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 01. 20
한국 현대사의 진통기 때마다 흑막(黑幕) 요인으로 작동됐던 권력기관들의 적폐가 이번에는 제대로 청산될 수 있을 것인가. 때로는 최고 권력의 통치 기반이자 하수인으로, 때로는 인권탄압의 중추기관으로, 때로는 국민 여론조작 산파기구로, 때로는 국가 부정부패의 산실 등으로 온갖 오욕을 점철해온 우리의 권력기관들_. 이제 그 '개혁'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국가정보원과 검찰 경찰 등 주요 권력기관들의 지난 행적은 그야말로 짙은 陰陽의 실상들로 얼룩져 왔다. 국가안위와 사회질서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해온 것도 사실이나, 그 이면에서는 오히려 적지않은 역기능의 폐해가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혼돈으로 몰아 넣었던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들 기관들에 대한 개혁이 선언 됐지만, 언제나 그 결과는 구호에 그쳤고 파행과 국가사회적 폐해는 결코 근절되지 못했다. 이번 문재인 정부의 개혁 처방은 과연 어떤 흐름과 결과를 낳을 것인지, 그 현황과 전망, 그리고 시대사적 교훈을 조명한다.
개혁의지…경찰권한 확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 개혁안이 발표됐다.
개혁안의 핵심은 권력기관이 갖고 있던 기존 권한을 분산하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도록 바꾸자는 내용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 14일 이 개혁안 발표와 함께 “민주화시대가 열린 후에도 권력기관은 조직 편의에 따라 국민의 반대편에 서 왔다”며 “촛불시민혁명에 따라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악순환을 끊고자 한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그동안 권력기관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입증됐다. 이로인해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셌지만, 지금까지 정부는 말만 앞세웠을 뿐 국민이 체감하는 제도 개혁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번 발표로 새 정부 출범 8개월 만에 비로소 권력기관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종합 청사진이 마련된 셈이다.
이 청사진의 골자는 검찰과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경찰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국정원과 검찰에 쏠린 과도한 권한을 분산시키고 자치경찰제 도입 등의 견제장치로 경찰의 비대화를 방지하겠다는 게 주요 논리다.
국정원은 대외안보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꿔 대북·해외 업무만 전담케 하며, 경찰은 수사권 조정으로 수사권한이 강화되면서 안보수사처(가칭)를 신설,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까지 넘겨받도록 했다. 반면, 검찰은 고위 공직자 수사를 위해 신설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가 맡도록 하는 대신, 일반 수사는 경찰로 넘기고 경제·금융 등 특수수사만 맡도록 했다. 법무부의 탈검찰화도 추진키로 했다. 특히, 그동안 공허하게 논란만 거듭했던 검찰개혁안의 경우 그 핵심을 건드렸다는 데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일부 정치권과 검찰 내부의 저항이 컸던 수사권 이관 문제에 대해서는 절충안을 제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청와대는 수사권 조정과 국정원 대공수사권 이관으로 권한이 비대해질 경찰의 경우 경찰청을 중심으로 한 국가경찰과 자치단체 소속 자치경찰로 조직을 분할, 권력 남용으로 인권침해를 남발하지 않도록 후속 견제장치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수사·행정경찰 분리, 경찰위원회 실질화 등의 방안도 적용키로 했다.
보다 본질적 측면으로서는, 권력기관이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면서 국가 시스템이 무너졌던 지난 정권들의 실패 사례들을 상기할 때, 이번 방안은 권력기관 개혁의 종합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결코 의미가 적지는 않다.
국민의 반대 편에서 정치권력에 복무해 온 권력기관을 국민 편에 두겠다는 文정부의 개혁 의지는 의심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5월 취임사에서도 “권력기관을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 그 어떤 기관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견제 장치를 만들겠다”며 권력기관 개혁의 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 이번 개혁방안에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국회 조정방향 관건
그렇지만, 이 청사진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번 청와대의 '권력기관 개혁' 방향은 총론에 불과하다. 각론적 심의에 들어가면 검토해야 할 사안이 적지않다. 긍.부정적 입장의 논리들도 가파르게 교차하고 있다. 상충되는 핵심 현안들에 대한 조정이 얼마나 순조롭게 진행 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번 조치의 핵심인 수사권 조정은 영장청구를 검사가 하도록 규정한 헌법 조항을 고치지 않는한 정리되기 힘들다. 더구나 수사권 조정이나 공수처 신설, 국정원 개편 등의 개혁안은 국회를 통과해야 완성된다. 청와대는 이번에 그 방향만 밝히고 공을 국회로 던진 형국이다.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국회 사법개혁특위는 이번주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하지만 많은 진통이 예상된다. 여야 간 견해차가 큰 탓이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공수처에 대해 ‘옥상옥’이라며 강력 반대하고 있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방안도 안보수사 역량 저하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사개특위는 6월 말이 활동 시한이다. 지방선거로 모든 정치 이슈가 매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뤄야 한다는 시간적 제약이 있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번 발표에서 언제까지 어떻게 국회와 협력적 관계를 맺고 발의된 법안이 통과되도록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국회 사법개혁위원회가 본격 가동되면 여야를 막론하고 만나겠다는 이야기가 전부다.
관건은 역시 만만찮은 국회의 현실 여건이다. 청와대는 “정치권의 협조를 바란다”며 공만 넘길 게 아니라, 야당을 최대한 설득하고 포용하는, 보다 실질적인 협치(協治)의 정치로 권력기관 개혁의 시대적 소명을 이뤄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정부의 권력기구 개편 방안은 공허한 측면이 있다. 보다 구체적인 추진방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개혁의 핵심 대상인 검찰이야말로 어느 조직보다 변화에 대한 저항이 크다. 국민적 요구가 드높은 공수처 신설문제의 경우 이미 제출돼 있지만, 여야 계산법이 달라 해를 넘기고도 국회에서 헛바퀴만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 인권.편익 기준돼야
어렵게 시동을 건 국회 사법개혁특위도 더이상 미루지 말고 사법개혁에 가속을 붙여 줘야 한다. 6월 말까지 사법개혁 입법의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 야당은 청와대가 사법개혁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며 불쾌해 하지만, 지금 그런 한가한 반응은 동의를 얻기 어렵다. 여야는 현재 권력기관 개혁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그 진실된 여론을 면밀히 파악, 정책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검·경·국정원 개혁은 결코 정략적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의 권력기관 사유화를 지켜봤고, 그래서 그런 대통령을 퇴진시킨 ‘촛불 시민’의 요구이자 시대적 과제란 인식이 보편적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문재인 청와대와 이명박 전 정권이 정면충돌하는 양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국회는 권력기관 개혁 법안을 가능한 조속히 심의, 입법하는 게 국민 염원에 부응하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권력기관을 정치와 단절시키고 본연의 임무에만 전념토록 하자는 것은 온 시민의 오랜 염원이다. 민주화 30년이 지나도록 이를 완수하지 못한 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권력기관 개혁이 이뤄질지 기약하기도 어렵다. 여당은 야당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는 협치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야당도 시민 다수가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마당에 무작정 반대는 시대착오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권은 이번 심의에서 당리당략이 아니라 시민들의 인권과 편익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권력기관 개혁은 시민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몰고 올 사안임이 분명하다.
대공 수사권 이관 우려
사안의 실질적 판단을 위해서는 이번 조치를 보다 심층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번 권력기관 개혁안에는 기본적으로 국가정보원과 검찰에 대한 깊은 불신이 바탕에 깔려있다. 지속적인 국내 정치 개입 사례가 드러난 국정원과 ‘정권의 시녀’라는 오명을 스스로 떨쳐 버리지 못한 검찰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 활동 결과 그동안 집중된 권한을 악용, 불법 사찰과 선거 개입을 하거나 정권 입맛에 맞게 과잉 또는 축소 수사한 사실이 시대별로 곳곳에서 드러나 결국 도마에 오르게 된 국정원과 검찰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측면이 크다.
허지만, 대신 수사권한을 이관 받아 공룡기관으로 커진 경찰권의 이상 비대화를 우려하는 여론도 분명히 있다. 청와대는 자치경찰제를 도입하고 수사·행정 경찰을 분리하는 한편 경찰위원회의 실질화나 공공형사 변호인 제도를 도입해 권한 남용을 막겠다고 하지만, 검찰의 공식 견제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 단독의 인권 침해나 부실수사 우려를 없애려면 보다 근본적인 쇄신안을 추가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염려되는 대목은 국정원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으로 볼 수 있다. 이번 방안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청 산하에 신설되는 안보수사처가 넘겨받아 진행하도록 했다. 국정원은 국내 정치와 대공 수사에서 손을 떼고 대북·해외 정보 수집에만 전념하게 했다.
문제는 대공수사권 폐지와 그간 문제가 돼온 '국정원 적폐'와의 상관성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과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정원 등에 대한 비판대상은 주로 반체제 인권탄압을 비롯 댓글 공작을 통한 선거 개입, 정치인·지식인·연예인 등에 대한 사찰 그리고 특수활동비 상납 등의 행태가 주류를 이뤘다. 이들 활동은 국내 정보 수집과 연결돼 있을 뿐 직접적 대공수사와는 상관이 없다. 간혹 대공수사 과정에서 간첩단 조작이나 인권침해 의혹이 제기된 적도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와 연관된 좌.우익 충돌 등 대부분의 인권 사고가 터진 곳은 국정원이 아니라 검찰과 경찰이었다. 그렇다면 대공수사권을 왜 경찰에 넘겨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국정원 개혁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제 정보전과 남북대치
또 하나, 더 중요한 것은 경찰이 국정원만큼 대공수사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느냐는 의문이다. 세계 모든 정보기관은 각국 안보 사정에 따라 특화된 기능과 제도를 갖고 있다. 우리의 국정원 대공수사권은 남북 대치라는 세계 유일의 안보 상황에 맞춰 진화된 시스템이다. 통합진보당 사건에서 보듯 한국은 이적 단체의 반국가 활동이 실제 체제를 위협하는 국가다. 결정적 물증 확보에만 수년이 걸리는 이들 수사는 정보 수집과 수사권의 유기적 결합이 있을 때 가장 효율성을 발휘한다. 일심회 사건, 왕재산 사건 등 2000년대 이후 굵직한 간첩단 사건은 국정원 수사권이 빛을 발한 대표적 사례다. 청와대는 "경찰에 안보수사처를 신설, 대공수사의 전문성·책임성을 고양하겠다"고 하는데 국정원의 대북 정보 수집과 경찰의 수사권을 분리시킨 상태에서 어떻게 전문성을 고양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란 지적이 나올 만 하다.
사실, 대공수사의 경우 경찰이 국정원의 정보력이나 노하우, 인력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경찰도 대공수사를 해왔지만 대체로 이적표현물 게시 등 단순 사건 위주여서 상당 기간 대공수사의 공백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국정원을 개혁하려면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잘못된 관행을 없애야지, 국가 안보에 꼭 필요한 기능을 폐지해서는 자칫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국정원은 국내 정보수집권과 대공수사권이 없어지면 사실상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북한 핵·미사일 도발로 어느 때보다 안보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국정원의 대북 정보 수집능력까지 현저히 떨어지지 않을지 크게 우려되는 대목이다.
민주화시대라고해서 국가정보기관의 본래적 역할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탈냉전시대라곤 하지만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정보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도 국정원이 맡아야할 역할과 책임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미국의 CIA는 물론 영국의 MI6,러시아의 KGB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보위를 위한 정보활동 강화는 물론, 해외경제 정보를 수집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공업무를 관장하는 국정원의 역할과 책무는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권력기관의 국정농단
참된 반성을 위해 지난날 권력기관의 굴절된 역사는 중요하다. 한국 정보기관의 파행사는 오래됐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세력을 권력기관이 미행, 감시하는 불법이 관행처럼 언제나 자행돼 왔다. 때로는 전화도청, 사생활감시와 외부차단 등 무차별적 인권침해 행위를 거침없이 저지르기도 했다. 그 대상은 반정부인사나 야당정치인에만 그치지 않았다. 툭하면 요시찰 인물이란 낙인을 찍어 활동을 미행하는 '공작'이 선량한 시민들에게도 가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하고 무법·초법적인 활동을 했다.
이런 정치공작은 특히 3공과 유신에 이어 5공정권에서 노골화 했다. 정보정치의 산물이자 상징이었다. 그 반작용으로, 권력기관 개혁은 역대 정권 때마다 도마에 올랐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검경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 개혁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두가 되곤 했다. 나름대로 개혁 방침을 천명하곤 했지만 항상 그때 뿐이었다. 국정원만 해도 벌써 4번째 이름을 갖게 됐다. 좌우 정부를 막론하고 임기 초에는 개혁을 내세우다가 나중에는 권력기관을 정권의 도구로 쓰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권력기관 도움을 빌리겠다는 유혹을 버려야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지만, 결국엔 그 관건인 권력자의 마음 비우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탓이 크다. 이런 경향은 거의 모든 역대 정권이 집권 초기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약속했으면서도, 임기만료전 모두가 실패하고야 마는 역사적 경험들을 남기게 했다. 정보기관 개혁 역시 최고 권력자의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다시 일깨운다.
이들 기관의 흑(黑)역사는 막후에서 줄을 세우는 정치권력과 여기에 고개 숙인 고위 간부의 잘못된 처신이 태생 배경이다. 법이나 제도, 기능의 조정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권력기관을 정권의 하수인으로 쓰지 않는 것이다. 이제 과거 정권에서 반복됐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 전통을 세울 때가 됐음을 알리는 교훈이기도 하다.
검찰과 국정원이 권한을 제대로 쓰려고 노력만 했어도 지난 정권의 국정농단이 그 지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화 정권기인 참여정부 시절에도 검·경이 스스로 힘의 균형을 조율하게 자율권을 줬다가 결국 실패한 것도 그런 반성의 사례가 될 만 하다.
▲ 지난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발표하는 이명박(MB) 전 대통령.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정원, 권력시녀化와 부패
국가정보원의 역사는 이런 권력기관 파행사를 상징한다. 국정원은 지난 61년 5·16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란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당시 실세였던 JP(김종필)가 이를 조직하고 초대 부장이 되었다. 대공 정보·수사의 중추적 기관으로 발족했지만 보다 직접적 목적은 ‘반혁명세력’의 제거와 근절에 있었다. 제3공화국과 유신통치기간을 거치며 중앙정보부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굳혔고 그만큼 악명을 떨쳤다.이 기관은 그러나, 그 위세의 절정기에 갑자기 파국을 맞았다. 현직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 바람에 정보부의 위상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억압당해 왔던 국민의 반감도 폭발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5공세력에 의해 안기부로 문패를 갈아달고 되살아났다. 과거보다는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권부로서의 지위는 여전히 막강했다. 그후 6공과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등을 거치며 나름대로는 쇄신노력을 보였으나 여전히 환골탈태에는 이르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 정보기관의 사찰 및 정치개입을 엄하게 금지해왔다. 박정희·전두환 때의 암울한 공포정치로 돌아갈 순 없기 때문이었다. 국정원의 직무를 법률로 엄격히 한정하면서 어떤 이유로든 민간 사찰은 할 수 없도록 금지한 것은 ‘정보정치’의 망령을 부활시켜선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파행은 여전했다.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은 끊임없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였다. 대선 댓글 공작, 서울시공무원 간첩조작, 민간인 해킹의혹 사건 등으로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서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 반면 정작 북한 정보 수집에서는 숱한 허점을 노출했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지뢰 폭발 사건 등 북한의 도발을 사전에 탐지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본연의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엉뚱한 일에 끼어들어 잡음만 일으킨 형상이었다.
정권 보호 차원의 국내 정보 수집은 현행법에도 명백히 금지돼 있다. 국정원법은 국내 정보 수집 대상을 대공ㆍ방첩ㆍ대테러로 한정하고 있다. 민간인들을 뒷조사하고 시민단체 동향을 파악하는 행위는 중대한 불법행위다. 지난 2015년 당시 이병호 국정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국정원을 망치는 일”이라며 “불미스런 과거와 절연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이 또한 말뿐이었지 국정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근간에 들어 전 정권의 수장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된 상황은 치욕의 국가정보원 실태를 생생히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 시절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상납한 혐의 등으로 청구된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에 이어 이명박 정부 때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까지 포함해 4명의 전직 원장이 잇따라 형사처벌 대상에 오른 것 자체가 실로 예삿일이 아니다.
이같은 현상들은 민주화 이후 각 정권들이 출범시에는 언제나 권력기관의 중립성과 개혁을 외쳤지만, 실제로 현실은 때때로 그 반대가 되어 왔음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지난 2005년 DJ정부의 국정원도 조직적이고도 대규모로 도청을 했음이 드러난 적이 있다. 당시 국정원 도청사건 수사를 맡았던 검찰은 김은성 전 차장 공소장에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을 ‘도청을 지시 또는 묵인한 공범’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정치인 등 유명인사들에 대한 무차별 정치사찰로 권력 실세의 입맞에 맞는 ‘도청 정치’를 뒷받침했다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국민의 정부도 도청에서 얻은 비밀 정보로 권력을 지탱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했다. DJ정부 국정원은 그 때 유선중계망감청장비(R-2)에 주요 인사들의 전화번호를 미리 입력해 놓고 수시로 도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이 공개한 7건의 사례를 보면 도청 대상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 소장파의 권노갑 최고위원 퇴진운동뿐 아니라 민주·자민·민국당 정책연합 관련 통화, 임동원 통일원장관 해임안 관련 자민련 의원 통화 등도 도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단순한 도청을 넘어선 사실상의 정치사찰이었다.
국민 입장에서는 역대 대통령의 비슷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권력기관이 시녀화한 경우를 아직도 여실히 기억하고 있다. 왜 국정원,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 될 수 없었는가. 한마디로, 대통령과 청와대가 ‘말따로, 행동따로’였기 때문이다. 취임초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취임하고 얼마되지 않아 권력에 함몰된 제왕적 대통령이 되면서 그런 초심을 언제나 망각했던 것이다.
부패의 고리 - 국정원 특활비
그런 파행 속에서 내면적으로 권력기관 부패를 상징하는 고리는 역시 최근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에서 표면화된 국정원 특활비(특수활동비)였다. 매년 약 1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이 자금은 기밀유지 속에 영수증과 증빙도 필요없고, 심의도 사실상 받지않는 이른바 '눈먼 돈'으로 지칭돼왔다. 사실상 감시 사각지대의 국가예산이었다.
당시 국정원 핵심간부들은 국가가 기밀유지 정보활동이나 올바른 수사를 위해 사용하라고 책정해 준 이 돈을 사각지대의 활용도를 이용, 세속적인 '검은 돈'처럼 청와대 권력을 위해 이-박정권의 실세들에게 수시로 갖다 바치고, 스스로 제멋대로 쓰기도 한 것이다. 이런 행태가 바로 국가 부패를 선도하고, 결국엔 대통령이 구속되는 등 대형사건을 유발, 국가 질서를 어지럽힌 요인이 되었다.
일 예로, 이명박(MB) 정부 국정원의 경우 최근 수사 중인 주요인사들의 상납사건 외에도 원장의 특활비 사적 유용은 물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민간인 여론 조작팀(사이버 외곽팀) 활동 비용으로 30억원의 특활비를 사용하기도 했다. 여론조작이란 反사회적 활동에 까지 특활비를 투입한 것이다. 즉, 검찰 수사 결과 당시 국정원 심리전단은 2009년 5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민간인으로 구성된 30개팀(3500명)을 조직적으로 운영, 그 인건비로 한 달에 2억5000만~3억원을 지급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박근혜 정권으로 바뀐 후에도 국정원 특활비는 주머니 쌈짓돈처럼 마구 사용됐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실세들에게 거액의 특활비가 상납됐다. 박 정부 첫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남재준 원장은 2013년 5월부터 1년 가까이 자신의 비서실장을 시켜 특활비 중 매달 5000만원을 이재만 당시 청와대 총무 비서관에게 전달했고, 이병기 전 원장도 동일한 수법으로 청와대에 특활비를 상납했다. 이 전 원장은 당시 이헌수 국정원 기조실장을 시켜 매달 1억원씩 총 8억원의 특활비를 당시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에게 전달한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현재 20개 기관 정도가 쓰고있는 국가 특활비 예산은 올해의 경우 전체 규모가 7천8백억원대로 추정된다. 이들 기관들 중에서 경찰청, 국방부 이런 곳들이 1천억 원 넘게 좀 많이 쓰는 곳이고, 국정원은 전체규모의 60% 이상인 4천6백억원을 사용, 1위를 기록해 다른 19개 기관을 합친 것 보다도 많다.
국정원 특활비가 유독 그렇게 많은 이유는 그동안 오랜 분단체제 속에서 정보기관의 특수분야 활동을 기밀화 시켜온 측면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국정원 예산은 좀 특별하다. 다른 부처들은 보통 전체 예산이 있으면, 1% 내외를 특수활동비로 배정하는데 국정원은 예산전체 100%가 특활비다. 심지어 사무용품을 산다든지, 일반 경비도 모두 특활비로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여기에다 국정원은 다른 기관의 예산까지 끌어다 쓸 수 있도록 했다. 국가정보원법 12조 예산 조항이 국정원 비밀활동비는 구체적 내역이 없더라도 다른 기관의 예산에 계상할 수도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따라서 국정원의 원래 특활비 예산은 4천억, 5천억 정도이지만, 여기에다 다른 기관에서 가져다 쓰는 돈 까지 합치면 매년 사용규모가 총 1조원에 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산심사를 할 때 '특혜'는 한번 더 있다. 다른 부처들은 기획재정부에 예산안의 구체적 내역을 내고 국회 상임위, 그리고 예결위 두 번 심사를 받지만, 국정원은 예산을 낼 때도 얼마나 쓰겠다는 총액만 내면 된다. 심사 또한 비공개로 진행되는 정보위에서 딱 한번만 받으면 된다. 이 때문에 그야말로 '사각지대의 돈'이란 평판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깜깜이 예산인데다 견제도 허술하기 때문에 최근 상황처럼 상납까지 하는 황당한 일들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이제 국가정보원 특활비 구조 또한 근본적 수술이 필요한 핵심분야가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에는 선진 해외 정보기관들의 기금운용 방식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는 정보기관이 의회에 각 사업의 목적과 금액을 세세히 제출하도록 돼 있고, 의회내 최소 8개 위원회가 이 계획과 금액을 제대로 심사, 고치도록 돼있다. 독일도 활동별 상세한 내역을 제출해야 하고, 사후엔 감사를 받도록 하고 있으며, 영국은 우리와 비슷하게 의회 제출때 총액만 내면 되지만, 매년 철저한 예산 감사를 받아야 한다.
반면, 한국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그 이전 정부 때도 국정원의 특활비 전용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몇 차례 비슷한 의혹이 제기된 적은 있었지만 매번 정치권에서 공방만 벌이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국정원 특활비 중 겨우 1% 정도가 최근 검찰 수사로 베일을 벗고 있을 뿐인데도 일반 여론은 “충격적이다”는 반응이다. 한국납세자연맹 등 시민단체들은 “제도적 감시와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특활비를 이번 기회에 아예 폐지하라”고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다.
결국 현재의 국정원 특활비 제도는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고, 운용방식도 분야별로 고쳐야 할 대목이 한두군데가 아닐 정도다. 국정원의 부정부패나 개인 비리, 청와대의 권력 남용 가능성은 철저하게 견제·감시돼야 마땅하다. 이번 검찰 수사를 계기로 국회를 중심으로 '특활비 폐단'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작업에 나설 필요가 있다. 국정원 적폐청산 TF팀도 박근혜·이명박 정권의 정치사건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특활비 관행의 문제점을 면밀히 조사, 대안을 내놓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권력기반 檢.警 역기능
검.경의 파행사도 문제는 심각하다. 한국 검찰은 수사·기소권을 독점하고 영장청구권과 형집행권까지 쥐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 검찰도 갖지 못한 권한이다. 이 무소불위 권력을 갖는 대가로 검찰은 대통령의 충견(忠犬)이 돼 정치보복과 표적수사에 앞장서왔다. 이들을 어떻게 대통령과 절연시키느냐가 문제해결의 관건이 된 적도 많았고, 내부 부패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한 우리 사회의 분란과 소모전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지난 1993년 5월 발생한 검찰 내부의 슬롯머신 비호세력에 대한 수사를 꼽을 수 있다. 수사결과 그간 정덕진형제로부터의 수뢰 사실을 극구 부인해 오던 이건개전대전고검장이 결국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수수혐의로 구속수감됐고, 신건전법무부차관과 전재기전법무연수원장은 구속을 면하기는 했지만 공직은 지키지 못했다. 또 다른 슬롯머신업자 양경선씨로부터 승용차를 받은 김승희전김천지청장도 의원면직됐다. 사정당국이 엄청난 사정한파를 겪은 셈이었다. 비록 반려되긴 했으나 당시 김두희법무부장관·박종철검찰총장이 사표를 제출하는등 검찰의 진통은 컸다.
검찰뿐 아니었다. 당시 슬롯머신사건 수사과정에서도 어김없이 다른 일부 기관의 부패병도 함께 노출됐다. 이 사건과 연관, 검찰은 물론 감사원 안기부 경찰 국세청등에 대해서도 고강도의 숙정이 예고될 정도였다. 그러리라고 짐작했던 국민들이 새삼 놀라워할 만큼의 중증이었다. 정부로서는 다시금 '사정기관 사정' 의지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검찰이 중립성을 잃고 정치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것은 역대 정권이 강요한 탓도 있지만, 검찰 스스로 자청한 측면도 없지않다. 이제는 검찰이 응답할 차례다. 검찰은 시대의 진운을 제대로 읽고, 국민이 강요하기 앞서 스스로 기득권을 버리고 개혁을 받아들임으로써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경찰도 역시 그런 측면이 강하다. 뿌리 깊은 경찰 불신도 해소하기 어려운 상태다. 최근 영화 <1987>이 다룬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경찰 폭력’ 때문이었다. 그걸 단지 ‘30년 전 과거’라고만 치부할 순 없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숨지고 경찰 수사의 공정성을 국민이 의심하는 건, 아직 경찰이 ‘신뢰를 받는 수사기관’으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증거다. 경찰 스스로 뼈를 깎는 자성과 외부 감시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청와대는 일반 경찰과 수사 경찰을 분리하고 자치경찰 제도를 도입해 경찰권의 남용을 막겠다고 했지만, 文정부의 이번 권력기관 개혁이 현실화 될 경우 경찰권의 권한과 임무는 크게 확장될 수 밖에 없다. 현재 경찰의 인원은 10만명을 넘는다. 수사 경찰만 2만명이 넘을 정도다. 만약, 이 거대 조직이 새 개혁안 실행이후 폭주할 경우 권한 남용과 인권 침해는 검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그간 경찰 내부 비리도 검찰 못지않았다. 1991년 경찰청 출범 이래 경찰청장 20명 가운데 8명이 비리로 유죄판결을 받았음은 이를 증거한다.
억울한 민간 피해
민간의 피해사례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수사기관들이 독재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법위에 군림하면서 임의동행의 미명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짓밟았던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5공 종말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군 사건도 그래서 일어났었고, 각종 축소조작 관련자들에 대한 무죄판결로 그 아픈 기억이 증폭된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난 1990년 8월 발생한 2건의 불법연행사건은 대표적 사례였다. 당시 시사토픽 객원기자 노가원씨에 이어 전 서울대 여학생회장 이진순씨 불법연행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사건이 더욱 나쁘게 느껴지는 것은 우선 수사기관의 명백한 실정법 위반일 뿐 아니라 과거 독재권력하에서 수사기관이 정권안보차원에서 남용하던 구시대적 악습을 그때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폐습을 바로잡아 민주질서를 구축해 나가려는 시대정신을 국가공권력을 행사하는 수사기관이 먼저 짓밟아 버리는 한, 법질서나 사회기강 확립의 길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지난 2000년 10월에는 수사기관의 불법 도·감청이 여론의 지탄을 받는 가운데서도 2년여동안 개선은 커녕 되레 퇴행한 사례가 드러난 적도 있었다. 당시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김진재의원이 제시한 ’불법·부당 감청 및 정보제공 실태’에 따르면 모든 통신수단을 망라한 수사기관의 엿듣기·엿보기가 가위 ’무소불위(無所不爲)’ 상태에 있었음을 확연히 보여줬다.
그 때 수사기관은 97년 1월 부터 99년 6월까지 15개 통신사업자로부터 2288회에 걸쳐 비밀번호 3494개를 불법제공 받아 불법 긴급감청, E메일·PC통신 감청, 수사기관의 무인가 감청설비 도입 등 ’권력기관의 반(反)인권’사례를 수없이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기관의 인권의식은 물론 주무부서의 감독부실도 큰 문제로 부각됐다. 그 시기 정부는 인권정부를 자임하고, 한 예로 통신인권을 역설해온 터였다. 그럼에도,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3년가까이 헛바퀴만 돌았고, 언제나 말뿐이었음을 이 사건 또한 여지없이 보여줬다. 한국의 권력기관 파행사는 이렇게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며 흘러왔다.
'국민의 기관'으로 거듭나야
문제해결의 핵심은 역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과 권력기관의 관계 단절에 의한 정치적 중립에 달려있다. 국정원장이든 검찰총장이든 경찰청장이든 수사 담당 기관의 책임자 임면권에서 대통령이 손을 떼면 된다.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하는 중립적 인물을 단수 추천하고 대통령이 형식적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해당 기관 내부 인사(人事)는 전적으로 기관 책임자에게 맡기면 된다. 권력기관 독립은 저절로 이뤄지고 정치보복이니 표적수사니 하는 것도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인권,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직무를 수행하는 권력기관에 가장 요구되는 것은 공정성과 독립성이다. 권력기관의 민주적 권력 행사와 독립된 직무 수행은 국민의 권리 보호를 위해 필수적인 토대이다. 합법적으로 폭력 행사권을 부여받은 권력기관이 독립성을 잃고 특정 정치권력의 도구가 될 경우, 그 폭력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고 법치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특히 국정원 개혁의 요체는 누가 뭐래도 정치적 중립이다. 개혁이 정치 관여나 불법 활동을 차단하는 데 목적을 둬야지 인위적 물갈이로 귀결돼선 안 된다. 정치보복 자체가 적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정원은 개혁의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중립적 관점에서 조사하고 개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청와대의 중립 의지가 중요하다.
실질적 대상은 다음 정권이 임명한 사람으로도 넘어가게 돼있는 만큼, 지금이야말로 여야 모두 사심없이 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쇄신책을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호기가 아닐 수 없다.
국경 없는 경쟁시대를 맞아 국정원 임무도 대북 정보 등 국가안보와 국제 경제정보의 기여를 통해 국익을 극대화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국정원은 ‘국민의 정보기관’이어야지 ‘권력의 정보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정기관에 대한 사정은 변함없는 '개혁의 핵심과제'다. 지난 시절, 이른바 권력기관들은 국민이 아니라 집권자및 정권에 봉사하는 조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들 스스로도 초법적 존재로 행세하며 국민위에 군림해 왔다. 그런 행태가 애초에 정통성·정당성을 결했던 구정권들을 불신의 늪으로 밀어넣었고, 결국은 붕괴에 이르게 했음을 다시 상기케 된다. 이번 文정부의 권력기관 개혁 노력도 해당 기관의 개명이나 신설 등으로 해결될 사안이 결코 아니다. 과거 반국가적, 반국민적 적폐를 이번만은 기어이 청산시키고야 말겠다는 본질적 개혁의지가 중요함을 정부와 국회 모두에 주문한다.
이병도 주필
출처 : 시사오늘(시사ON)(http://www.sisaon.co.kr)