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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日堂重新記 堂在家東一里芝山之麓高巖之上主翁於正德戊辰秋爲親乞符于永陽陽於桑梓距三日程尋常연牒 覲省無虛月恨其村居隘陋娛親無所遂構堂于巖畔巖舊無名諺傳耳塞巖前臨大川上有急灘灘鳴響 應聵塞人聽耳塞之名其必以此宜乎隱遯黜陟不聞者之居因謂之聾巖而翁自號焉每於佳辰令節侍 雙老率諸弟稱觴戱綵必於此堂而親年日深喜懼之情自不能無乎其中扁其堂額曰愛日厥後仕宦于 京奉檄于外往來奉養幾三十餘年其俱存無故之樂宜無極矣而光陰不待壽過髦期連抱風樹之悲堂 雖依舊而無復如昔之歡欣和悅豈不傷哉及至更宦于朝濫秩卿列而翁亦年踰致仕宦興己衰報了無 期請老辭退重尋某丘時時登賞日與魚鳥相親今七八載矣適兒子仲樑又宰永陽以我之昔日奉吾親 者吾又受此兒之奉斯豈非稀世之事歟第見堂久而傾圯慨念厥初經始之勤具慶終養之地將至蕪沒 乃因其舊制稍加增損堂之高與巖齊而巖上有臺臺上又有臺矗矗如層塔松陰掩映石棧縈紆人必喙 息而後登焉觀其北倚高山崒葎撑雲西擁長林蓊鬱道周東望則長江袞袞源自淸涼千巖萬壑崛曲盤 回流到半息許有官魚箭絶流如長城箭水衝激下成深潭名曰別下淵淵枕絶壁上構精社古之屛風庵 奇巖怪石左右尖峯影落潭底Ꝼ難俯視自此波流漸緩澄泓淸澈至聾巖下?漫停蓄扁舟可棹是謂汾 江江心盤石如鋪錦茵名爲簟巖客至則載酒往遊越岸松樹羅生偃如張盖此乃宜仁舊縣縣基猶存古 寺亦存畝 沃壤禾黍盈疇朝暮孤村墟烟寂歷其他遠近山川名跡眺望形勝或存乎古老流傳之喙或 載乎中間遊士品題之筆不須殫錄姑述其槩焉或曰池臺亭榭雖是登臨遊觀之好而亦懼乎流連耽樂 之過翁之修葺亭臺遺之於後無乃啓子孫佚樂而非貽厥之善乎是不然堂旣以愛日爲扁則非獨爲一 身遊樂而奉親爲日不足之意存焉翁之子孫登斯堂而當顧名思義親老而惟孝是則身存而堂構是念 暇而爲暢叙頤養之所則堂爲翁家世守之規範豈必以此而爲子孫累也哉或曰諾姑書以爲記 嘉靖 戊申孟秋日
애일당 중신기 당(堂)이 집 동쪽 一리 영지산 기슭 높은 바위 위에 있으니 주옹(主翁)이 정덕 무진년 가을에 어버이를 위하여 영천(永川) 군수를 빌어서 부임하니 영천은 고향에서 사흘길이라 보통 문서 여가에 자주 근친을 하였는데 집의 거처가 좁고 어버이가 즐길 곳이 없어 한이 되더니 드디어 바위 가에 정자를 지었다. 바위가 이름이 없고 속칭 「귀막이 바위」라 하니 앞은 대강이고 위에는 급한 여울이 있어 여울 소리가 대단하여 사람의 귀를 막히게 하니 귀막이의 이름이 이것으로 되는 듯 마땅히 세상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살 곳이다. 인하여 농암(聾巖)이라 하고 옹의 자호로 핟 매양 가신영절(佳辰令節)에는 양친을 모시고 모든 아우를 데리고 술상을 올리며 채색 옷을 입고 춤추기를 이 마루에서 하였는데 어버이 나이가 점점 높으시니 반갑고 두려운 정이 없을 수가 없어 당 이름을 애일이라 하였다. 그 뒤에 서울에서 사환(仕宦)도 하고 외직도 하고 왕래하여 봉양하기를 三十년이 넘었다. 세월이 기다리지 아니하고 수가 八十이 지나 연하여 풍수(風樹)의 비통함을 만나니 당(堂)은 비록 의구하나 그 전과 같이 즐거울 수가 없으니 어찌 상심이 아니 되겠는가? 그 후 다시 조정에 벼슬하기에 이르러 외람하게 경렬(卿列)에 오르고 옹도 치사의 나이가 지내고 벼슬 홍치도 쇠하여 은혜를 갚을 기일이 기한(期限) 없고 늙음으로 사퇴하여 옛 고장을 찾아 때마다 올라보고 날마다 어조(魚鳥)와 친하기가 지금 七八년이라 마침 아자(兒子) 중량(仲樑)이 또 영천군수가 되어 내가 옛날 봉친하던 일로 또 아이의 봉친을 받으니 어찌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세월이 오래되어 당이 퇴락하였으니 처음 경영 하던 대로 짓고 구경(具慶)봉양하던 곳을 잡초가 덮고 우거지게 할 수 없어 옛 제도대로 하고 조금 증감하여 중수하니 당 높이가 바위와 같고 바위 위에 대가 있고 대 위에 또 대가 있어 우뚝 높아 층탑 같고 송음(松陰)이 덮이고 돌길이 으슥하여 사람이 반드시 숨을 몰라 쉰 뒤에야 올라간다. 북쪽을 바라보니 고산이 높이 구름을 떠받히고 서쪽은 장림이 길에 끌려 우거지고 동으로는 장강이 줄줄 흘러 근원은 청량산으로부터 내려오고 천암만학이 굴곡 반회(槃回)하여 흘러 반쯤 쉴만한 곳에 이르면 관(官)의 어전(魚箭=통살로 물고기 잡는 것)이 있어 물을 막아 성같이 되어 통살 물이 충격하여 아래는 깊은 못이 되니 이름을 별하연(別下淵)이라 한다. 별하연이 절벽을 끼고 절벽 위에는 정사가 있으니 병풍암(屛風庵)이라 한다. 기암괴석과 좌우 뾰족한 봉우리의 그림자가 못 밑에 떨어지고 여기서부터 물결이 점점 잔잔하여 맑고 깨끗하여 농암 아래에 와서 물도 정지되어 배도 놓을 수가 있으니 여기가 분강(汾江)이다. 강중에 반석이 있으니 비단자리 깐 듯 이름을 점암(?巖)이라 한다. 손이 오면 술을 싣고 가서 놀기도 하였고 건너 언덕에는 소나무가 벌려 있어 일산(日傘)을 덮은 듯하니 여기는 의인(宜仁)구현(舊縣)인데 고을 터가 아직 있고 옛 절도 있으며 밭이 토옥하여 벼와 기장이 고랑에 차고 아침저녁 고촌에 연기가 두르고 그 밖에 원근 산천과 명승고적은 옛 늙은이의 유전하는 말도 있고 혹 중간에 유람하던 선비의 글 지음도 있으니 다 기록 못한다. 누가 말하기를 못 동산과 정자는 올라 놀기는 좋지만 놀러 다니기를 즐겨 유련탐락(流連耽樂=주색에 놀기 좋아하는 것)에 빠지기에 지나치면 두렵지 아니한가? 옹의 정대 수리가 후세에 끼칠 것이 자손이 편하고 즐기도록 하는 것이 모범이 안 되지 않는가? 하나 이것은 그렇지 아니하다. 당을 애일이라 하였으니 일신을 위하여 놀고 즐기기만 할 수 있겠는가? 봉친하는데 해가 부족하다는 뜻이 있다. 옹의 자손이 이 당에 오를 때 당연히 이름을 돌보고 뜻을 생각하여 어버이가 늙으면 효도를 법하고 몸이 있으면 당의 중수를 생각하고 여가에 소창하고 기른다면 당은 옹의 집 대대 유전하는 규범이 될 터이니 어찌 이것이 자손에 누가 될 수 있을까? 누가 말하되 그렇다 아직 써서 기(記) 하노라. 가정 무신 맹추일
註) ①풍수(風樹)의 비통-부모가 안 계시는 감상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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