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에 나타난 염불선]3 보리달마와 염불선
/ 조준호 한국외대 남아시아연구소
4. 후대 선불교에 있어 이입사행의 사상적 전개
금타와 청화의 염불선은 궁극적으로 ‘아미타불’을 자성불(自性佛)로 관조(觀照)하는 선(禪)이다. 이법(理法)으로서 아미타불을 관념(觀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미타불은 실상적 의미로서 우주에 충만한 찬란한 빛, 무한광명 그 자체를 의미한다.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로 진여광명(眞如光明)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동시에 온 우주가 하나의 무한생명이라는 무량수(無量壽: Amitayus)이다. 일상(一相)은 무한광명이면서 동시에 무한생명인 하나의 실상을 말한다. 그리고 이를 일상으로 우리의 마음에 간단(間斷)없이 빛으로 비추어 지속시키는 것이 염불선인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청화의 친필노트는 다음과 같다. “염불선은 시방삼세에 두루한 자성불(自性佛)의 광명을 관조하면서 닦는 선”이며 “일행삼매는,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그 자리를 생각 생각에 간단(間斷)없이 그대로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일상삼매는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의 실상이란 말입니다. 거기다가 마음을 두어야하는데 …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지속시키는, 이른바 염염상속(念念相續)이 일행삼매입니다.”라고 많은 법문에서 반복된다. 이처럼 실상염불의 염불선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충족요건이자 필수요건이다. 여기서 일상은 방편적이냐 실상적이냐 하는 수준과 입장차이가 있을 수 있다.48)
청화염불선은 두 가지 입장을 모두 아우르고 차제(次第)적으로 설한다. 방편과 실상 두 가지 모두 인정되고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실상염불의 염불선으로 나아가야 함이 강조될 뿐이다. 즉 방편적 일상이라 하더라도 결국 실상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달리 성인의 입장에서 보면 방편적인 일상 그대로가 실상의 일상이라는 것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상은 분별과 차별을 떠난 무이상(無二相)이다. 그렇기에 일상은 실상인 것이다.49) 때문에 실상은 일상이고, 일상은 실상인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여름철 짙푸른 땡감이 시절인연에 홍시감이 되는 이치이다. 여기서 땡감과 홍시감의 체(體)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몸에서 일어지는 질적전환이다. 달리 수증(修增)의 문제에 있어 길[道]과 목적지[實相]는 바로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는 불이(不二)이다. 청화염불선에 있어 실상염불을 위한 방편적 또는 가관적(假觀的) 일상이라 하더라도, 일상은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실상이라는 것이다. 길에 들어선 수도는 목적지에서 성취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상승선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는 간화선의 경우에서도 비슷하다. 화두를 ‘방편’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본질’로 보아야하는 문제이다. 김호귀는 양면 모두로 보아야한다고 한다. 그는 화두를 방편적인 기능과 본질적인 정기능으로서 나누어 설명한다.50) 다시 본질적인 정기능으로 “화두가 깨침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경우”로서 제2의 화두는 없기에 “방편적 기능과 본질적 화두는 본래 하나이다. 하나의 화두가 지니고 있는 양면적 기능일 뿐“이라 한다.51) 최근 종호 또한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는 대승무상방편품 을 인용하여 “法界의 一相은 여래의 법신이다”라고 하면서 “간화선에서는 이 실상의 파악에 화두를 사용한다. 화두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실상의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고 강조한다.52) 그리하여 화두는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과제이고 도구이지만 이미 실상이며, 깨달음은 그 실상의 체현이다”라고 하여 화두를 도구이면서 실상 그 자체라고 한다.53)
이처럼 염불선 에서도 간화선처럼 또한 일상은 실상인 것이다. 다만 청화의 염불 선에서는 화두 대신 ‘무량광명의 생명으로서 아미타불’을 바로 일상이며 실상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간화선과 차이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염불선의 일상은 단순히 무상(無相)의 실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상이 무상인 이유는 분별과 차별의 대립을 떠난 무이상(無二相)이기에 일상이며 무상인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당체로서의 법상(法相)이 되고 실상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상은 곧 무상(無相)이며 실상이다.
방편적 차원의 일상은 언어와 지견(知見)을 떠나있지 않다. 금타와 청화의 가관적(假觀的) 일상과 상사각(相似覺)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청화는 더욱 자상하게도 일상을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는’등의 친절한 방편적 언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염불선을 지도하고 있다.54) 듣는 이로 하여금 자칫 현애감(懸崖感)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극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적 제시는 그의 육즉불(六卽佛) 설명에서도 잘 보여준다. 육즉불은 원래 천태의 가르침이다. ‘여섯 단계가 바로 부처’에서 다섯 번째 분진즉불(分眞卽佛)의 전단계인 관행즉불(觀行卽佛)과 상사즉불(相似卽佛)을 염불선 맥락으로 설하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55)
‘무량광명의 생명으로서, 아미타불’로서 청화의 일상은 ‘절대긍정의 세계’이다. 여기에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이, 부정이 개입될 소지가 없다. 그 절대긍정의 일상을 ‘참되게 그렇게’眞如] 지속시키고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진여삼매인 것이다. 그리고 일행삼매가 확립된 것이다. 일상은 일행에 의해 체화(體化)되고 끝내 완성된다. 너와 나 모두가 광명당(光明堂)이 되고, 또한 광명당(光明幢)으로 찬란한 대광명의 깃발이 된다.
일행의 무량광명을 부단한 염염상속이라는 일행으로 온 생명을 모두 광명화 또는 불성화라는 질적전환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심지법문(心地法門)이며 안심법문이다. 때문에 청화의 일상은 그 자체로서 수청주(水淸珠)이며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게 하는 기능과 작용을 쉬지 않는다.56) 염불선이 쉽고 편하고 빠른 길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자리 잡은 일상이 이끄는 삶으로써 일행(一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은 실상이고 동시에 무상이다. 실상과 일상 그리고 무상(無相)의 관계를 어떻게 설하는가에 대하여 몇 몇 경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57) 먼저 4조 도신이 인용했던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般若婆羅蜜經 (대정장8권, 732)에서 “일체 법계와 부처님의 경계는 실로 있는 바가 없습니까?”라는 질문에 “있는 것도 없고 있지 않은 것도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일상(一相)이거나 상이 없고, 하나도 없고 둘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데에서 일상의 개념을 알 수 있다. 다시 같은 경전에 “여래께서 만약 생하였다면 법계도 또한 마땅히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법계와 여래는 일상(一相)이요, 이상(二相)이 없으며, 이상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다”에 이어 붓다는 문수사리에게 다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실상(實相)과 같은 법의 성품[性]ㆍ법의 머묾[住]ㆍ법의 자리[位]는 실제 가운데에서 부처와 범부의 차별이 있느냐?”이에 문수사리는 “없다”라고 답하자, 붓다는 결국에 “부처와 범부는 둘이 없고, 차별도 없고, 일상이요 무상[一相無相]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경전은 실상과 일상 그리고 무상의 교리적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방광반야경 에서 “상대가 없으니 일상(一相)이고 무상(無相)이며, 무색(無色)이 무색과 함께 합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나 “금강삼매에서 일상(一相)의 지혜로 아뇩다라삼야삼보리를 얻음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차제(次第)를 씀으로써 이름하여 여래라 하는 것이며, 모든 법에서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라는 가르침도 일상과 함께 염불선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인왕경에서도 “일상(一相)과 무상(無相)이 평등하여 둘이 아니며 제 십일의 일체지지(一切智地)가 되나니,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맑고 청정하여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라는 표현과 금강삼매경론 또한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이라 함은 이 지위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대반열반이어서 그 성품이 공하고 크다’함은 적멸무위(寂滅無爲)이며, 일상(一相)이자 무상(無相)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상의 경구는 청화 염불선에서 금강삼매를 실상관으로 보는 경전 전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실상과 일상 그리고 무상이 같은 말이며 나아가 일상의 내용으로 ‘부처와 범부는 둘이 차별도 없기 때문이라는 일상무상(一相無相)이라는 달마와 청화 염불선과도 일치한다. 또한 금강삼매에서 “일상(一相)의 지혜로 아뇩다라삼야삼보리를 얻음”은 곧바로 일상삼매를 반야지혜로 설명하는 금타와 청화의 염불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염불선이 되기 위해서는, 염불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달마의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 대승경전과 도신의 반야(般若)와 일행(一行), 혜능과 금강심론의 일상(一相)과 일행(一行) 그리고 관(觀)과 염(念)이 쌍수(雙修) 또는 쌍운(雙運)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금타와 청화 그리고 도신 그리고 대승경전과 초기경전으로 거꾸로 거슬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금강심론 : 관(觀)과 염(念) / 일상(一相)과 일행(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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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 도신 : 반야(般若)와 일행(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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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 달마 : 이입(理入)과 응주벽관(凝住壁觀) / 행입(行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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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 일상(一相)과 일행(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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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 혜학(慧學)과 정학(定學)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와 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다시 달마의 이입사행론 을 시작으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초조달마
4조 도신
대승불교
초기불교
금타의 금강심론
이입(理入) → 반야(般若) → 일상(一相) → 혜학(慧學) → 관(觀) / 일상(一相)
행입(行入)58) → 일행(一行) → 일행(一行) → 정학(定學) → 염(念) /일행(一行)
놀라운 것은 청화는 이와 같은 사상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계통을 너무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달마스님으로부터 6조 혜능스님까지의 순선시대에 일관되게 말씀한 내용”으로 “일상삼매는 혜(慧)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定)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정혜쌍수와 똑같은 뜻이라고 한다.59) 다만 여기서 청화는 도신 또한 일상삼매를 언급했던 것으로 설명하지만 정확히는 일상삼매에 상응하는 ‘반야바라밀’이다. 4조 도신은 文殊說般若經을 인용하여 “일행삼매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응당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 설한대로 수학(修學)한 뒤에 一行三昧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한다.60) 도신의 반야바라밀은 일상삼매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61)
여기서 청화염불선은 금타의 금강심론 을 기초해 염불선을 설명하지만 법문의 곳곳에서 일상(一相)과 일행(一行)을 주로 많이 언급하며 염불선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많은 곳에서 일상(一相)과 일행(一行)에 상응하는 가르침으로 달마의 이입(理入)과 행입(行入)과 반야(般若)와 일행(一行) 그리고 관(觀)과 염(念)이 비교적으로 제시된다.
염불선은 선이 붙어있지만 그 행에 있어 전적으로 일행삼매와같은 선정위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정학(定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반야지혜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혜학(慧學)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청화의 법문에서 달마의 혜학의 이입(理入)과 정학의 행입(行入)이 그리고 대승경전의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반복적으로 계속 강조되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일상과 일행은 혜와 정으로 대비된다. 초기불교로 돌아간 맥락은 8정도의 정념(正念)의 범위로서만 아니라 정념과 함께 정견(正見)과 정정(正定)이 함께 가동되는 행법이 바로 염불선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염불선은 계(戒)․정(定)․혜(慧)가 함께하는 지점에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