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 선언서 낭독 후 독립 만세
시위운동 전개를하여 이 두 운동으로 인해 3.1운동은 전국 방방
곡곡과 해외로 확산 되었답니다.
허나 일본의 경찰과 군대는 총검으로 운동을 처참하게 탄압을 하였고
그 예로 유관순의 순국과 화성 제암리 주민 학살 등이 있었습니다.
제암리 주민 학살이란 1919년 4월 15일 일제 군경은 제암리의
기독교도 약 30명을 교회에 가두고 집중 사격을 한 후, 교회당에
불을 질른 사건입니다.
또한 인근 교회 건물과 민가에 불을 질러 많은 살상자를 내었습니다.
3.1운동의 참가 인원은 2,023,098명이나 됬으나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961명 피검자가 46,948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망하신 분들과 이제 이세상을 하직하신 모든 분들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윤봉길의사 순국 장면 사진 공개***
*尹의사는 끝내 굽히지 않았다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의사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은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다.
윤 의사의 무릎을 꿇린 채 처형함으로써 일제가 윤 의사의 기개를 꺾으려했던 점,
총탄이 너무나도 정확히 윤 의사의 이마를 관통해 오히려 피가 별로 흐르지 않은 점 등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든다.
지난달 초 일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한 ‘더 채널’의 김광만(金光萬) 대표나 신운용 근현대사 팀장,
이 사진 사본을 전해 받은 유족이나 윤병석(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윤 의사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이 처음 발견된 데다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펀주: 아래 사진에서 잔잔한 미소를 띤 윤의사의 표정은
'내 할일을 하고 가니 기쁘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세상에서 일체의 사람이 하는일은 다 자신을 위함이나 일부 사람들은 이렇듯 가장 근본적인 집착이랄수도 있는 생명마저도
안위에 두지않는 희생정신과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 군요........)
2.안중근 의사가 복역한 중국 여순 형무소
단재 신채호선생과 도마 안중근의사가 복역하였으며 일본과 구소련이 중국을 점령하여
중국과 한국등의 애국지사들을 구금하기도 했던 중국 대련시 여순에 위치한 여순감옥.
당시의 피맺힌 절규를 다시 한번 돌아봄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적 잔인성을 다시한번
환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여순형무소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에 의하면- 외국인에게 개방이 금지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방문할 당시중국사람을 대동하여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