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諱(휘)는 瀅자 書자시고, 字는 汝玉(여옥), 號는 問巖(문암)이시다.
1915년(乙卯) 4월 15일(음력)에 父 然자 成자, 母 漆原(칠원) 諸氏(제씨) 슬하
에서 가문의 9대 종손이자, 獨子(독자)로 태어나셨다.
내 아버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한달 쯤 전에, 부친께서 23세라는 젊은
연세로 별세하셨기에 장차 그 삶의 여정이 극히 어려울 것임이 예견되었다.
집안에 바깥 어른들이 아니 계셨기에 성장하시면서, 여러가지 답답한 일들을
여쭙고 가르침을 받으실 일이 막막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조모(祖母)님이신
순흥(順興) 안씨(安氏)로 부터 어린 시절에 유학(儒學)의 기본 소양을 배우셨다.
그래서, 살아계시는 동안에 늘 조모님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모친
칠원 제씨께서는 가족들(시어머님과 아드님)의 생계를 위해 농사와 함께 경제
활동에도 참가하셨으며,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살림을 키울 수 있었다고 들었다.
아버님께서 15세에 풍천(豊川) 임씨(任氏)이신 내 어머님과 혼례를 올리셨다.
두 분 슬하에서 장남 龍會(용회)를 비롯하여 모두 7남 1녀를 낳으셨다. 그러나
장형(長兄)님 아래로 네 분 형님들이 차례로 일찍 세상을 등지고, 따님인 용숙
(龍淑)과 그 아래로 두 아들 능회(綾會, 필자)와 문회(文會)가 각기 장성하여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위로는 부친의 모습을 한번도 뵙지 못하며 자라나셨고,
아래로는 금쪽같은 어린 아들 넷을 5세 이전에 이 세상에서 일찍 작별을 해야만
하셨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고 힘드셨을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다.
온갖 풍파와 험한 일들을 겪으시며 어머님과 더불어 청상에 홀로되신 할머님을
모시고 농사일에 임하셨으나, 자손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가세(家勢)는 점점
더 어려워만 갔다. 그래서 여러가지를 고심하시다가 불초가 중학교 2학년 진급
무렵에 온 가족들이 건너 마을인 사여(士余) 윗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선산(先山)에 농지를 조성하여 엽연초 농사로 가세를 일으켜 보려고 하신 것이다.
아버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형제자매가 없이 오직 홀로 외로우셨는데, 장남이
혼인하여 그 슬하에 손자녀들 4남매가 태어나니 비로소 아버님 얼굴에 화색(和色)이
깃드셨다. 세월이 흘러 어느 덧 한살이 많으신 어머님께서 회갑을 맞으신 1974년도
봄에, 아버님 간곡한 제안으로 다음 해에 있을 아버님 회갑연도 겸하도록 하셨다.
이 불초는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아버님 슬하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초등학교 취학 전년(前年)인 1957년에는 관기리(官基里) 자택에서 천자문(千字文)
을 가르쳐 주셨다. 취학(就學) 후는 집에서나 또는 들에서나 틈틈이 가문의 내력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셨다. 이에 비록 우둔하였지만
이 불초는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아 가문의 역사와 나라의 역사를 익힐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붓글씨 쓰기를 권하셨고, 선현들의 고시조를 설명해 주셔서 그 또한
어린 마음에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저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또한 독서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여러 책들을 읽으셨다. 우리 고시조
를 좋아하시면서 흥이 나시면 시조창을 청아하게 즐기셨다. 그 목소리가 맑으시면
서도 힘이 넘치셨다. 아버님의 시조창을 가까이서 듣노라면 덩달아 흥취가 어린 내
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이 불초가 고등학교 유학을 위해 1966년 부터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 4월부터 이듬 해 5월까지 병역 의무를 고향인 마로면사무소에서 복무하며
다시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불초가 직장에 복직(復職)을 하면서 다시 슬하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 몇년 사이에 병환이 나셨다. 1977년부터 증세가 조금씩 보이더니, 1978년 부터
눈에 띄게 상태가 나빠지셨다. 이 불초가 이 해 5월 5일에 혼인 날자를 정하였는데,
그 해 4월달 24일 (양력) 밤 10시 경에 눈을 감으셨다. 참으로 애통하고도 애통하다.
어머님과 이 불초가 아버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 찬송도 불러 드리고 눈을 감으
시기 얼마 전에 울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도 드렸다. 돌이켜 보노라면 한 평생을
힘겹고도 외롭게만 살아오신 아버님께서는 눈을 감으시기 전에 예수님 믿는 믿음을
확인하여 주셨기에, 이제는 하늘나라에 들어 가셔서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안식(安息)에 드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버님께서 별세하신 지 어언 44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이 불초의 나이도 어언
73세가 되었다. 두 해 전 이 맘 때에, 장형께서 86세로 별세하셨고, 이 불초도 70세를
넘겼으니, 선조들께서 너무 일찍 이 세상을 별세하시므로 인해 빚어진 가문과 후손들
에게 미친 좋지 않은 영향을 이제는 모두 단절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아버님의 자손들은 그후로 하나 둘 늘어나서 각기 성실하고 보람있게 살아가고 있다.
형님 龍會께서는 슬하에 '자현'과 '경자' 두 딸과 '자화(滋和)'와 '자길(滋吉)' 두 아들들을
합해 모두 4남매를 두셨다. 다들 장성하여 국내 외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따님 龍淑은 전주(全州) 최씨 가문으로 출가해, 슬하에 '수경'과 '수미' 그리고 '재원' 모두
3남매를 잘 키웠고, 불초는 '한별'과 '한나' 두 남매를, 아우인 文會는 '민경'과 '민교' 두
자매를 슬하에 두어, 역시 국내 외에서 각각 자신들의 삶을 펼쳐가고 있다.
비록 불초하여서 존성(尊姓)과 대명(大名)을 사해(四海)에 널리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아버님께서 가르쳐 주신 금옥같은 교훈을 받들어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가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서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으니, 이 또한 아버님의 사랑과 은혜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음을 이 불초는 삼가 머리 조아려 아뢰는 바이다. 또한, 앞날에도 우리 모든 자손
들이 아버님의 덕과 그 은혜를 기리며 살아가고자 한다.
서기 2022년 11월 7일 입동절에,
불초 차남(次男) 綾會가 울며 적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