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8. 13
폭염이 전국을 뒤덮었던 여름이다. 기상 관측 111년 만에 가장 높은 기온을 찍었고, 하루 최저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는 ‘초열대야’도 현실이 됐다. 역사적인 무더위 속에 KBO 리그도 시름시름 앓았다. 전반기 야구장엔 연일 만원관중이 몰렸지만, 후반기 들어선 매진 소식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안 그래도 프로야구 선수들은 매년 7~8월이면 섭씨 30도를 훌쩍 뛰어 넘는 무더위와 전쟁을 치러왔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날씨 속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승부를 펼쳤다. 올해는 그 정도가 더 심각하다. 뉴스에선 연일 ‘야외활동 자제’를 권하지만, ‘야외활동’이 직업인 선수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더위를 이기기 위한 각종 민간요법이 등장하고, 평소 투지 넘치기로 유명한 선수들조차 경기 도중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교체되기도 한다. 이 시기만큼은 상대팀 투수와 타자보다 더 무서운 적이 바로 ‘더위’다.
# 선수협의 ‘폭염 취소’ 요구가 불발된 사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가 지난 7월 31일 긴급 이사회를 소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수협은 이날 KBO에 “7월 31일과 8월 1일 이틀간 예정된 경기를 취소해줄 것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폭염이 지속될 경우 경기 개시 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방안도 고려해 달라”고 요구했다. 7월 31일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랐고, 8월 1일엔 최고 39도에 이를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기 때문이다. 김선웅 선수협 사무총장은 “KBO가 올 시즌 초 사상 처음 미세먼지로 경기 취소를 한 것처럼 폭염에도 선수보호 차원에서 전향적으로 경기개최 여부를 검토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10개 구단 주장들이 선수들의 뜻을 모아 선수협에 이 같은 요청을 했다.
▲ 두산 오재일이 더그아웃에 냉풍기 앞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 연합뉴스
KBO 리그 규정 제27조에는 ‘황사 경보 발령 및 강풍, 폭염 시 경기 취소 여부’ 관련 조항이 있다. 폭염 주의보나 경보가 내려졌을 때 해당 경기위원이 지역 기상청에 확인한 후 심판위원, 경기 관리인과 협의해 구장 상태에 따라 취소를 결정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폭염주의보는 6∼9월 사이 하루 최고기온이 섭씨 33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할 때 내려지고, 폭염경보는 섭씨 35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할 때 발령된다. 한낮인 오후 1시에 시작하는 퓨처스리그 경기는 여러 차례 폭염으로 취소된 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1군 경기가 더위로 인해 열리지 않은 적은 없다. 1군 경기는 평일 오후 6시30분에 시작되고, 혹서기인 7월과 8월에는 주말 경기도 모두 오후 6시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실 더위를 이유로 1군 경기를 취소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KBO 관계자는 “폭염 관련 대책은 계속 고민하고 검토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당일이나 하루 전에 경기 일정을 갑자기 취소하기는 어렵다”며 “입장권 판매나 TV 중계 문제, 구장별 상태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고 설명했다. 시즌 초반 경기 취소와 달리 한여름 경기 취소는 순위 싸움에 한창 민감한 각 팀의 경기 일정이나 향후 일정 재편성에도 영향을 준다. 날씨 하나만 보고 섣불리 결정하기 어려운 시기다.
현장에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김진욱 KT 감독은 선수협의 요구 내용을 접한 뒤 “경기 개시 시간을 조금 늦추는 것까지는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경기 취소는 옳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야구는 축구나 농구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종목이 아니다. 매일 경기를 치른다는 게 힘든 부분이 있지만, 훈련량 조절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며 “폭염 취소보다는 원정 라커룸 환경 개선에 더 신경을 쓰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경기 시작 시간을 늦추는 안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냈다. “어차피 경기가 끝난 뒤 밖으로 나가도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훅 올라온다. 시간을 조금 늦춘다고 큰 효과는 볼 것 같지는 않다”는 이유에서다. 류중일 LG 감독도 “경기를 늦게 시작하면 그만큼 끝나는 시간도 늦어진다. 야구장을 찾은 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 불편해진다”고 했다.
# 더위를 피하는 최고의 비법은 휴식
결국 구단과 선수들이 각자 최선의 방법으로 더위와 전쟁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 감독들이 꼽는 최고의 여름나기 비법은 간단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것”이다. 이 가운데 사령탑들이 배려해줄 수 있는 부분은 휴식뿐이다.
올여름 많은 구단은 더위가 극에 달할 때 경기 전 훈련을 아예 안 하거나 최소화시켰다. 평일 경기를 기준으로 보통 홈팀은 오후 3시, 원정팀은 오후 4시 30분쯤 차례로 훈련을 시작하는데, 정작 경기 때보다 이때 겪는 더위가 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선수들 자율에 맡긴 팀도 있고, 아예 강제로 훈련을 금지시킨 팀도 있다. 홈팀 선수들은 배팅 훈련만 간단하게 하고 라커룸에서 휴식을 취하고, 원정팀 선수들은 숙소에서 최대한 늦게 출발한 뒤 야구장에서 몸만 풀고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 KIA 챔피언스필드 경기장 관계자가 그라운드에 물을 뿌리고 있다. / 연합뉴스
불가피하게 수비 훈련이나 러닝이 필요한 날에는 구단들이 더그아웃에 대형 냉풍기를 설치해 놓고 선수들이 수시로 열기를 식힐 수 있게 했다. 한 선수는 “휴식일에도 외출을 가급적 삼가고 훈련은 실내 훈련장에서 주로 한다”고 했다. 경기 중 더그아웃에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때는 얼음이 가득 든 비닐주머니를 머리와 목에 올려놓는 고전적 방법으로 매 경기 버텨 나간다. 냉장고 속 이온음료와 차가운 물도 5회 이전에 금세 동이 나기 때문에 수시로 점검하는 것도 필수다.
무더운 여름을 잘 나려면 영양 보충도 중요하다. 예전 선수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보양식을 다 섭취했다. 몸에 좋다고 알려진 재료라면 입맛에 맞지 않아도 다 참고 먹었다. 빙그레는 한때 선수들에게 ‘뱀탕’을 돌린 적도 있다. 고원부 같은 재일교포 선수들은 차마 먹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요즘 선수들은 다르다. 좀 더 체계적으로 식단을 관리한다. 한 코치는 “우리가 선수생활을 할 때는 다들 한약은 기본으로 먹고 부모님들이 희귀 음식들도 경쟁적으로 구해다 주곤 했다”며 “요즘 선수들은 영양제들을 잘 챙겨 먹고, 도핑테스트 적발 위험이 있는 한약보다 부담이 덜한 홍삼 정도를 수시로 먹는다. 보양식도 한우나 삼계탕처럼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전했다.
# 대구구장과 양배추의 전설
3년 전까지만 해도 ‘더위 지옥’이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장이 하나 존재했다. 삼성이 프로야구 원년부터 2015년까지 홈구장으로 썼던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이다. 분지에 위치한 대구는 가뜩이나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별명까지 붙은 지역. 게다가 시민운동장 야구장에 깔린 인조잔디에 그라운드에서 올라오는 복사열까지 합해지면 그야말로 ‘습식 사우나’가 따로 없었다. 많은 야구인은 삼성이 전통적으로 여름에 강했던 이유로 바로 그 무더위를 꼽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홈구장의 더위에 익숙한 삼성 선수들에 비해 원정팀들은 대구 경기 적응이 어렵고, 반대로 다른 원정 구장은 대구에 비해 덜 더우니 삼성 선수들에게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다”는 설명이다. 삼성 선수들도 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만큼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 화제가 됐던 박명환의 양배추 사건 당시 모습. / 연합뉴스
이 때문에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대구구장에 대나무로 만든 발까지 등장한 적이 있다. 더블헤더가 종종 열리던 1980년대 후반 얘기다. 안 그래도 무더운 대구구장에다 원정팀 더그아웃에는 홈팀보다 두세 배 많은 햇빛이 쏟아지는 상황. 이틀 연속 더블헤더 일정이 잡혀 있던 빙그레 프런트가 묘수를 냈다. 고심 끝에 인근 시장에서 거대한 대나무 발을 구입해 경기 전 훈련이 한창인 더그아웃 앞에 늘어뜨렸다. 감독의 시야를 가리고 선수들의 동선이 불편해진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거둬들였지만, 경기력 향상을 위한 프런트의 노력은 모두 높이 샀다는 후문이다.
삼성이 2016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는 확실히 시민운동장 야구장과 비교하면 ‘천국’이 따로 없다. 메이저리그식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는 데다, 천연잔디라 지열이 덜 올라온다. 야구장 주변도 시원하게 트여 있어 이전 구장에 비해 바람도 잘 통한다. 무엇보다 더그아웃과 관중석 복도에 미스트 노즐이 설치돼 있다. 여름이면 안개처럼 물이 분사돼 열기를 식혀준다. 삼성의 한 코치는 “올여름엔 그 안의 물마저도 가열돼 ‘미지근한’ 물안개가 나오곤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귀띔했다.
또 하나 더위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 은퇴한 투수 박명환의 ‘양배추 사건’이다. 박명환은 땀이 많은 체질인 데다 한때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앓아 유독 무더위에 약했다. 머리에서 땀이 너무 많이 흐르면서 시야까지 가려 투구에도 지장을 받기 일쑤였다. 안타까워하던 아내가 남편을 도울 방법을 찾다가 “양배추가 머리 위 열을 식히는 데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2004시즌 중반부터 남편이 선발 등판하는 날이면 손수 손질한 양배추를 아이스박스에 넣어 챙겨 주기 시작했다. 박명환도 이닝이 끝날 때마다 얼음물 안에 넣어 뒀던 새 양배춧잎을 모자 속에 넣고 공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2005년 6월 19일 잠실 한화전에서 공을 던지다 모자가 벗겨지면서 그 안에 넣어뒀던 양배추잎 한 장이 마운드로 떨어진 게 문제였다. 예기치 못한 물체의 등장에 단숨에 ‘박명환의 양배추’는 야구계의 화제가 됐다. 곧바로 KBO 규칙위원회도 열렸다. 모자 속의 양배추가 ‘투수가 이물질을 몸에 붙이거나 지니고 있을 때 퇴장시킬 수 있다’는 야구규칙에 해당하는지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결국 “양배추는 투수가 던지는 공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물체로 볼 수 없지만, 투구 도중 이물질이 떨어지는 것은 타자의 타격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 금지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당시 박명환의 양배추 사용을 부정행위라고 손가락질한 이는 없었다. 상대팀인 한화조차 웃어 넘겼고, 오히려 야구팬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안긴 해프닝으로 여겨졌다. 박명환 역시 NC에서 은퇴한 후 마산 해안가에 ‘블루 캐비지(Blue Cabbage·푸른 양배추)’라는 이름의 펍을 열어 ‘양배추’와 인연을 이어갔다.
배영은 / 일간스포츠 기자
자료출처 : 일요신문 [제13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