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鳳棲公遺墟碑銘 - 諱仁默 公諱仁默字德容姓李氏系出永川麗季有諱軒軍器少尹自永移居禮安之汾川生諱坡義興縣監贈兵 曹參議生諱孝孫通禮門奉禮贈吏曹參判生諱欽麟蹄縣監贈議政府左參贊生諱賢佐部將卽孝節公 聾巖先生叔弟於公爲九世祖也曾祖曰景林祖曰裕泰考曰杉妣寧海申氏正信女生考諱橝妣綾城具 氏龍彩女也英廟乙未生辛丑七月八日卒享年六十七葬木溪後谷癸坐原始公家自汾上移居府北長 水村世業儒素以文行稱於鄕里及公之世有一家奴頑悍不率公屢戒不悛一日作變于隣里士族家勢 不能安土遂挈家東走轉徙英陽之花梅旣又癘疫大熾喪禍連仍惟公父子得免更入基川山中備經許 多艱苦猶不廢舊業讀書攻苦居數歲家有儲業有所進見者咸稱歎眞城李公鉉九尤嘉尙以其女妻公 之子遂夤緣復遷于眞安之木溪居焉于時鄕之士林刱建鳳覽書院首薦公爲任司此載眞寶邑誌可見 公行誼之高識見之正可以服人之心而推重之也噫歷世旣遠文籍蕩佚其詳無得以知之庸非慈孫之 遺憾耶配安東權氏烋女墓同原子坐育一男時革二女朴夏老權載範今距公之世遠矣椒聊繁衍華華 有昌熾之兆豈非公之所以積累培殖有以致之者歟予嘗少日一再訪問溪山寥朗屋宇連墻孝友敦睦 守分謹飭其眷戀嚮宗之意款厚餽贐之情久而不能忘也邇來後孫諸公稍稍散居京鄕嗣孫東燮氏懼 其蕩悉世居謀欲立石遺墟自南城辛勤再枉託以陰記其追先不忘之誠老而益厲雖以老洫無文不得 以終辭也遂據族祖經齋翁所撰遺事强叙如右係以銘曰 公昔百艱運値非常其如命何竄身殊鄕辛 勤胥宇眞安之陽不有所廢其何能昌有裕其承支流派長表厥里墟沒世不忘咨爾來者視此銘章 族孫龍九謹撰
봉서공 유허비명 - 휘 인묵 공의 휘는 인묵(仁默)이고 자는 덕용(德容)이고 성은 영천이씨이고, 고려말엽에 휘 헌(軒)은 군기시소윤을 지내고 영천에서 예안의 부네에 이사하여 살았고, 다음 대 휘 파(坡)는 의흥현감을 지내고 병조 참의에 증직됐고, 다음 대 휘 효손(孝孫)은 통례문 봉례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됐고, 다음 대 휘 흠(欽)은 인제 현감을 지내고 의정부 좌참찬에 증직됐고, 다음 대 휘 현좌(賢佐)는 부장을 지냈는데 바로 효절공 농암(聾巖)선생의 아우로 공의 九대조 이다. 증조부는 경림(景林)이고 조부는 유태(裕泰)이고 아버지는 삼(杉)이고 어머니는 영해 신씨(寧海申氏))로 정신(正信)의 따님이고, 생가 아버지의 휘는 담(?)이고 어머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용채(龍彩)의 따님이다. 영조 을미년(一七七五년)에 출생하여 신축년(一八四一년) 七월 八일에 돌아가니 향년 六十七세였고 목계(木溪) 뒷골 계좌의 언덕에 안장했다. 공의 집은 처음은 부네에서 고을의 북쪽 장수촌(長水村)에 이사하여 살았는데 본디 유학(儒學)을 세업으로 하여 문행(文行)으로써 향리에서 칭송했고, 공의 세대에 미쳐서는 한결같은 고집으로 가노(家奴-종)를 거느리지 않고 있었으며 공이 여러 번 고치지 않도록 주의를 시켰는데 하루는 이웃마을의 선비집안에서 집안 형세를 변경하니 그 땅에 편히 살 수 없어서 드디어 가정을 이끌고 동족으로 이사를 가니 영양(英陽)의 화매(花梅)인데 이미 악성 전염병(염병)이 크게 번져서 초상이 연달아 났으나 오직 공의 부자(父子)만이 면(免)하므로 인하여 다시 기천(基川)의 산중으로 들어가서 허다(許多)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을 것을 대비(對備)했다. 오히려 구업(舊業-선대의 사업)을 폐지하지 않고 고통을 이겨내며 독서하면서 여러 해를 살아가니 가정에는 업적이 쌓였고 그 곳을 가서 본 사람은 모두 칭찬했고, 진성인(眞城人) 이현구(李鉉九)는 더욱 칭찬하며 그의 딸을 공의 아들의 아내로 인연을 매졌다.
다시 진안(眞安-진보)의 목계(木溪)에 옮겨서 살았고, 고을의 사림(士林)이 봉람서원(鳳覽書院)을 창건할 때에 공을 첫머리에 추천하여 임사(任司)를 삼은 것이 진보읍지(眞寶邑誌)에 기재되었음을 불 수 있고, 공의 올바른 행실의 고결(高潔)함과 지식과 견문의 반듯함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받들어 존중할 만 했다. 아! 지나간 세대(世代)가 멀어졌고 문적(文籍)이 없어져서 자세하게 찾지 못하여 알고 쓰지 못하는 것이 자손들의 유감(遺憾)이다. 배(配)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휴(烋)의 따님이고, 묘소는 같은 언덕의 자좌이다. 길러낸 일남(一男)은 시혁(時革)이고 이녀(二女)는 박하로(朴夏老)와 권재범(權載範)이다. 지금과 공의 세대의 거리는 멀어졌고 자손은 많이 퍼지고 화려하게 빛나서 번창할 조짐이 있으니 어찌 공의 배양(培養)과 번식이 누적(累積)된 까닭이 아니겠으며 이룬 것이 있음이로다. 내가 젊은 날에 한두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산천은 조용하면서 산뜻하고 가옥은 담장이 이어졌으며 효도와 우애로 돈독히 화목했고 분수를 지키며 삼가고 조심하는 종친의 뜻을 대하니 사랑스럽게 보였고 두터운 정성으로 전별(餞別)하는 인정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멀리서 후손 여럿이 찾아와서 자손들은 경향(京鄕)에 흩어져 살고 있어서 사손(嗣孫) 동섭(東燮)씨가 대대로 살아온 자취가 다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다가 유허(遺墟)에 비석을 세우고자 계획하고 남쪽 지방에서 매우 부지런하게도 재차(再次) 왕림(枉臨)하여 비문을 부탁하는데 조상을 잊지 못하여 추원(追遠)하는 노인의 정성이 더욱 맹렬(猛烈)하니 비록 늙어빠지고 글 솜씨가 없어도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족조(族祖) 경재옹(經齋翁)이 지은 유사(遺事)에 의거하여 억지로 오른쪽과 같이 서술(敍述)하고 이어서 명(銘)을 이른다. 공은 옛날 온갖 어려움 속에서 예사롭지 않은 운명을 만났으나 어떤 운명에서도 자신을 버리니 향리(鄕里)에서 뛰어났도다. 집안끼리 부지런함이 진안(眞安-진보)에서 드러나서 폐지되지 않으리니 번창하지 않으리오? 넉넉하게 계승하여 자손들은 길이길이 내려가리니 이곳 옛터에 세운 이 비석은 세상 끝까지 잊혀지지 않으리라. 아! 가까이 오는 사람은 빛나는 이 명(銘)을 볼 것이다.
이용구(李龍九)는 삼가 짓다.
駐 ①유허(遺墟) : 살았던 곳에 남은 빈 터 ②왕림(枉臨) : 남이 자기 있는 곳으로 오는 일에 대하여 공손히 이르는 말 ③족조(族祖) : 일가 중에서 할아버지뻘이 되는 어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