니까 어느새 출근할 시간이 됐고. 김민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데리러가고 있으니까 5분 후에 나오라고.
울어서 약간 부은 눈을 화장으로 감췄다. 예뻐야했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집 앞에 김민석의 차가 세워져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마침 나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던 듯 핸드폰을 들고 있던 김민석이 ‘어. 왔어?’하고 말하며 핸드폰을 다시 끈다.
문을 열고 멈춰 서서 김민석을 빤히 쳐다봤다.
“..왜?”
“...아니야.”
애써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김민석이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왜?’하고 물으며 녀석을 쳐다봤더니 날 빤히 보던 김민석이 내 입에 짧게 입을 맞춘다.
“예쁘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에게 옅게 웃었다. 그리고 차가 출발했다.
말없이 창밖을 쳐다봤다. 눈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생각 없이 바라봤다.
내가 말이 없으니 김민석이 감기가 아직 다 낫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다 나았다고 대답하며 녀석을 보고 웃어주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갤 돌렸다.
나를 향한 김민석의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녀석이 날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다는 건 나도 다 느끼고 있으니까. 그 넘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이상한 거다.
다만 내가 지금 무섭고 걱정되는 건, 녀석에게 나는 종착역이 아니라 그 전에 스쳐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가 될까봐. 그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지는 거다.
나는 김민석이 내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데, 그 다음 남자 그런 거. 하나도 궁금하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게 안 될까봐 무섭다.
만약에 김민석의 부모님이 아무 비전도 없는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막 헤어지라고 하고 그러면.. 그러면 진짜 헤어져야할까. 민석이랑 헤어지면 나는 어떻게 살지.
끝도 없는 이어지는 생각들의 끝은 결국 이별이었다. 어젠가는 헤어지겠지 하는 걱정들의 반복이었다.
그 선을 본다는 여자도 그렇고. 민석이의 주변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나는, 그것들을 다 이겨낼 자신이 없다.
김민석의 굳은 사랑에 안심이 되다가도, 또 그 사랑에 익숙해져서 나중에 우리의 모든 게 끝이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버텨낼 자신이 없다.
헤어짐. 기약 없는 사랑. 생각이 깊어지자 다시 울컥 하고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 지금 울면 안 되는데.. 다른 생각해, 김여주. 울면 안 돼. 민석이가 옆에 있는데. 왜... 왜 울어. 나.
아랫입술을 꽉 물었는데도 결국엔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느껴졌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울음을 참느라 못나게 일그러져있었다.
“여주야. 우리 가게 오픈하고, 애들한테 맡겨놓고 저녁 먹으러 갈까?”
“.......”
“응? 여주야.”
김민석의 부름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이를 앙 물고 있었으니까.
타이밍 좋게 차가 신호에 걸리고 말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김민석이 ‘김여주.’하며 내 어깨를 잡아 내린다.
고개가 김민석 쪽으로 돌아갔고, 내 눈앞은 김민석의 표정을 볼 수 없게 흐려졌다.
예뻐보인다고 공들여 한 화장이 다 지워졌을 거다. 나 지금 못생겼겠다. 어떡하지.
“너 울어?”
“..........”
“왜 또 울어.. 여주야.”
“아니.. 민석아..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아.. 진짜, 미치겠다.”
신호등 불이 바뀌었는지, 그렇게 말한 녀석이 차를 아까보다 더 빠르게, 거칠게 몰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민석아.’ 하고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김민석은 대답 없이 운전만 했다.
그러다가 녀석이 근처 공원 앞에 차를 세웠다.
시동이 꺼지고, 차안이 조용해졌다. 내가 훌쩍이는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여주야. 너 요즘 왜 자꾸 우는 거야. 어?”
“..아니야..”
“아니긴, 무슨.”
“..미안해.. 민석아.. 미안..”
“그 미안하다는 말도 좀 그만 할 수 없어?”
김민석의 목소리도, 표정도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녀석을 화나게 했다.
녀석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김민석이 조금 거친 숨을 쉬며 입을 연다.
“나는 네가 그렇게 의미도 모를 사과하는 거 불안해 죽겠어.”
“.........”
“요즘 내 옆에만 있으면 우는 거, 그것도 불안하다고.”
“........”
“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왜... 왜 나랑 있으면 행복해하질 않는 건지. 나 진짜..”
김민석이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쉰다.
나만 불안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내 행동들을 그렇게 받아들였을 녀석을 생각하니 더 미안해졌다.
아니, 민석아. 나는 네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의 사이가 끝나길 바라는 것도 아니야.
나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아니야.. 민석아. 나 행복하지 않은 거 아니야..”
“.........”
“난 너 정말 사랑하고.. 우리의 모든 게 다 행복해..”
“.......”
“나는 지금.. 이 행복이 깨지는 순간이 너무 겁이 나 민석아..”
“...너..설마..”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려는 건 줄 아는지, 김민석의 표정이 굳어진다.
다시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민석아. 나는, 우리가 기약이 없는 게 두려워.”
“..뭐?”
“막... 내가 너무 모자라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장애물이 될까봐 두렵고..”
“......”
“네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내가 널 막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
“결국엔 우리의 사랑이 끝나게 될 거라는 게 벌써 막 걱정이 되고..”
또 다시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에 입을 꾹 물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애초부터 내 이 복잡한 감정들을 김민석에게 말로 전달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녀석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녀석이 내 진심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정리 없이 내뱉은 말들이었다.
내내 말이 없던 김민석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여주야.”
“..응.”
“왜 그런 걱정을 혼자 해서 날 막, 이렇게 심장 떨리게 만들어.”
“........”
“나한테 너 모자란 사람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나한테 너 벅차다고. 응?”
“..나는.. 아무 것도 없는데...”
“나만 좋아해주면 돼. 나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여주야.”
“.......”
“나 너 안 떠나. 뭐가 그렇게 불안했어. 내가 너한테 확신을 못 줬어?”
“........”
“내가 너 다시 만나고난 후로, 지금 내 삶의 모든 주축이 너야.”
“........”
“나한테 너, 거의 전부라고. 네가 이런 걱정하는 게 우스울 만큼.”
“.......”
“우리한테 장애물 같은 거 없어. 나한테는 그거 다 이겨낼 마음이 있잖아.”
“.......”
“그리고 나한테는 네가 가장 좋은 사람인데, 네가 왜 그런 걱정을 해.”
“.......”
“나한테 너보다 좋은 사람 없어, 여주야.”
김민석의 말들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다시 눈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결국 목 놓아 엉엉 울며 녀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김민석의 두 팔이 내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토닥였다.
“혼자 그렇게 불안하고 걱정했어?”
“...흐으..응..”
“내가 너 사랑하잖아. 사랑한다고 말하잖아, 매일.”
“응...흐윽..미안해..못 믿어서..”
“난 이제 네가 다야. 나한테 네가 전부야, 여주야.”
달콤하게 속삭이는 녀석의 잔잔한 목소리에 김민석의 목을 더 끌어안았다.
그래, 민석아. 네 말대로 내가 확신이 없었나봐. 보잘것없는 내가 널 사랑해도 되는지.
우리가 정말 완전한 사랑이 맞는 건지. 너랑 내가 사랑을 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없었어.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나 지금 진짜 가슴이 벅차.
녀석의 말들을 다시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며칠간 날 괴롭혔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다 사라진 것 같다.
내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김민석이 자신의 목에 둘러져있는 내 팔을 잡아 내린다.
“울어도 예뻐.”
“........”
“또 말해줘?”
“...뭘?”
“나한테 너보다 더 좋은 거 없어. 알았지?”
“..응.”
“이제 혼자 생각하고 그러지 마. 그냥, 우리 서로 좋아하는 거. 그것만 보자, 여주야.”
김민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걱정했던 것들에 확신이 생겼으니. 나는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김민석의 사랑을 받고, 녀석을 사랑하면 되는 거다.
응. 그게 다야, 우리는. 우리한테는 사랑이 다야, 민석아.
내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준 녀석이 내 입에 짧게 입을 맞춘다.
부드럽게 닿은 녀석의 입술과 얼굴에 와 닿는 녀석의 숨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다.
녀석의 입술이 떨어지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내 눈을 쳐다보며 녀석이 웃는다. 나도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아, 근데.. 좀... 찜찜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아.. 뭐지?
“아!!”
“...왜?”
“너.. 오늘... 뭐했어?”
“..어?”
김민석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졌다. ...당황해하는 것 좀 봐.
“..너 여자랑 있었지.”
“어? 어떻게..어떻게 알았.. 아!”
“.......”
“아니.. 여주야. 그거, 그런 게 아니라.. 어...”
내가 슬쩍 노려보는 눈에 말을 더듬거리던 김민석이 ‘아.. 이거 아닌데..’하고 자신의 머리를 헤집더니 자신의 옷 안쪽으로 손을 넣는다.
..뭐하는 거지? 아직 의심의 눈을 풀지 않은 채 녀석을 쳐다봤다. 녀석이 옷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낸다.
“..반지 케이스...”
“으...진짜.. 이렇게 하려고 한 거 아닌데...”
김민석이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케이스를 연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린 케이스 안에는 크기가 다르고, 똑같이 생긴 반지 두 개가 들어있었다.
커플링이다... 멍하게 반지를 쳐다봤다.
“이거...그... 아.. 우리 커플링..”
“........”
“이거 원래 막, 멋있게 줄려고 한 건데! 어떻게 알았어. 나 쥬얼리 디자이너 만난 거?”
“..쥬얼리 디자이너?”
“...어.. 그.. 나 아는 앤데. 우리 커플링 평범하게 하기 싫어서 디자인 의뢰 좀 했거든.”
아... 그럼 카페에 같이 있던 그 여자가... 녀석의 눈을 보고 ‘아..’하고 멍청한 소릴 흘렸다.
아니, 아니지. 다시 녀석을 새초롬하게 째려보니 김민석이 뚱한 표정으로 ‘왜 또.’하고 묻는다.
자신의 이벤트가 실패해서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근데 손깍지는 왜 꼈어?”
“뭐야. 너 카페에 있었어? 그것까지 알아?”
“빨리 대답!”
“..네 반지사이즈 얼마인지 몰라서.”
“근데 왜 그 여자 손깍지를 껴.”
“걔랑 네 손이랑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보느라고 그런 거야. 네 손이 좀 더 작더라. 그래서 걔가 끼는 호수보다 한 치수 작은 걸로 맞췄어.”
..그런 거구나. ...나는 또 의심만 했네. 멍청하고 의심만 많은 년...
민석이에게 미안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계획했던 것들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얼마나 속상할까.
녀석의 눈치를 슬쩍 보는데 녀석이 케이스에서 작은 반지를 꺼내더니 내 손을 잡아들고 끼워준다.
“잘 맞는다.ㅎㅎ”
“..예쁘다..”
“예뻐?”
“응.”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김민석도 웃으면서 ‘나도 끼워줘.’하며 내게 반지케이스를 내민다.
케이스 안에서 반지를 빼들고 녀석의 손을 잡아 반지를 끼워줬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녀석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내 행동에 김민석이 웃는다.
“예쁘다.”
“그치?”
“응. 김여주 예뻐 죽겠다.”
“...ㅋㅋㅋ오글.”
“아... 아무튼. 오늘 계획했던 거 다 망쳤네..”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오늘 가게 변백현한테 맡기고, 너랑 레스토랑 가서 저녁 먹으면서 주려고 했는데.”
“그럼 하면 되지!”
“어?”
자동차 본네트 위에 올려뒀던 반지케이스를 다시 집어 들어 내 손에 끼웠던 반지를 빼 꽂고, 김민석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도 빼서 다시 꽂아 넣고는 케이스를 닫고 다시 녀석에게 내밀었다.
김민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빨리 다시 넣어.”
“어..어?”
“나 아무것도 못 봤어.”
얼떨결에 김민석이 반지를 받아들었고,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로 그렇게 말했다. 김민석이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깐 있다가 손을 떼어 녀석을 쳐다봤다.
“다 숨겼어?”
“응? 뭘?”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되묻는 김민석.
녀석이 귀엽고 웃겨서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애써 참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참. 우리 일하러 가야지.”
“뭐~ 가도 금방 나올 건데.”
“어? 왜 중간에 나와?”
“어? 어.. 글쎄?”
어물쩡 대답하는 녀석이 귀여워서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차를 다시 출발시킨 녀석이 웃으면서 나에게 웃지 말라고 말한다. 자기도 웃으면서.
녀석이 한손으로 운전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잡았다. 내 손을 꼭 잡은 녀석의 손을 보며 나는 그저 웃었다.
우리의 사랑에 확신이 가득한 지금. 내 마음은 어느 무엇보다도 가벼웠다.
날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는 김민석의 사랑이 예뻤다.
첫댓글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여주가 자기 인생 생각도 했으면... 결혼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바 알바로 계속하는 걸 괜찮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5.05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